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기면 낳는다'는 식보다는 '적게 낳아 알차게 키운다'는 방향으로 가족계획이 이뤄지고 있는 추세다. 원치않는 임신을 피하는 방법으로 효과가 높은 경구피임제에 대해 알아보자.
약은 병 때문에 비정상이 된 인체기능을 정상으로 돌려주는 물질이다. 그런데 정상적인 생식기능을 의도적으로 차단하는 경구피임제(먹는 피임약)는 약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보통 약과는 다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인해 40년 전 경구피임제가 처음 세상에 등장했을 때 종교적 반대에 부딪쳤다. 또 피임제가 가져올 도덕적 타락을 염려해 피임제 개발을 반대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현재 경구피임제는 전세계적으로 5천만 이상의 여성들이 사용하고 있으며 여성의 권리신장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성호르몬 분리에서 시작
피임제를 알기 전에 먼저 성호르몬과 임신이 되는 과정부터 알아보자. 성호르몬은 크게 남성호르몬과 여성호르몬으로 나눈다. 남성호르몬은 남성을 남성답게 하는 것이며 이에 속한 모든 호르몬을 통칭해 안드로겐이라고 한다. 여성호르몬은 두종류가 있는데 여성을 여성답게 하는 에스트로겐(여포 호르몬)과 임신을 유지시키는 프로게스틴이다. 천연 안드로겐이나 에스트로겐은 각각 종류가 몇가지 있으나 천연 프로게스틴은 프로게스테론(황체 호르몬) 한가지뿐이다.
여성의 난소 기능은 뇌하수체 전엽에서 분비되는 여포 자극 호르몬(FSH)과 황체 형성 호르몬(LH)에 의해 조절된다. 월경주기가 시작되면 FSH에 의해 미성숙 난자를 함유한 난포가 성숙한다. 이 때 난포가 성숙하며 에스트로겐을 분비해 자궁내막을 두껍게 한다. 배란 3일 전쯤 에스트로겐과 LH의 농도가 갑자기 증가하게 돼 한개의 성숙난포가 깨지면서 난자가 방출되는 배란이 일어난다. 배란 후 깨진 난포는 황체가 돼 프로게스테론과 소량의 에스트로겐을 생산해낸다. 이들 호르몬은 LH와 FSH의 분비를 되먹임(feedback) 억제한다.
만일 임신되지 않으면 황체는 퇴화되고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의 농도는 급격히 떨어진다. 이 때 월경이 시작되며 또한 시상하부의 조절기능이 작동해 FSH, LH가 분비돼 다시 배란과정을 밟게된다. 그러나 임신을 하면 황체는 파괴되지 않고 유지되며 프로게스테론 에스트로겐의 농도가 높아져 LH, FSH의 분비가 억제된다.
피임제란 바로 프로게스틴의 농도를 높은 상태로 유지시키는 것이다. 즉 임신된 것처럼 시상하부를 오인시켜 LH, FSH가 방출되지 않게 해 결국 난포의 성숙, 배란이 차단되도록 한다. 또 경구피임제의 성분인 프로게스틴은 자궁경부점액을 진하게 해 정자가 난자와 만나기 어렵게 하며, 자궁내막에 변화를 주어 수정란의 착상을 어렵게 한다. 소량 혼입된 에스트로겐은 자궁내막을 유지시켜 중도출혈을 방지한다.
피임제 연구의 시초는 9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3년 배란 후에 깨진 난포 내에서 황색물질이 형성되는 것이 발견됐고 이렇게 형성된 황체가 자궁을 임신유지에 적합하도록 만든다는 논문이 발표됐다. 그래서 1920년대 이래 인공제조된 황체추출물은 유산방지, 월경장애치료에 사용됐다. 황체추출물에서 생리작용을 나타내는 성분을 분리하려고 한 것은 당연하다. 1934년 미국 스위스 독일의 3개 팀이 동시에 프로게스테론을 분리했다. 특히 독일팀을 이끈 괴팅겐대학의 아돌프 부테난트는 성호르몬의 분리와 구조 규명으로 이름이 나 있다.
부테난트는 1929년 임신한 여성의 소변에서 에스트로겐에 속한 에스트론을 분리해 최초로 성호르몬을 발견했다. 또 1931년 안드로스테론을 분리해 최초의 안드로겐 발견자가 됐고 1934년에는 프로게스테론을 최초로 분리했다. 부테난트는 이와 같은 업적으로 1939년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여성호르몬이 분리되자 즉시 에스트로겐은 월경장애, 난소발육부전에 듣는 약으로, 프로게스테론은 유산방지, 월경장애를 해결하는 약으로 개발됐다. 또한 이들 호르몬의 생리작용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과량의 호르몬을 동물에게 주사할 때 배란이 억제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것을 기초로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에스트로겐, 프로게스테론을 각각 단독으로 또는 섞어서 투여하면 여성의 배란을 억제할 수 있다는 논문이 발표되기 시작했다. 1944년 한명의 여성에게 프로게스테론을 주사해 피임제로서의 가능성을 시험한 기록도 있다.
