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6월 8일 안양고등학교에서는 과학탐구 토론대회가 열렸다. 학년마다 각각 다른 주제가 주어졌는데 2학년은 공룡 멸종원인에 관한 것이었다.
아직 공룡 멸종원인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학계에서 광범위하게 지지받고 있는 이론도 없고, 얼마되지 않는 근거로 생각해낸 설이나 전혀 근거조차 없는 가정도 많다. 공룡 멸종원인설은 그것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수만큼이나 많다는 것을 우리는 자료를 조사하면서 체험할 수 있었다. 또 각 설들에 대해 토론할 때마다 쏟아져 나오는 문제점들은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학자들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점들을 풀기 위해 우리는 여러 설을 종합해 보기도 하고 서로 머리를 맞대고 새로운 생각을 짜내기도 했다.
대회에는 9개 팀이 참가했다. 우리는 우리의 주장을 설득시키기 위해서 괘도는 물론이고, OHP나 VTR을 사용했다.
발표: 독창적인 서식지 분할설
약 1억5천만년 동안 장대한 파노라마를 이루다 사라진 공룡들의 멸종에 대해 우리 팀의 견해를 밝히기 앞서 우선 몇가지를 전제한다. 첫째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따르면 공룡은 ‘중생대 육상에 살던 대형 파충류 무리’라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수장룡, 어룡, 익룡 등의 멸종은 토의 대상에서 제외했다. 또 멸종원인을 단 하나의 학설이나 사건으로 보지 않고 여러가지 사건이 복합돼 일어나는 상승효과로 보았다.
백악기의 조산운동
백악기는 트라이아스기나 쥐라기에 비해 지각변동이 많이 일어났다. 지각변동은 대륙이동과 조산운동으로 나뉜다. 이들 지구활동은 태양광선의 입사각 변화와 지형의 기복을 나타나게 해서 온난하기만 하던 지구환경을 4계절의 환경으로 바꾸어갔다. 이런 양상은 백악기 전반을 통해 나타나며 지금과 비슷한 기후대가 형성될 정도까지 발전했다. 당시 일어나던 조산운동의 예로는 레라미드, 네바다, 연산, 대보 조산운동과 환태평양 조산대 활동이 있다.
강하다고 반드시 유리하지 않다
서식지 분할은 우리가 창안한 개념이다. 소행성 충돌과 화산 폭발로 인한 혹한의 기후에도 불구하고 악어, 거북 등의 파충류가 살아남았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지각변동으로 기후는 생물이 살기에 적합한 환경(온난한 기후)과 불리한 환경(겨울을 포함한 4계절이 있는 기후)으로 나뉘게 된다. 동시에 살기에 불리한 환경은 백악기 초부터 백악기 말까지 점점 늘어난다.
그래서 모든 지역을 생물이 살기에 적합한 환경과 불리한 환경으로 양분할 수 있다고 가정했다. 불리한 환경이 자꾸 늘어나면 아무데나 흩어져 살던 생물들은 서로 살기에 유리한 환경을 차지하기 위한 생존 경쟁을 벌인다. 이때의 생존 경쟁에서 최강자는 당연 공룡일 것이다.
그래서 백악기 초, 중반에는 악어, 거북 등의 파충류가 불리한 환경으로 내몰리게 된다. 그리고 백악기 말로 가면 더욱 더 살기에 유리한 환경이 줄어들므로 공룡 내에서도 생존 경쟁이 심해진다. 생존경쟁에서 진 공룡의 숫자는 백악기 말로 가면 갈수록 는다.
도태된 공룡은 식량문제로 바로 죽게 되는데, 이것으로 백악기 초부터 일어나는 꾸준한 공룡 개체수의 감소를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백악기 동안 살기에 불리한 환경에 놓여있던 악어, 거북 등의 파충류는 그 환경에 적응해 나간다. 그리고 도태되지 않은 공룡은 계속 살기에 유리한 환경에 놓이게 된다.
소행성 충돌과 화산 폭발
백악기 말에 소행성의 충돌로 생긴 많은 양의 미립자들이 대류권 상층부를 덮는다. 이 미립자들은 지구 전역에 퍼져 햇빛을 차단하므로 혹한의 기후를 만들어낸다. 이런 효과를 낸 소행성으로 가장 유력시되고 있는 것은 멕시코 유카탄반도의 지름 1백80km의 크레이터를 남긴 운석 충돌이다.
또한 백악기 말에는 대형 화산이 분출하여 여러가지 미립자를 대류권까지 도달하게 한다. 이것 역시 태양광선을 가리므로 혹한를 만드는 효과를 준다. 또한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 떨어진 소행성은 지구 전역에 있는 화산에 영향을 끼쳐 활동을 더욱 가속화시켰을 것이다.
혹한은 약 6개월 동안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공룡은 온난한 기후에서만 적응해 왔기 때문에 혹독한 겨울을 견뎌내지 못하고 멸종의 길을 걷는다. 이에 비해 백악기 초부터 살기에 불리한 환경에 처해 있던 나머지 생물들은 비록 종의 숫자는 많이 감소했을지라도 적응할 수 있어 다음 세대의 번영을 준비할 수 있었다.
