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을 보면서 목소리를 나누는 '비디오전화'구상은 매우 오래 전부터 미래의 생활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기술이었다. 그러나 미래는 이미 현실로 다가왔다. 적지 않은 기업체들이 멀리 떨어진 지사와 본사를 통신망으로 연결해 화상회의를 실시 중이며, 그 활용도도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1. 시공간이 축소된다
지난 2월9일 오전 11시 경북 울릉군 을릉등기소에서는 이색적인 재판이 열렸다. 등기소 한쪽에 마련된 여섯평 남짓한 간이 법정에 김모씨 등 울릉도 주민 4명에 대한 민사조정과 즉결심판이 판사없이 진행됐던 것. 대신 이날 재판을 진행할 '가상법관' 이 대형화면 속에 나타났다. 법정 한가운데 법복을 입고 자리해야 할 판사 대신 52인치 대형화면이 놓여 있었다. 국내 최초로 열린 원격화상재판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신청인과 피고인은 제 얼굴이 잘 보이십니까."
같은 시간 경주지원3호법정에 입정한 김원종판사는 카메라 앞에서 울릉등기소에 있는 피고와 방청객들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김판사가 있는 곳은 울릉도에서 2백50km 가량 떨어진 경북 경주시. 이미 미국 등에서 사용되고 있는 최첨단 원격화상회의 시스템을 이용한 새로운 법정모습이 우리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이날 재판은 울릉도 주민 김모씨가 미지급된 돈을 돌려달라며 울릉도 소재 한 택시회사를 상대로 신청한 민사조정건. 판사와 신청인, 피신청인은 각자 앞에 놓인 화면을 통해 진술을 주고 받았다.
김판사의 요청에 따라 신청인 김씨의 위임을 받은 박모씨가 다른 신청인 6명의 위임장을 울릉등기소 직원에게 건넸다. 이 문서는 초당 한글 12만8천자를 전송하는 '데이터 뷰어' 를 통해 곧바로 송신됐다.
인터넷 통한 화상회의도 가능
우리나라에 원격화상회의 시스템이 처음 소개된 것은 88년 초 포항제철이 서울 사무소와 포항본사를 잇는 회의체널을 마련하며서부터, 당시 선보였던 원격화상회의 시스템은 대형 회의실과 회의실을 잇는 룸(room)형으로, 여러명이 동시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대규모 시설인 만큼 영상스크린을 비롯한 각종 관련장비 가격은 고가였다.
그러나 최근 등장하고 있는 화상회의 시스템은 일반 PC에서 사용할 수 있는 소형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가격대도 큰 폭으로 떨어졌다. 수천만원대에서 수십만원대로 낮아진 화상회의 시스템의 수요층 역시 넓어졌다. 특히 인터넷 등에 연결해 사용할 수 있는 화상회의 시스템이 등장, 새로운 가능성을 선보이고 있다.
미국의 화상방송전문업체 VDO네트사는 일반전화회선을 통해 인터넷상에서 화상전화를 할 수 있도록 한 'VDO폰' 을 개발, 눈길을 끌고 있다. 근착 외신에 따르면 VDO네트는 기존의 아날로그 전화선을 통해 인터넷에서 음성과 화상을 동시에 주고 받을수 있다. 1만4천4백bps급 모뎀에서 화상을 초당 8프레임만 전송하지만 컬러상태는 완벽하게 구현할 수 있도록 한 것이 특징.
