하이테크 산업은 시장이 드러나기 전까지 아무런 밑그림을 그릴 수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기존의 경제학 교과서에 등장하는 수요 공급 이론으로 하이테크산업의 흥망을 설명해내기란 힘들다. 여기에 복잡성의 과학을 경제에 접목시킨 수익체증의 법칙은 오늘날 벤처기업들의 성공을 분석하는데 가장 확실한 해답을 제공한다.
과학의 본질은 사물의 구성과 움직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역사 이래 허다한 인물들이 제기한 각양각색의 이론은 바로 과학의 본질에 접근하기 위한 틀에 다름 아니다. 우주의 근본 물질이 물 불 흙 공기로 이루어졌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론이나 만물이 물로 이루어졌다는 탈레스의 주장, 또 코페루니쿠스 이전까지 정설로 받아들여지던 천동설 등, 요즘같으면 과학사에서나 이야기될 뿐인 ‘황당한’ 이론 조차도 옳고 그름을 떠나 본질을 탐구하는 노력의 하나라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이 가운데 17세기 중반에 등장한 뉴턴 역학은 오늘날 과학이 이 만큼 자리잡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틀로 여겨진다. 뉴턴이 완성한 고전역학은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당시의 세계관을 뒤바꾸어놓음으로써 뉴턴을 ‘근대 과학의 아버지’로 자리 매김했다.
그러나 세상이 날로 복잡해지고, 인지가 발달하면서 뉴턴 역학은 한계를 드러냈다. 물론 일정한 형식을 질서있게 유지하는 이른바 ‘선형계’를 설명하는데 있어 뉴턴 역학은 여전히 위력적인 사고의 틀이다. 하지만 현실세계를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뉴턴역학으로 도저히 설명불가능한, 무질서한(또는 무질서하게 보이는) ‘비선형계’가 무수히 존재한다.
뉴턴 역학이 위세를 떨치기 시작한 이래 무질서의 세계는 과학의 영역이 아닌 것으로 치부되기도 했다. 우리가 ‘아무도 모른다’고 대답하고 있는 질문들, 이를 테면 아미노산과 몇몇 단순한 분자로 구성된 원시 생명체가 세포로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며, 인간의 눈(目)은 왜 세모나 네모가 아니고 동그란지, 현실 세계의 질서는 왜 생겼는지 등은 물음 자체가 무의미했던 것이다.
과학은 제반 현상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해 존재한다. 따라서 ‘아무도 답을 모르는 질문’이 끝내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다면 과학은 존립 근거를 잃고 만다. 바로 이같은 인식에 기본 바탕을 두고, 설명되지 않는 수많은 현상을 단번에 설명하고자 등장한 것이 카오스 이론과 복잡성의 과학이다.
얼핏 별다른 차이점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때문에 상당수 학자들조차 혼용하고 있는 두 이론은 상호연관돼 있긴 하지만 본질은 다르다. 카오스 이론이 혼돈 속에 내재된 질서를 찾으려는 탐구라면, 복잡성 과학은 혼돈 속에서 질서가 어떻게 창출되는지를 밝히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이론
복잡성 과학이 다루는 ‘복잡한 시스템(界)’이란 우리가 숨쉬며 살고 있는 사회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사회를 구성하는 각 요소는 다양한 형태의 상호작용을 통해 환경에 적응해나간다. 복잡계를 복잡적응계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제반 사회현상 가운데 복잡적응계를 살펴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소재는 경제 현상이다. 무생물인 경제는 살아 꿈틀대며 요동친다. 수많은 종류의 재화와 서비스가 모두 가격이란 꼬리를 달고 다니고 있으며, 승승장구하던 회사가 갑자기 도산하는가 하면 이름조차 생소한 기업이 만들어낸 신제품이 치열한 경쟁을 뚫고 시장을 제패하기도 한다.
아담 스미스 이후의 주류 경제학자들은 이같은 현상을 파악하기 위해 경제를 질서정연한 움직임이라고 전제했다. 수요와 공급의 원칙이 충실히 지켜지면서 균형을 이루는 완전경쟁체제에서의 ‘보이지 않는 손’이란 ‘질서’를 가르키는 또다른 용어였다.