후진국 여성에게 임상시험
신약은 단지 가능성을 어림잡거나 몇 사람에게 효과가 있다고 해서 판매가 허가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1960년에야 경구피임제가 시판됐다. 피임제가 나오기까지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이 매사추세츠 우스터재단의 그레고리 핑커스다.
1950년 핑커스는 매사추세츠 공과대학을 여성으로서 두 번째로 졸업한 멕토믹으로부터 안전한 피임제 개발을 목적으로 약간의 연구비를 확보했다. 그는 프로게스테론의 배란억제 효과를 아이디어로 피임제를 개발할 생각을 가졌다. 핑커스는 5mg 이상의 프로게스테론을 암토끼에 먹여 교배장에 넣었다(5mg은 매우 많은 양이다). 이렇게 많은 양을 투여한 이유는 프로게스테론이 먹는 즉시 간에서 쉽게 분해되기 때문이었다. 모든 토끼가 배란되지 않았고 따라서 임신되지 않았다.
실험이 끝난 직후 핑커스는 우연히 하버드의대의 존 록을 만났다. 록은 그동안 여성이 임신했을 때 호르몬 변화 때문에 난소관 또는 자궁의 성장이 촉진된다는 것을 알고 불임여성에게 여성호르몬을 투여하는 실험을 한적이 있었다. 그는 합성 에스트로겐을 대량 투여한 후 프로게스테론을 투여하는 스케줄을 3개월간 반복하는 실험을 했다. 이 요법에 의해 임신이 가능해지기도 했으나, 문제는 치료중에 월경이 일어나지 않아 치료를 받는 여성은 정서적으로 고통스러워했다.
록의 연구를 듣고 핑커스는 처음 3주간 프로게스테론만 투여하고 그 다음 투여를 중단해 월경이 일어나도록 한 후, 다음 월경주기의 5일째에 치료를 계속하도록 조언했다. 핑커스가 제안한 방법으로 불임여성을 치료했을 때 환자는 정서적으로 안정될 수 있었고 몇명은 3개월간의 요법이 끝났을 때 임신이 됐다. 그러나 5명 중 1명은 중도출혈이 일어났으며 더욱이 프로게스테론을 1일 3백mg이나 대량 투여했음에도 배란억제율을 85% 이상으로 끌어 올릴 수 없었다.
이런 현상에 대해 프로게스테론의 효과가 약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핑커스는 1953년 9월 여러 제약회사에 편지해, 작용이 강한 합성 프로게스틴이 있으면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렇게 해서 받은 2백개의 화합물을 토끼와 쥐로 실험한 핑커스는 15개 정도를 선별해서 록에게 임상시험을 하도록 했다. 록은 50명의 불임여성에 이들 화합물을 투여했고 10-50mg의 소량에서도 배란억제를 관찰할 수 있었다. 또 6명의 환자에서는 미발육된 난소관이나 자궁의 성장촉진이 일어났으며 치료 후에 임신이 됐다.
록은 합성 프로게스틴을 이용해 일부 불임여성을 치료하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같은 실험과정에서 핑커스는 배란이 억제되는지를 관찰해 프로게스틴으로 피임제 개발이 가능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그렇다면 프로게스틴을 함유한 어떤 약이 최초의 피임제로 개발됐을까? 1952년 미국 제약회사 설의 콜튼이 합성한 노르에티노드렐이었다.
콜튼은 1949년 시카고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메이오클리닉에서 켄들과 함께 코르티손 합성(과학동아 95년 11월호)을 연구했다. 켄들이 코르티손의 류머티즈관절염 치료효과를 발견한 업적으로 1950년 노벨의학상을 수상한 것을 기폭제로 많은 제약회사가 스테로이드 호르몬 연구를 시작했다. 비교적 조그만 회사였던 설도 이 연구를 위해 1951년 콜튼을 위시한 많은 과학자들을 채용했다.
설에서 최초로 피임제 개발이 가능했던 이유는 핑커스를 고문으로 두었기 때문이다. 또 우수한 화학자 콜튼이 있었다. 노르에티노드렐은 1957년 월경장애 치료제로 발매됐으나 이미 1956년부터 푸에르토리코에서 시작된 경구피임제 임상시험에 이용됐다. 어떤 약보다 효능성이 컸고 안드로겐성 부작용(살이 찌고 여드름이 난다)이 적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설에서 개발된 피임제 에노비드에는 노르에티노드렐과 1-2%의 합성 에스트로겐, 메스트라놀이 들어있다. 메스트라놀을 혼합해야 한다는 사실은 임상시험 중에 발견된 것이다.
