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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같은 컴퓨터 HAL의 탄생기념축제

코그와 사이크의 경쟁

사람을 능가하는 능력을 지닌 '사람 같은' 컴퓨터는 과연 가능할까. 30년 전 제작돼 아직도 'SF의 신화'로 추앙받는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등장한 인공지능 컴퓨터 HAL9000의 생일을 맞아 전셰 컴퓨터과학계가 떠들석하다.

HAL 9000. SF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고전으로 꼽히는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등장하는 컴퓨터의 이름이다. 사람을 물리치고 당당히 ‘주인공’을 맡은 이 컴퓨터는 생각하고, 말하고, 보고, 느끼고, 심지어 감정을 표시하는 등 완벽한 인공지능을 갖춘 것으로 묘사됐다.

1968년 영화 속에서 제작된 이 컴퓨터 한대 때문에 세상이 시끌벅적하다. 내로라하는 컴퓨터공학자들이 이 컴퓨터를 기리기 위한 모임을 가졌고, 인터넷에서는 영화가 만들어질 당시에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사이버 파티’가 벌어졌다. 또 ‘인포메이션 위크’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뉴스위크’ 등과 함께, 특히 사이버 컬처를 대표하는 잡지 ‘와이어드’ 1월호에서는 이 상상 속의 기계를 다루는데 상당한 페이지를 할애했다.

외눈박이의 모습을 한 HAL 9000(이하 할)은 영화에서 “나는 1997년 1월 12일 일리노이주 어바나에서 태어났습니다” 라고 말하는데, 이번 축제는 바로 30년 전에 언급된 그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할에게 바치는 헌정 논문도 나왔다. 리코 캘리포니아 연구센터 소장 데이빗 스톨크의 발의로 제작된 논문집인 ‘할의 유산: 꿈과 현실로서의 2001년 컴퓨터’가 바로 그것. 인공지능의 대부인 MIT 미디어연구소 마빈 민스키박사 인터뷰를 비롯해 저명한 인공지능 연구자와 철학자, 수학자 등이 쓴 16편의 논문이 수록된 이 책에는 할의 ‘아버지’격인 아서 클라크가 서문을 썼다.

‘지옥’을 뜻하는 영어 단어 ‘HELL’과 유사한 이 컴퓨터의 이름은 설계를 담당했던 IBM의 알파벳을 하나씩 앞으로 옮긴 것. 시나리오 단계에서는 원래 할 대신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지혜와 예술의 여신인 ‘아테네’가 붙여졌다고 한다.

과학자에게 영감을 준 영화

할은 어떤 컴퓨터인가.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먼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이하 2001)가 어떤 영화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순서일 듯 하다. 현존하는 최고의 SF작가이자 미래학자인 아서 클라크의 작품을 토대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만든 이 영화는 상상력이 테크놀러지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증명한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1917년 영국에서 태어나 현재 스리랑카에서 살고 있는 아서 클라크는 단순한 SF작가 이상의 인물. 그는 지금까지 70여권의 저서 외에도 5백여편이 넘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특히 정지궤도를 도는 통신위성은 수학적 분석에 기초한 그의 고안물이기도 하다.

일생을 통해 과학이 인류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한계를 넓히는데 온 정열을 쏟아부은 클라크의 가장 큰 관심사는 우주와 통신이다. 2001 역시 이를 반영하듯 과학기술의 집약처라 할 수 있는 우주선 안에 무대를 설치했다.

요즘의 SF영화와 달리 컴퓨터 그래픽을 사용하지 않고도, 작가와 감독은 SF가 갖출 수 있는 모든 요소를 영화에 녹여 넣었다. 또한 수백권의 책보다 더 함축적으로 미래론을 전개한 터라 이 영화는 적지 않은 과학자들에게 새로운 연구 테마를 제공했다.

헌정 논문의 책임 편집자 스톨크 박사는 “SF 영화를 비웃는 많은 과학자들은 이 영화가 가진 과학적 세밀성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할 정도. 스톨크 박사는 그 자신 영화로부터 영감을 받아 사람의 입술을 읽는 컴퓨터를 연구해왔다.

