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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딱했으면 빠트릴 뻔 했던 한국의 청동기사(史)를 대표하는 유물인 거푸집. 밀랍 돌 모래 등으로 정교하게 만들어 천태만상을 연출했다.

청동은 구리와 주석의 합금이다. 주석은 구리를 기구로 만들어 쓰려고 할때 그 경도(硬度)를 크게 하기 위해서 섞는다. 또 거기에 적은 양의 아연을 넣으면 용융했을 때의 유동성을 좋게 해 주조하기 쉽게 된다. 또 납은 주조한 뒤 표면의 마감처리를 하는 데 유용하다.

구리와 주석의 합금 비율과 경도의 관계를 보자. 주석이 10% 정도 섞여 있을 때 적황색을 띠고, 20%에서 적회색, 30%일 때 백색을 띠게 되는데 28%일 때 경도가 가장 커진다. 아연을 섞어 황동(黃銅)을 만들 때는 15~25%일 때 붉은 색을 띤 황금색이 되고 30~40%일 때 황금색을 띠게 된다. 그러므로 청동에 아연을 적절히 섞어주면 합금의 색깔과 유동성을 조절할 수 있다.

그런데 황동 또는 진유(眞鍮, brass)는 B.C.10세기 쯤에 소아시아 지방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그후 천천히 근동으로 퍼져서 기원전 5세기 경에 페르시아에 전해졌다고 기술사가(技術史家) 포비스(Forbes)는 말한다. 그리고 그 기술은 서방으로 퍼져 초기 로마시대에 이르러 처음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로마시대의 황동 유물은 17.3%의 아연을 함유한 B.C.20년의 주화(coin)이다. 그러나 페르시아에서 황동이 많이 생산된 시기가 A.D.6세기 이전으로 올라가지는 않는다. 그후 황동은 인도로 전해졌고 중국에는 약 2세기 뒤에 들어갔다. 포비스에 따르면 중국에선 8세기경부터 황동이 만들어지게 되었고, 그것도 페르시아나 인도에서 전해진 기술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노감석을 섞으면…

그러나 이런 서구 기술사가들의 일반적인 견해는 최근 그 타당성을 의심받고 있다. 영국의 니덤(Needham)과 일본의 야부우치(藪內), 이 두 연구그룹의 깊이 있는 연구로 잘못된 것임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그들에 따르면 황동은 4세기와 5세기의 중국 문헌에 나타나고 한(漢) 때의 유물 중에서도 분석된다는 것이다. 분석을 토대로 그들은 중국에 황동이 전해진 시기가 포비스가 생각하고 있는 때보다 훨씬 오래 전이라고 주장한다.

그 기술이 어쩌면 한국에서 전해졌을지도 모른다. 중국과 이어진 한국에서는 기원전 7세기경의 청동기시대 유적에서 아연-청동장신구가 출토되고 있다. 또 후기 청동기시대 유적인 황해도 봉산군(鳳山郡) 송산리(松山里)에서는 아연-청동 도끼와 거울이 발견되기도 했다.

특히 봉산군은 아연 광석인 노감석(爐甘石)의 산지로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되어 있는 곳이다. 어쩌면 그 지역에 살던 청동기 시대 기술자가 구리나 청동에 노감석을 섞으면 동합금의 질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아연은 9백7℃에서 끓어 증기로 달아난다. 때문에 1천℃까지 가열해야만 잘 용융되어 주물을 만들 수 있는 아연-청동합금은 만들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황동은 청동보다 더 귀하게 여겨졌다. 이 어려운 기술상의 문제를 한국의 청동기시대 기술자가 해결한 것이다.

그들이 어떤 방법으로 그 어려운 합금을 만들어 냈는지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다만 조선후기에 이규경(李圭景)이 쓴 박물학책에 기록된 내용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이규경은 항아리에 적동(赤銅) 6근마다 아연 4근을 넣고 함께 녹인 뒤에 완전히 냉각시켜 굳어졌을 때 꺼내면 가장 좋은 황동을 얻을 수 있다고 썼다. 또 그는 노감석을 쓰는 경우에는 구리 1근과 노감석 1근을 같은 방법으로 제련하면 황동 1.5근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아마도 이 방법은 청동기시대부터 계승되어온 황동을 만들던 전통적인 기술이었을 것이다.