그렇다면 과연 경제는 항상 주어진 길을 따라 움직이는가. 1세기 전, 그러니까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이 활동하던 시절엔 그러했는지도 모른다. 이를 테면 가장 좋은 상품이 소비자의 선택을 받는 것처럼,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따라 움직이는 당시의 경제현상은 ‘예측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복잡성 과학의 틀로 경제를 설명하고자 하는 학자들은 경제를 ‘불안정한 계’로 파악한다. 이 분야의 대표적인 학자인 산타페연구소의 브라이언 아더 박사는, 알프레드 마샬로 대표되는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이 생산자의 선택을 설명하는핵심이론인 수익체감의 법칙이 우리 시대의 경제를 설명하는데 충분치 않다고 지적한다. 바야흐로 자원 가공에서 정보의 가공으로, 원자재의 변형에서 착상의 변형으로 경제의 제반 개념이 바뀐 현실에 맞는 새로운 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수익체감의 법칙이란 한 재화를 생산하는데 있어 다른 모든 생산요소(불변요소)의 양을 고정시키고 한 요소(가변요소)를 한 단위씩 추가할 때마다 총산출량은 증가하지만, 그 증가율은 언젠가 감소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 원리의 밑바탕에는 여러 변수의 상호작용에서 작은 변수는 전체를 움직이는데 별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거꾸로 되먹임’(negative feedback)을 전제를 깔고 있다. 한강에 침 한방울을 떨어뜨린다고 해서 한강 수계에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브라이언 아더 박사는 1977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프리고진이 제기한 이론적 틀을 경제학에 적용해 ‘수익체증의 법칙’이란 새로운 이론을 제기했다. 프리고진에 따르면 열역학적으로 평형에서 먼 상태에 있는 계는 불안정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요동한다. 여기서 작은 요동들은 비선형 과정에 의해 거대한 요동으로 증폭되고, 증폭된 요동이 더 격심해지면 이전의 구조를 깨고 혼돈에서 벗어나려는 ‘자기조직화 과정’을 거쳐 새로운 질서가 나타난다. 여기서 ‘거대한 요동으로 증폭되는 현상’을 복잡성의 과학에서는 ‘바로 되먹임’(positve feedback)이라 부르는데, 수익체증이란 이의 경제학 용어인 것이다.
한번 1등이면 영원히 1등
신고전주의 경제학을 지탱하는 한 축인 수익체감의 법칙이 놓치고 있는 부분을 설명하는 이 이론은 오늘날의 경제현상, 특히 하이테크를 무기로 시장에 뛰어든 벤처기업의 성공을 설명하는데 위력을 발휘한다.
전통적인 경제학 이론에서 보자면 소비자들은 가장 값싸고 가장 질좋은 제품을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경제계에는 이를 거스르는, 있을 수 없는 일들이 특정 분야에서 자주 일어났다. 경쟁관계에 있는 제품이나 기업 중 하나가 일단 한번 앞서기 시작하면 질이나 가격에 영향을 받지 않고 좀체 정상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았던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들을 몇 개 살펴보자:
▲ 영문 타자기와 키보드의 맨 윗열에 배열된 여섯글자를 딴 이름의 qwerty자판은 비효율적인 배열을 가지고 있다. 이 자판은 타자기들이 타자 속도가 너무 빠르면 서로 뒤엉켜 고장이 나곤 하던 것을 고려해, 1873년 크리스토퍼 스콜스란 공학자가 타자수의 타자 속도를 조금 느리게 하기 위해 고안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구미에서 사용되는 키보드는 모두 이 배열을 따르고 있다.
▲ VTR이 상품화돼 선 보일 당시에 두가지 방식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일본 소니사가 75년 개발한 베타 방식과 이듬해 일본 빅터사(JVC)가 발표한 VHS방식이 그것이다. 성능면에서 별 차이가 없었던 두 방식은 테이프의 규격, 회전헤드의 규격, 로딩 방식에서의 차이로 호환성이 없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기술적으로 베타방식이 한수 위인 것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VHS방식은 79년경부터 대세를 이루기 시작, 베타방식을 아예 시장에서 몰아냈다. 오늘날 거의 모든 가정에 보급된 VTR은 예외없이 VHS방식의 제품이다.
▲ 1970년대 말 개인용 컴퓨터가 등장하면서 CP/M, 도스, 매킨토시시스템이 치열한 시장 쟁탈전을 벌였다. 이중 가장 먼저 등장한 CP/M은 시장에서 안정적인 위치를 확보했다. 또 뒤를 이어 나온 매킨토시는 간편한 사용법을 무기로 급속한 확장세를 보였다. 반면 도스를 사용하는 IBM 호환 PC는 그다지 성능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도스는 컴퓨터 전문가 사이에서 ‘한심한 운영체제’란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마이크로소프트가 새로운 버전의 운영체제를 선보일 때 마다 사용자들은 모두 자신의 PC를 새로운 운영체제로 장식하고 있다. 일단 시장에서 우월한 위치를 차지한 마이크로소프트는 ‘브레이크 없는 기차’와도 같았다. 윈도95가 발표될 무렵, IBM사가 내놓은 OS/2는 전문가 사이에서 윈도95보다 훨씬 나은 평가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용자들은 여전히 윈도95를 선택했다.