클라크와 큐브릭은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NASA와 컴퓨터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대본작업에만 2천4백시간을 매달렸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 때문에 이 영화에는 다른 SF물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과학적 오류가 발견되지 않는다. 이를 테면 우주를 항진하는 동안 ‘쉭-’ 하는 효과음을 사용하는 다른 SF물과 달리 이 영화에는 우주선이 달리는 장면에서도 소음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우주공간에서는 매질이 없기 때문에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이 정상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통신 기구를 비롯한 다양한 미래 물건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 이들은 30년이 지난 요즘의 시각으로 봐도 진부하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데,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바로 이 영화에 등장하는 각종 소품들은 당대 최첨단을 자랑하던 기업들이 제공했던 것이다. 우주왕복선의 컴퓨터 디스플레이는 RCA, 우주만년필은 파커, 기내식은 제너럴 푸드, 우주복은 듀폰, 컴퓨터는 IBM 등이 디자인해 영화 제작을 도왔다.

컴퓨터에 살해당한 승무원들

1997년에 태어난 할은 4년간 수많은 부가 교육을 받은 뒤 5명의 승무원과 함께 우주선 디스커버리에 탑승해 목성으로 향한다. 할의 역할은 우주선의 관제와 함께 승무원을 보호해 이들이 비밀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돕는 것.

할은 이 영화에서 시종 중심에 놓여 있다. 영화에서 가장 대사가 많은 것도 할이다. 할과 승무원은 체스를 두거나, 승무원이 그린 스케치에 관심을 표한다. 미국의 아동용 프로그램인 ‘세서미 스트리트’에서는 컴퓨터를 ‘그’라든지 ‘그녀’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이와 비교해 보면 의미없는 인식번호를 이름으로 갖고 있을 뿐인 할은 영화를 통해 당당하게 인간으로 취급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 할을 다룬 영문 서적을 살펴보면 종종 ‘HE’라는 단어를 사용해 할을 호칭하는데, 이는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자신감에 찬 HAL은 자신의 임무 범위를 벗어나기 시작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극적인 부분은 급기야 할의 작동 스위치를 끄려는 승무원들의 대화를 입술을 읽어 알아듣고 오히려 승무원들을 위험에 빠지게 하는 장면이다. 위대한 기계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로봇의 원칙’에 반하는 ‘정신착란’을 일으킨 것이다.

“문을 열어 할!”

“미안합니다 데이브. 나는 그럴 수 없을 것 같군요.”

외부의 고장을 점검하러 바깥으로 나간 대장이 다시 우주선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장면에서의 할과 우주선 승무원의 대화는, 인류가 생각하는 컴퓨터를 개발한다면 이에 의해 지배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또하나의 화두로 제기한다.

과연 컴퓨터 기술은 어디까지 발전할 것이며, 이에 따른 미래형 컴퓨터는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 또 영화에서 제시됐던 할은 실현 가능한 모델인가. 영화가 발표된 후 할은 적잖은 컴퓨터 전문가들의 화젯거리였다.

그러나 영화와 달리 그의 생일이 지난 지금 당장 어디에서도 할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 현실. 비록 수많은 학자들에 의해 말을 하고 알아듣는 컴퓨터, 생각하는 컴퓨터 등 인공지능을 구성하는 각 분야가 연구되고 있긴 하지만, 아직도 최종 목표인 ‘사람처럼 생각하는 기계’는 먼 꿈일 뿐이다.

과학평론가 이인식씨는 다음과 같이 인공지능 연구의 역사적 과정을 설명한다.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인공지능 연구는 20여년의 시행착오 끝에 ‘프로그램의 문제 해결 능력은 지식의 양에 좌우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에 의해 태어난 것이 전문가 시스템이다.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가진 경험을 일정한 형식으로 프로그램에 입력함으로써 기계에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80년대를 풍미한 이 연구 역시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전문지식은 컴퓨터로 기계화 하기 쉬운 반면,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확인됐을 따름이다.”

“오늘날 기계는 특별한 분야에서 매우 영리함을 발휘한다. 그러나 기계는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는 부분에선 ‘젬병’이다. 이는 위대한 역설이다”라고 말한 민스키 박사의 견해 역시 벽에 막힌 인공지능 연구의 현실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두 승무원의 대화를 입술로 읽어 알아낸 할은 도리어 이들을 곤궁에 빠뜨린다.


2001년 상식 갖춘 컴퓨터 가능?