토론: 재진입이론으로 K/T지층 설명
사회자) 발표를 잘 들었다. 그럼 이에 대해 반론자의 반대 질문을 받아보자.
반론자) 공룡이 백악기 말에 소행성 충돌과 화산 폭발에 의한 혹한으로 인해 멸종했다고 하면 작은 온도 변화에도 민감한 육방산호류가 현재까지 생존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발표자) 육방산호류는 주로 테티스해 부근에서 생존했다. 그런데 그리 멀지 않은 인도에서는 대규모의 화산활동인 데칸 트랩이 있었다. 이 데칸 트랩의 용암은 바다로 흘러들어 수온을 높였을 거라고 짐작된다. 또한 높은 수온으로 인한 열 대류로 인해 비가 내려 대류권에 있던 먼지들이 제거됨으로써 태양광선도 받을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된다면 육방산호류의 생존조건인 태양빛과 수온이 갖추어진다.
반론자) 서식지 분할이 생겼다면 백악기의 공룡화석과 다른 파충류의 화석은 각기 다른 지역에서 섞이지 않고 따로 발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발표자) 살기에 유리한 환경과 불리한 환경은 고정돼 있는 거라고 설명하지 않았다. 살기에 불리한 환경은 시간이 갈수록 늘어났다고 본다.
반론자) 그럼 신생대 초기에 발견되는 몇 구의 공룡화석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발표자) K/T지층 위에서 공룡 화석이 발견된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겨우 두군데에 지나지 않았다. 잔존하던 공룡들이 그때까지 남아있던 것으로 보인다.
반론자) K/T지층은 전세계에 고르게 퍼져 있다. 이렇게 볼 때 유카탄 반도에 떨어진 소행성이 아무리 크다 해도 K/T지층을 고르게 형성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발표자) 그것은 최근에 발표된 재진입이론(경희대 김상준교수 제기)으로 설명할 수 있다. 충돌로 인한 파편은 반작용으로 다시 대류권 밖을 벗어났다가 떨어지게 됨으로써 연쇄충돌을 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재진입은 얼마 전에 있었던 슈메이커-레비 혜성의 목성 충돌에서도 관측됐다.
반론자) 목성은 지구 지각 성분과 아주 큰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반작용 효과도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목성에서 관측된 재진입 효과를 지구에 비교한다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발표자) 반작용 효과는 지구에서 훨씬 크므로 목성에서도 일어났다면 지구에서도 일어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본다.
사회자) 양팀의 반론과 답변을 이것으로 마치고 지금부터 평가해 보기로 하자. 우선 발표자는 가정을 세우고 이를 체계적으로 잘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반론자는 발표자로 하여금 시간제한으로 다 발표하지 못했던 내용을 다시 말할 수 있도록 배려한 점이 장점으로 평가된다. 이상으로 평가를 마치고 반론자와 발표자의 마무리 의견을 들어보자.
반론자) 반론 때 시간제한을 어긴 점에 대해서 양해해 주기 바란다. 그리고 발표자가 수장룡이나 익룡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은 것에 대해 아쉬움이 남는다.
발표자) 8분이라는 제한된 시간으로 인하여 충분한 내용을 설명하지 못했다. 저희 팀의 견해도 결정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지 못한 점은 인정한다. 끝으로 어떤 팀에서 혹한이 아닌 혹서화로 인해 공룡이 멸종했다고 했는데, 화석으로 보아 냉수동물이 그 당시에 서식 범위를 확장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분명 혹한으로 인한 수온저하를 증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혹서보다는 혹한이 맞다고 생각된다.
사회자) 이상으로 공룡멸종에 대한 1회전 경기를 모두 마친다.
과학탐구토론대회를 마치며
과학탐구토론대회는 우리들에게 과학에 대해 새로운 방법으로 접근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 대회를 준비하면서 나름대로의 가설도 세워보고, 한 주제에 대해 심층적으로 조사·학습할 수 있었다. 이것은 종래의 수동적인 학습방법과 다른 능동적인 학습이었다.
이번 대회를 준비한 학생들의 열의는 대단했다. 2주 전부터 관련 과학서적을 찾기 위해 일반 도서관은 물론이고 국회도서관, 대형서점 등을 돌아다녔다. 정보고속도로라고 불리는 인터넷과 국내외 과학지 등을 살펴보는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또한 각 팀은 의견을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5-10장 정도 되는 괘도를 준비했다.
하지만 처음으로 시도했던 대회인 만큼 여러가지 미숙한 점이 드러났다. 실제 토론에서 가장 중요한, 반론을 제기하고 이에 대해 응답을 하는 단계가 제한 시간 3분으로 아주 짧았다는 것과, 자기팀의 경기 때에는 열성을 보이던 참가자들이 다른 팀의 경기 때에는 불성실한 청취 태도를 보인 것 등이다. 이런 점은 추후에 꼭 개선해야 할 문제이다.
또 팀 구성원들 간의 토의도 부족했다. 서로 얘기는 많이 했지만 독창적인 생각들이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저 학자들의 학설에만 의존해 발표했던 점이 참여자에게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주제가 비슷한 팀들이 많아 흥미를 가지고 주의깊게 듣기에는 지루한 면이 있었다. 끝으로 이런 대회가 전국단위의 대규모 토론 대회로 열렸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