복잡성의 과학이 내놓은 용어인 ‘바로 되먹임’ 현상에 기인한 이들 사례는 간단히 말해 작은 차이가 엄청난 결과를 이룬, 또 성공이 성공을 낳은 대표적인 경우들이다. 도대체 최선을 놔두고 차선, 혹은 그보다 더 열악한 차차선을 선택하는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 이론적으로 보자면 납득할 수 없는 이 일은, 그러나 현실이다.
위의 사례에서 악조건을 딛고 오늘날 가장 우세한 제품으로 성장한 제품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한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경쟁 초기에 상황을 역전시킬 외부적 변수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 ‘바로 되먹임의 증폭’은 시장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한 가지 방식이 다른 것들에 비해 약간의 우위를 점할 때 시작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레미언이란 재봉틀회사가 배열에 따른 타자기를 대량으로 생산하면서 대부분의 타자수들이 이 시스템을 배우기 시작했다. 결국 다른 타자기 회사들도 이 배열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도 이것 외의 새로운 자판이 서구 키보드의 표준으로 사용될 확률은 0에 가깝다.
VTR의 경우 전문 기술자의 평가와 달리 소비자들은 1시간을 녹화할 수 있는 베타방식보다 3시간까지 녹화가 가능한 VHS를 선호했다. 게다가 VHS 표준을 개발한 JVC사는 다른 비디오 제조업체들에게 낮은 사용료를 제시하며 자사의 기술을 개방했다. VHS 방식과 호환성을 갖는 비디오 대여점에서도 베타보다는 VHS 테이프를 더 많이 갖다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단 VHS방식이 사실상의 표준으로 자리잡기 시작하자 제자리 걸음을 하던 비디오테이프의 판매량은 급속도로 늘어났다.
마이크로소프트의 경우는 이들보다 더 극적이다. 많은 하드웨어 회사들이 IBM 호환기종을 생산하자 마이크로소프트는 박리다매를 원칙으로 이들 PC에 자신의 프로그램을 팔았다. 박리다매는 미래의 우위를 위해 현재의 이윤을 희생시키는 고도의 전략이다. 이에 따라 이 운영체제에서 사용할 수 있는 다른 응용프로그램들이 경쟁적으로 발표됐고, 결국 마이크로소프트는 오늘날 독점적인 소프트웨어 제국으로 성장해 있다.
불안정한 계는 기회를 제공
브라이언 박사는 “수익체증의 메커니즘이 모든 산업에서 수익체감의 메커니즘과 함께 존재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대체로 수익체감은 제조업 중심의 재래식 경제 세계를 지배하고, 수익체증은 정보통신처럼 새로운 산업세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이에 따라 제품을 대량생산하는 과정과 정보의 처리과정이라는 두가지 경영세계는 현저히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정보산업의 성격을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시장으로 파악하고, 현재의 경쟁을 카지노 도박에 비유한다. 한쪽에서 멀티미디어 게임에 몰두해 있는 사이 다른 쪽에서는 인터넷이란 게임이, 또 한쪽 구석에서는 전자금융 게임이 벌어지는 대형 도박장. 여기서 필요한 것은 탁월한 기술과 두둑한 자본력, 그리고 수익체증 현상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진행될 때 시장을 떠나는 결단을 포함한 과감한 용기와 의지다. 특히 이 도박장에서의 승리는 기술이라는 안개 속에서 새로운 게임의 출현을 감지하는 첫번째 사람에게 돌아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전쟁통에 큰 부자가 생긴다’는 옛말도 있듯이, 불안정한 계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나 성공은 시장의 속성을 파악하고 여기에 맞는 전략을 통해 일단 확보한 우세를 지속시킬 때만 맞볼 수 있는 열매다. 빌 게이츠도 그의 저서 ‘미래로 가는 길’에서 자신의 성공을 ‘바로 되먹임’과 수익체증의 법칙에 입각해 설명하고 있다.
브라이언 박사는 수익체증의 세계에 대한 직관적 안목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정보관련 산업 종사자들에게 다음의 네가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볼 것을 권한다. 첫째, 내가 속한 시장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가. 둘째, 나는 어느 세계에 있는가. 셋째, 나는 어떤 재원을 가지고 있는가. 넷째, 다음 게임은 무엇인가.
이 질문을 우리 내부를 향해 던진다면 우리나라 벤처기업의 젊은 경영자와 정책을 입안하는 정부관리들은 어떤 답을 내놓을지 궁금하다. 혹시 요즘 온나라를 들뜨게 하고 있는 ‘미래 한국의 희망’ 벤처기업은 ‘바로 되먹임’이 발생하는 상품을 다루면서, 시장을 증폭시키기 위한 노력이 부족한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