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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텔 단말기 먼지 쌓인 채 천덕꾸러기로 전락

한국통신 5년 동안 6백억원 투입

90년대 초부터 맹렬한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정보화를 위해 그동안 들어간 비용 얼마나 될까.

한 사회의 정보화가 얼마나 진행됐는지를 알기 위해서 고려해야 할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하드웨어 보급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인프라'가 갖추어진 정도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 사회의 전반적인 의식을 살피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후자에 비해 측정하기가 훨씬 쉽다. 개인과 기업이 PC를 비롯한 정보기기를 구입하고, 또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기 위해 지불한 비용을 살펴보면 얼추 그 정도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의식이란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니어서, 이를 수치로 나타낸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우리 사회는 지난 몇년간 급속하게 진행된 정보화에 힘입어 일반 국민의 정보화 인식도 상당한 수준으로 높아졌다. 단적으로 마치 컴퓨터와 인터넷을 모르면 세상살이가 곤란한 것처럼 여겨지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고, '컴맹'이니 '넷맹'이니 하는 신조어가 자연스레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요즘의 풍경이다.

그러나 이즈음에 한 번쯤 생각해볼 일이 있다. 과연 우리사회에 이른바 '정보화 마인드'가 얼마만큼 체계적이며 탄탄한 비전을 가지고 진행됐는지 말이다. 아쉽게도 잠정적인 결론은 아니올시다' 쪽이다. 이런 결론이 나올 수 있는 단초는 한국통신이 91년부터 벌여온 '하이텔 단말기 보급사업'의 사례가 제공하고 있다.
 

한국통신이 보급한 하이텔 단말기. 28만대가 보급됐다는데, 주변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XT만도 못한 단말기

한국통신은 지난 91년 7월부터 정보화 확산을 위한 방안의 하나로 PC통신 단말기 보급사업을 벌이고 있다. 2007년까지 한국통신이 3백만대, 민간부문에서 7백만대, 도합 1천만대의 단말기를 보급하겠다는 계획 아래 시작된 이 일은 프랑스의 '미니텔'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미니텔은 갈수록 커지는 미국과의 정보관련 산업 격차를 줄이기 위해 지난 80년 프랑스 텔레콤사에 의해 만들어진 비디오텍스 정보단말기. 81년 7월 파리 근교 벨리지에 시험용으로 2천5백회선이 설치된 이래 개통 10년만에 6백50만개의 터미널이 보급되는 등 대성공을 거두었다.

처음 하이텔 단말기 보급 사업 계획이 발표됐을 때 상당수 전문가들은 "단말기를 이용해 활용할 만한 이렇다 할 데이터베이스가 미비하고, 또 앞으로 훨씬 향상된 테크놀러지가 등장할 것이 뻔한 상태에서 이처럼 엄청난 대수의 단말기를 보급한다는 것은 무모하다" 는 평가를 내렸다. 비록 단말기 보급이 정보 마인드를 확산시켜 선진국에 비해 낙후된 우리의 데이터베이스 산업 전반을 끌어올리는 역할은 하겠지만, 낭비적인 요소가 적지 않다는 지적이었다.

물론 하이텔 단말기는 전화 가입자가 해당 전화국에 요청하면 '무상임대' 로 제공되기 때문에 컴퓨터 보급률이 낮은 당시의 상황에서 정보 마인드를 확산시킬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석달간의 총 사용 시간이 20분 이하면 전화국이 이를 강제로 회수하고, 사용자가 이를 분실했다면 전화설치 때 내는 예치금에서 사용기간 만큼을 계산해 감가상각한 후 변상해야 한다는 단서조항이 있었지만, 공짜는 역시 부담이 없는 법.

한국통신의 대대적인 '공세' 에 따라 91년 4만5천대, 92년도 2만5천대, 93년 7만대에 이어 94년 8만대, 95년 6만대의 하이텔 단말기가 제작·보급되면서 작년 말까지 국내에 깔린 하이텔 단말기의 총수는 28만대에 이르렀다.

보급 사업 초기의 우려는 불과 2년이 안돼 현실로 나타났다. 가정과 사업장의 PC 보급률이 높아지면서 하이텔 단말기는 구석에서 먼지가 뽀얗게 쌓이거나 '임대자' 조차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는 채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단말기는 지금까지 첫 등장 이후 모두 세 번의 업그레이드를 실시했다. 첫번째 모델 IA형은 1천2백bps 모뎀이었지만, 92년 11월에 나온 IB형은 데이터 압축전송기능을 갖춘 2천4백bps 모뎀으로 바뀌었다. 곧이어 93년 2월에는 파일을 편집하고 저장하며 파일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기능까지 추가한 IIA형을 내놓았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발표된 IIB형은 외관에서 자판크기를 노트북 수준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가장 최신형의 하이텔 단말기 기능은 요즘 그 흔적을 찾아보기 조차 어려운 XT에도 못미친다. 게다가 1천2백 bps 모뎀과 2천4백bps 모뎀이 시장에서 사라지고, '적어도' 14.4k bps 팩스 모뎀이 주종을 이루는 상황에서 하이텔 단말기가 속도에 민감한 통신인들로부터 외면받고 있는 이유는 자명할 수밖에 없다.

단말기 1대당 가격이 21만7천원이니, 단말기 구입을 위해 지금까지 한국통신이 지출한 예산은 총 6백11억원. 이 액수가 결국 우리나라의 정보 마인드를 심기 위해 지난 5년간 들어간 비용인 셈이다. 정보화 인식을 이만큼 키워놓는 과업을 한국통신이란 공기업이 혼자 도맡아 했다면 말이다. 이 때문에 지난 95년 한국통신에 대한 국정감사에서는 "단말기 보급 사업을 계속 추진하는 것은 납품업체를 위한 특혜가 아닌지"를 묻는 질문이 쏟아지기도 했다.

결국 한국통신측도 단말기 보급사업이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뒤늦게서야 깨달은 듯 지난 95년 6월 애초의 계획을 조정, 보급대수를 3백만대에서 50만대로 낮춰잡고 보급 사업도 내년 말까지만 벌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더 이상 추가 제작을 하지 않는 대신 통신 에뮬레이션 프로그램인 '하이콤'을 보급하면서, 단말기에 대한 새로운 요청이 있으면 자진 반납되거나 회수된 것을 다시 '재활용'할 계획이다.

이봉구 한국통신 단말기사업부장은 "PC와 단말기를 같은 반열에 놓고 이야기 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더구나 대도시가 아닌 산간벽지에서는 아직도 하이텔 단말기 수요가 있다"라며 "통신요금이 싸지고, 공공DB와 상업DB가 현재의 모습까지 이르게 될 수 있었던 데는 하이텔 단말기가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고 본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1996년 08월 과학동아 정보

  • 이강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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