VDO네트의 마케팅 이상인 토니 주카리노는 "우리의 목표는 인터넷을 통해 사람들이 더욱 편리하게 통신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이라며 "VDO네트가 바로 이러한 서비스를 가능하게 해 줄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VDO폰의 베타버전은 VDO네트의 사이트(http://www.vdolive.com)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미국 소프트웨어업체인 올레어사는 최근 회사 직원들이 멀티미디어 정보검색 시스템인 월드와이드 웹에서 공동으로 일을 하거나 통신을 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인 '올레어 포럼' 을 출시했다. 이 제품은 기업이 웹에 많은 토론 그룹을 설치해 직원들이 회의를 하거나 동시에 업무를 처리할 수 있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이밖에도 인텔은 최대 24명이 데스크톱 PC를 통해 화상회의에 참여할 수 있는 비디오, 오디오 및 데이터화상회의의 시스템 '프로셰어 비디오 시스템 200' 을 발표했다. 또 POS(판매시점정보관리) 단말기와 PC 등 단품판매에 주력해 왔던 한국IPC도 자사의 서버를 중심으로 주문형 화상회의 시스템 등 솔루션 제공사업에 나선다고 밝혔다.
이처럼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인터젯 화상회의 시스템은 저렴한 가격대로 폭넓은 이용자와 화상전화를 할 수 있는 장점 등 다양한 기능을 갖고 있다. 가산전자 역시 올 초 미국 PCI사의 신호변화장치인 코덱(CO-DEC)소프트웨어를 공급한데 이어, 최근 일본 도시바의 PC용 화상회의 시스템의 CCD카메라의 국내 독점계약을 받았다.
교통대체 효과, 환경보호에도 일조
화상회의 시스템은 상대방 얼굴을 보면서 데이터와 메모를 교환할 수 있는 것은 물론, 대화중 인터넷 채팅도 가능하다. 또 원하지 않는 제3자가 대화중에 끼어들 수 없도록 보안장치를 설정했으며, 여러명이 동시에 전화할 수 있도록 한 것도 기존 전화와 다른 점이다. 무엇보다 국내 전화요금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인터넷 화상 전화로의 전용 가능성은 기존 통신사업자들에게 상당히 위협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화상회의 시스템의 등장이 갖는 의미는 예상 외로 크다. 시간과 거리라는 물리적인 한계를 극복해 교통대체의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전자통신연구소가 지난해 발표한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화상회의 시스템 운영은 회의의 효율성은 물론, 출장으로 인한 시간과 경비의 대폭적인 절감효과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포항제철의 사례를 중심으로 실시된 조사에서 화상회의 시스템은 긴급한 업무에 대해 즉시 회의소집이 가능해 신속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데다가, 컴퓨터 데이터, 슬라이드, 사진 등 다양한 회의 지원 자료를 서로 다른 지역에서도 직접 영상을 통해 볼 수 있는 등 장점이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포항에 본사를 둔 포항제철은 판매담당부서가 서울에 있어 지역간 업무협의가 빈번하다. 이때 화상회의는 직원들의 출장에 따른 번거로움을 해소하고 각 지역간 정보교류에도 크게 도움을 줬다. 화상회의 비용과 일반 교통수단(항공교통)을 이용한 통행비를 비교한 자료는 매우 흥미롭다. 월평균 회의수가 8회, 참여인원이 20명일 경우는 화상회의 운영비가 적자를 기록했지만, 월 8회 회의에 25명 이상이 참여했을 때는 교통비를 3천만원 정도 절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 포항제철에서 실시된 화상회의는 94년에 월 평균 21.6회, 참석인원은 월평균 1백명으로 집계됐다. 단순 평가만으로도 포항제철의 경우는 화상회의 시스템을 도입한 이후 상당한 교통비용을 절감한 것으로 나타났다. 참고로 포항제철이 화상회의 시스템을 도입할 당시, 각 지역별 시설규모와 비용은 (표)와 같이 나타났다.