17세기 중국의 유명한 기술서인 송응성(宋應星)의 '천공개물'(天工開物)에 적힌 황동의 합금제조방법도 이와 비슷하다. 그런데 여기서는 "후세에 이르러 이 방법이 다소 변했다. 노감석의 연기가 많이 날아가 버리기 때문에 다시 아연을 쓰기로 했다"고 말하고 있다. 또 도가니에 구리와 노감석을 차곡차곡 한켜씩 포개어 넣었을 때도 아연 증기가 많이 달아나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천공개물'에서는 또 아연은 구리에 넣어 지지 않으면 불에 들어가서 곧 연기가 되어 날아가 버린다고 쓰고 있다. 아연-구리합금을 만들기가 쉽지 않음을 은연중에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청동도끼와 청동낚시의 돌거푸집^B.C.4세기~ B.C.1세기, 전남 영얌 출토, 2.2x11.9x7.1cm(숭실대 박물관)


●-전 국토에서 28개가 발견돼

이 황동이 놋(鍮)으로 잘못 알려진 때가 있었다. 통일신라 때부터 그릇의 소재가 된 이래로, 고려와 조선시대에 이르는 동안 한국인의 전통적 식기로 오랫 동안 사랑을 받아온 놋그릇은 구리와 주석을 75 대(対) 25 또는 80 대 20의 비율로 섞은 청동합금인 향동(響銅), 바로 그것이다. 조선시대 문헌에 나오는 유(鍮) 또는 유철(鍮鉄)은 놋 또는 놋쇠의 한자이고 유기(鍮器)는 놋그릇의 한자어인 것이다.

땅 속에 묻혀있던 유물의 발굴은 역사를 바로 쓰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일본 학자들은 해방 전에 "한국에는 청동기시대가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1945년 이후 한반도에서는 여기 저기서 청동기시대의 유적들이 발견되었고 많은 청동기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해방된 한국에서 한국인 학자들에 의해서 한국 청동기시대의 존재가 입증된 것이다. 참으로 놀랍고 감동적인 역사의 전개가 아닐 수 없다. 더욱이 한국기술사(史)를 통해 볼 때 새로운 혁신적 기술의 등장이라는 점에서도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거푸집의 발견으로 확실해졌다. 처음에는 북한지방에서 발굴되다가, 나중에는 남한지방에서도 출토된 것이다. 이같은 분포는 청동기의 주조가 한반도의 전영역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거푸집은 지금까지 28개가 발견되었는데, 청동칼 청동도끼 청동창 청동끌 화살촉 낚시 단추 등 아주 다양한 것들이다.

부여(扶余)의 송국리(松菊里) 유적에서도 청동도끼의 거푸집이 출토되었다. 그런데 그 지방은 B.C.8~9세기 경 유물로 알려진 비파형 청동검이 나온 곳이고, 확실한 주거지(住居地)였다는 점에서 우리의 주목을 끈다. 청동기인들이 그 시기에 그곳에 살면서 청동기를 거푸집으로 부어 만들어 쓰고 있었다는 것을 확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화학적 금속학적 조사를 통해

청동기를 만드는 데는 두 가지 중요한 기술이 따라야 한다. 하나는 합금을 만드는 데 필요한 정련기술(精鍊技術)이고, 다른 하나는 청동을 부어 내는 주조기술이다.

청동합금을 만드는 기술은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즉 동광석(銅鉱石)과 주석광석(朱錫鉱石)을 한데 넣고 그대로 용융하는 방법이 있고, 구리와 주석 등의 금속을 따로 정련하여 적당한 비율로 섞어서 용융하는 방법이 있다. 물론 후자의 경우가 앞선 기술이고 우수한 청동제품이 만들어진다.

중국에서는 B.C.15세기무렵 은(殷)나라 때 이미 이러한 앞선 기술이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그곳에서 나온 여러 발굴품 중에서 특히 금속을 정련할 때 쓰던 도제(陶製) 도가니와 구리로 만든 커다란 용재(熔滓) 덩어리들이 그 기술의 수준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아직 그러한 것들이 발굴돼 나온 일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청동기의 화학적 분석과 금속학적 조사를 바탕으로 그 기술의 수준을 짐작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한국형 청동검의 분석치를 보면 당시의 수준을 어림잡을 수 있다. 구리 주석 납을 75 대 15 대 10의 평균비로 섞어 칼을 만들었는데 그 함량비가 매우 고르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또 기원전 2세기 경의 한 청동기의 합금조직을 현미경으로 조사한 결과, 그 합금성분 금속들의 결정입자(粒子)가 아주 정연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것도 그 주조기술이 우수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1969년에 이 한국청동을 분석한 미국의 한 금속연구실에서는 그 합금기술의 우수성에 놀라 "고대 한국인의 청동기술에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고 필자에게 장거리 전화로 알려줄 정도였다.

몇가지 한국형 청동검의 화학분석 결과를 보면 다음과 같다.
 