연구자들은 인공지능 연구가 향후 10-15년 내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것임에는 틀림 없지만, 이 경우에도 할의 수준에 오를 것으로 기대하지 않고 있다. 기계가 사람처럼 사고하기 위해서는 인간 뇌를 시뮬레이션해야 하는데, 아직도 뇌는 블랙박스로 치부될 정도로 연구가 미약하다는 것이 비관론의 결정적인 근거다.(인공지능과 관련된 가장 최근의 과학동아 기사는 95년 5월호 ‘과학대논쟁’에 실려 있음).

하지만 모두가 이같은 견해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 할에 가장 가깝게 근접한 컴퓨터로 꼽히는 ‘사이크’(CYC ,encyclopedia, 즉‘ 백과사전’의 의미)의 제작자인 전 스탠포드 대학 교수 더글라스 레너트 박사에게 할을 구현하는 것은 포기할 수 없는 일이다.

그의 연구팀은 사이크에게 ‘아버지는 아들보다 늙었다’ ‘밥을 먹으면 배부르다’ 등과 같은 일상적인 ‘상식’을 13년 동안 매일매일 채워넣으며 ‘상식을 갖춘 전문가 시스템’을 ‘키우고’ 있다. 만약 이 일이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2001년경 사이크의 데이터베이스는 일반적인 지식을 갖춘 성인의 뇌에 다다를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상식에 기초해 정보를 수집하고 스스로 추론할 수 있는 단계까지 이르게 한다는 것이 최종 목표.

한편 MIT의 로드니 부룩스 교수는 인공생명의 접근 방법을 통해 곤충 모양의 로봇 ‘코그’(COG, cognition, 즉 ‘인지’의 의미)를 만들어 또다른 할의 제작에 몰두하고 있다(인공생명에 관한 가장 최근의 과학동아 기사는 96년 6월호 참조). 인공생명의 핵심 개념이라 할 수 있는 ‘창발성’에 기초한 이 로봇은, 곤충처럼 반사적인 행동을 통해 스스로 학습하고 환경 변화에 적응하는 능력을 키울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이인식씨는 서로 다른 접근방법을 통해 할에 도달하려는 사이크와 코그의 경쟁을, 세계 최초로 남극을 답파하기 위해 경쟁한 아문젠과 스코트의 대결에 비유하고 있다.

3001년의 지구 모습

인공지능의 구현에 회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학자들은 혹 1세기 내에 할과 같은 컴퓨터가 등장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정도는 인정한다. 하지만 이들은 이른바 ‘강인공지능론자’들에게 “기계가 사람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날 필요가 있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에 먼저 답할 것을 요구한다.

이번에 발표된 헌정 논문집에서 할의 언어 구사에 대한 글을 쓴 로저 생크는 “우리는 아마도 결국엔 할을 만들 수 없을지도 모르며, 또한 만들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컴퓨터가 사랑에 빠지고, 맛있는 것을 챙겨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우리에겐 얼마든지 있다”라고 말했다.

이에 관해서는 아서 클라크 역시 동감하고 있다. 시대를 앞서 사는 그는 1천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최근 2001의 완결판이라 할 수 있는 ‘3001 최후의 오디세이’를 발표했다. 2001에서 컴퓨터에 의해 살해된 승무원이 주인공으로 설정된 이 SF에서 클라크는 생각하는 컴퓨터가 도처에 널려 있으며, 가상현실이 지배하는 미래 지구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가상현실은 실제의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일이 돼가고 있다. 나는 미래를 막고 싶다”고 밝혔다.

영화에는 우리의 먼 조상이 뼈를 하늘로 집어던지자 우주선으로 변하는 장면이 나온다. 우주선, 컴퓨터, 통신기기…. 인류의 진보가 과학과 도구의 발전에 힘입었음은 이론의 여지 없는 사실이지만, 사람과 체스를 두는 똑똑한 기계를 만들려는 우리의 교만이 결국 스스로 놓은 덫에 걸리는 도그마에 빠질 염려는 없을까. 과연 도구란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지 곰곰히 생각해볼 문제다.
 

인공생명의 접근 방법을 통해 할과 같은 컴퓨터에 접근하고 있는 브룩스 교수와 그의 작품 코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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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 이강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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