외국의 경우 화상회의 시스템 가동에 대한 연구를 환경문제와 관련애 해석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지난 93년 미국의 에너지부와 운송부는 공동으로 원격근무가 환경에 미치는 직.간접적 영향을 분석하는 연구를 진행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화상회의 시스템 등을 이용한 원격근무는 교통의 이용을 감소시켜 교통체증 완화와 원활한 소통을 가져와 연료소비량과 매연 배출량을 절감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원격근무로 인해 가져온 직접적인 효과로는 주행거리가 짧아져 연료가 절약됐고, 오염물질 배출량도 크게 줄어들었다. 구체적으로 원격근무제 도입으로 92년 한해동안 총 2천30억달러의 연료 소비량이 줄어들었으며, 근로자 1인당 연간 1백56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이같은 원격근무가 늘어난다고 가정할 경우 미국에서 2010년까지 4천6백20-7천2백50km의 고속도로와 7천40-10만8백km의 간선도로를 정비하는데 드는 비용(누계) 1백30억-2백억달러를 절감할 수 있는 것으로 예상됐다.
교통정체가 완화되면 평균 주행속도는 올라가고, 교통정체에 의한 대기시간이 감소할 것이다. 이에 따라 비록 속도 측면에서는 조금 밖에 개선되지 않지만, 지체시간 단축은 현저하게 나타나 각 도시에서 대기시간은 3-5% 정도 개선될 것으로 추정됐다. 이를 종합할 경우 2010년경 정체완화에 의해 단축된 지체시간은 연간1억4천에서2억시간에 이를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원격근무가 도시의 교통정체를 해소하는 완전한 해결책은 아니다. 하지만 교통량의 확대를 상당히 억제할 수 있는 효과를 가져온다는 점은 우리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원격근무가 연평균 3-7%정도 증가하는 신규 교통량을 수용하는 경제효과를 창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욱이 인터넷화상회의 같은 지구 규모의 원격회의 시스템이 보편적으로 활용된다면 귀중한 시간을 비행기에서 허비하지 않을 수 있을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원격 이사회 결정 무효?
앞으로 화상회의 시스템이 본격 개화기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될 몇가지 문제점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경제성이나 기술적 한계 등과 같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테크놀러지에 대한 제도적 수용의 문제다. 최근 일본 미쓰비시전기는 이같은 화상회의의 법적인 문제로 고민중이다. 임원들이 회의장에 직접 참석하지 않고 화상회의를 통해 결정한 이사회의 결론이 법적으로 효력을 갖는지에 대해 법률전문가에게 자문한 결과 '상법상 문제의 소지가 있다'는 답변을 얻은것.
전세계 주요도시에 지사 및 법인을 보유한 미쓰비시에게 화상회의 시스템을 이용한 원격회의는 대단히 효율적인 제도다. 해외출장중인 임원들을 도쿄 본사로 불러들이지 않고 이사회를 열 수 있다면 경제적 이득 이상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상법관례상 이사회 의결을 위해 임원 과반수가 출석해야 한다. 하지만 화상이나 전화를 통한 회의참석을 '출석' 으로 볼 수 있느냐에 대한 법률가들은 '자신없다'고 밝힌 것이다. 만약 화상회의에서 확정된 결정에 대해 주주들이 '과반수 요건 미비'를 이유로 무효확인소송이라도 낸다며 회사측은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다.
이에 반해 화상회의 시스템 이용의 역사가 비교적 오래인 미국에서는 "전화를 통한 이사회 참여도 출석으로 본다"는 조항이 회사법에 명문화돼 있는 경우가 많다. 첨단기술로 인한 파급효과를 현실적으로 수용한 미국식 정책인 셈이다.
우리나라는 일본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화상회의나 전화통화가 법적으로 효력을 갖는다는 법조항이 없다. 따라서 이같은 첨단시스템을 이용한 사회변화가 제도수용의 과정을 거쳐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논의의 중요성은 최근 도입되고 있는 화상회의 시스템을 이용한 대학교육이나 전문교육과정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가능성도 있다. 현재 국내 일부 기업에서 MBA과정 등을 대학과 연계해 사내 직원들을 대상으로 강의하고 있지만, 기존 학제상으로는 연결되지 않고, 사내 대학과 같은 재교육 차원에서만 인정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