청동검의 화학분석결과 표


●-예술 감각까지 가미해

주조기술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거푸집이다. 주형(鑄型) 또는 용범(鎔范)이라고도 불려 오던 거푸집은 청동기의 주조물을 만들어내는 데 결정적인 기술이기 때문이다. 어떤 거푸집으로 어떻게 청동기를 부어 내느냐에 따라서 그 제품의 정밀함과 아름다움이 판가름났던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돌이나 진흙에 만드려는 모양을 새겨서 그것을 바로 거푸집으로 썼다. 그리고 그런 틀을 두 개 맞붙여서 녹인 청동을 부어 넣는 방법을 쓰면 어떤 형태라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것이 이른바 직접법이다. 이런 거푸집으로도 만들지 못하는 청동기가 거의 없었다. 모양이 간단한 무기류는 물론이고, 매우 정교하고 형태와 무늬가 복잡한 청동기까지도 만들 수 있었다.

기술자들은 보다 섬세하고 예술적 감각이 뛰어난 주조물을 만들기 위해 더 좋은 거푸집을 개발해 냈다. 그것이 납형(蠟型)이라고 부르는 밀랍 거푸집이다. 밀랍 거푸집은 꿀찌끼로 만든 밀랍에 송진을 녹여 섞은 것으로 방법은 간단하다. 일단 표면에 문양을 새겨서 원형(原型)을 만들고, 그 위에 곱게 빻은 주형토(鑄型土) 가루를 뿌린다. 이어 진흙물을 칠해 외형(外型)을 만들고 잘 말린 후에 불로 구워서 밀랍을 녹이면 완성된다.

여기에 청동의 용융액을 부어 넣으면 밀랍으로 만든 원형과 똑같은 청동기가 되는 것이다. 이 방법을 간접법이라고 부른다. 직접법보다는 훨씬 복잡하고 까다로운 과정을 거치지만 밀랍 위에 조각했기 때문에 떠낸 무의와 주조물의 표면이 아주 정교하고 매끄럽게 잘 빠져 나온다.

한국의 옛 청동기 제조기술자들은 이 방법들을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써 가면서 훌륭한 청동기를 만들어 냈다.

●-돌거푸집의 명인

거푸집 중에서 한국인은 돌거푸집을 잘 썼다. 이것도 중국의 경우와 다른 점이다. 중국에서는 거의 대부분 진흙 거푸집을 사용했다. 중국에서 수없이 발견된 거푸집 중에서 돌거푸집은 5개에 불과하다. 중국인이 진흙 거푸집으로 만든 청동기도 한국인은 돌거푸집을 써서 만들었다. 특히 활석제(滑石製) 거푸집은 아주 훌륭하다. 한국인은 주조물 표면의 질이 뛰어나고 수명이 반영구적이라는 점에서 가장 우수한 거푸집으로 평가되는 활석 거푸집을 개발해 낸 것이다. 이것은 그 의식에 있어서 오늘날의 금속 거푸집(金型)에 매우 가깝다. 또 현대 주물생산 공장에서도 주물표면의 질을 높이기 위해 거푸집에 활석가루를 뿌리고 있다. 이 사실은 한국청동기시대의 높은 금속주조 기술 수준을 엿보게 한다.

한국인은 또 모래 거푸집(砂型)을 개발했다. 모래 거푸집에 의한 청동기의 주조는 13세기 초에 고려에서 청동활자를 부어 만들었다는 사실에서 명백해진다. 그에 관한 기술상의 기록이 15세기의 조선학자 성현(成見)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적혀 있다. 그의 설명은 모래 거푸집에 대한 가장 오래되고 정확한 기사로 주목된다.

중국에서는 기술서인 '천공개물'에 동전을 주조하는 데 모래 거푸집을 쓴다는 기록이 있다. 모래 거푸집은 서양에서도 14~15세기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에 대한 첫 기술은 비린구치오(Biringuccio)의 '피로테크니카'(Pirotechnica, 1540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보다 훨씬 이전에 사용되었다는 증거는 아직 없다.

한국인은 그 모래 거푸집을 12세기 이전에 개발했고, 그 기술은 조선시대의 청동활자 인쇄술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성현이 소개한 모래 거푸집에 의한 청동활자의 주조기술은 그 시기에 금속활자와 같은 작은 주조물을 만드는 데 가장 앞선 기술이었다.

서유럽에서 초기 인쇄에 사용된 활자가 모래 속에서 부어 만들어졌다는 명백한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사실은 한국 청동활자의 주조법과 공통된다는 점에서 유의할 만하다. 청동활자를 주조해내는 모래 거푸집의 개발은 인쇄술의 혁신을 가져온 기술의 바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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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 전사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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