임상시험 초기에 몇건의 중도 출혈 보고가 들어왔다. 그 후 피임제 투여 주기의 마지막에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는 많은 보고가 날아들었다. 중도 출혈이 나타난다는 것은 피임제로의 가능성을 희박하게 하는 심각한 문제였다. 설의 연구진은 원인규명에 나서 중도출혈이 노르에티노드렐의 순도와 관계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순수한 물질을 사용했을 때 중도출혈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불순한 원료에는 합성원료인 메스트라놀(합성 에스트로겐)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게됐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피임제에 메스트라놀을 혼입시켜 시험했다.
2년후 남미의 푸레르토리코에서 실시된 임상 예비결과가 분석됐다. 2백21명의 여성 중 아무도 임신되지 않았다. 실험에서 탈락한 여성 중에는 임신여성이 나타났다. 전체 1천6백명 여성의 임상결과 자료를 검토한 미국 식품의약국은 1960년 노르에티노드렐과 메스트라놀의 혼합제제인 에노비드의 발매를 허가했다. 인류 최초의 과학적 경구피임제였다. 경구피임제에 대한 임상시험에는 여권운동가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부작용 줄이기 위한 노력
독일 쉐링은 부테난트의 성호르몬 연구를 지원한 회사다. 이 때문에 이 회사는 1930년대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을 약으로 개발했을 뿐 아니라 이미 여성생식에 관한 많은 연구를 수행했다. 1938년에는 최초로 먹을 수 있는 프로게스틴인 에티스테론을 합성했다. 또한 천연 에스트로겐과 달리 먹어도 흡수가 잘되는 강력한 에스트로겐, 에티닐에스트라디올을 합성했다. 에티닐에스트라디올은 현재 경구피임제에 가장 많이 들어있는 성분이다. 단독으로는 폐경 후 여성의 감정변화를 완화시키는 목적으로도 사용된다.
불행히도 독일 쉐링은 제2차대전의 패전으로 특허권 상표권이 몰수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고 1958년 합성 프로게스틴을 합성하는데 성공한다. 이 물질은 에티닐에스트라디올과 섞어 1961년 유럽최초의 피임제(아노블라)로 발매됐다.
한편 멕시코의 신텍스는 프로게스테론을 합성·공급하는 회사였다. 이 회사의 칼 드저라시는 코르티손을 합성했으나 상업적 개발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5개월 뒤인 1951년 6월 경구 프로게스틴(노르에틴드론)의 멕시코 특허를 출원했다.
드저라시는 '프로게스테론과 에스트라디올의 구조를 모두 가진 물질을 합성할 의도였다'고 말했다. 이 목표는 과학적으로 근거가 희박했으나 결국 찾아냈다. 신텍스는 1956년까지 노르에틴드론의 공업적 제조공정을 확립했다.
당시 신텍스는 원료합성 회사였으므로 약판매망이 없었다. 그래서 미국 파크데이비스에 약 개발권을 주었다. 그러나 피임제로 개발할 경우 인공피임을 반대하는 종교단체에 의해 회사의 모든 약에 대한 불매운동을 염려한 파크데이비스는 1958년 유산방지와 월경장애 약만 개발했다. 그러나 막상 설의 에노비드를 보고 우수한 합성 프로게스틴을 그대로 둔 것을 후회한 신텍스는 노르에틴드론을 오르소에 제공해 1962년 에티닐에스트라디올과의 복합제제인 오르소노붐을 발매했다. 그리고 1964년 신텍스는 직접 합성 프로게스틴을 메스트라놀과 복합해 노리닐이라는 상품명으로 시장에 내 놓았다.
피임제의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피임제의 한 성분인 프로게스틴 성분은 부작용이 적은 선택적인 약으로 대체되거나 피임이 가능한 범위에서 소량 사용하게 됐다. 그러나 피임제를 장기복용한 여성은 심근경색과 뇌졸중 등의 심순환계 질병의 발생률이 높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이것은 특히 피임제에 함유된 에스트로겐 양과 관계있으며 흡연, 고혈압, 고콜레스테롤혈증, 비만, 당뇨병 등의 인자와 복합돼 문제를 악화시킨다는 것이 발견됐다.
따라서 피임실패가 되지 않는 범위에서 최소량의 프로게스틴과 에스트로겐을 함유한 약들이 개발됐다.
현재 한국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약은 독일 쉐링이 개발한 마이블라(마이보라)다. 이 약에는 1970년대 발견된 게스토겐 0.075mg과 에티닐에스트라디올 0.030mg이 들어있다. 물론 게스토겐은 합성 프로게스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