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을 디지털 시대라고 부른다. 무엇이 디지털인지 딱부러지게 표현은 못해도 많은 사람들은 이 말에 공감을 표시한다. MIT미디어 랩의 네그로폰테는 "아톰의 시대는 가고 비트의 시대가 왔다" 고 디지털시대의 도래를 압축해 표현했다. 여기서 아톰은 물질을, 비트는 디지털화된 정보를 의미한다.
실제로 1백 권에 달하는 백과사전 한질(아톰)이 디지털정보로 바뀌어 눈 깜짝할 시간에 통신망을 통해 전송된다. 학생들은 개구리를 잡아다 해부할 필요 없이 컴퓨터 앞에 앉아 개구리가 숨쉬는 모습이나 메스를 댔을 때 반사신경이 작동하는 모습을 반복적으로 살필 수 있다. 비싼 돈을 주고 장난감 레고를 사다가 미래의 우주정거장을 조립하지 않아도 컴퓨터 화면에서 디지털 레고를 조작해보면서 지능을 개발할 수 있다. 이 경우에 백과사전이나 개구리, 그리고 레고라는 물질은 아무런 장애 없이 디지털화돼 컴퓨터 화면에 띄워진다.
그렇다면 과연 인류는 디지털 사회에 연착륙할 수 있을까. 여기에는 여러 이견이 존재한다. 그것은 우리가 현재 대하고 있는 텔레비전이 아날로그 방식이기 때문도 아니고, 우리가 접속해 사용하는 컴퓨터 통신망이 '버벅' 거리기 때문도 아니다. 이미 탤런트의 화장 상태까지 섬세하게 보여주는 디지털 TV는 100%예약 상태이며, 지금의 구리망보다 10만배 속도로 정보를 전달하는 정보고속도로도 장밋빛 청사진을 펼쳐 보이고 있다. 하드웨어만이 아니다. 신세대라 부르는 청소년들은 빠른 속도로 디지털의 세계에 몰입하고 있다. 그들이 창조해내는 '쓸만한' 아이디어는 하루가 다르게 우리 생활을 변화시키고 있다.
아날로그만의 영역은 따로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지털의 한계를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첫번째 주장의 근거는 바로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 정보를 디지털 정보로 바꿔 전달하는 이른바 '5감통신' 의 가능성 여부다.
이미 청각정보와 시각정보는 맹렬한 추세로 디지털화가 진행 중이다. 많은 미래학자들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의 명화를 안방에서 실감나게 감상할 수 있는 날이 머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기술적으로는 PC를 이용한 화상회의도 실현되고 있다. 적어도 20세기가 가기 전에 영상통신은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완성도를 높일 것으로 예상된다.
걸림돌은 입체영상의 실현이다. 미래학자들 사이에는 3차원 입체영상을 실현시켜 주는 홀로그램 TV전화를 자주 언급하지만, 홀로그램 정보는 그 비트수가 평면적인 동화상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아 (1㎤당 10억 비트) 쉽게 실현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현재의 기술 발전 추세대로라면 정보량은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후각과 촉각, 미각정보는 어떠한가. 이들 정보를 디지털화해 통신망에 올릴 수 있다면 어느 누구도 디지털 시대의 도래를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컴퓨터 화면에서 개구리 해부실험을 한다고는 하지만, 양서류 특유의 미끌미끌한 피부를 만져볼 수도 없고 냄새도 맡을 수 없다.
5감통신이란 달리 말해 감정통신이다. 감정정보는 음성이나 눈 외에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만약 전화기 손잡이에 혈압과 피부의 전위, 땀 정도를 측정할 수 있는 센서를 부착하고 검출된 신호를 어떤 형태든 재생할 수만 있다면 감정통신은 첫발을 내딛을 수 있다. 쉽게 말해 전화를 걸어 애인의 머리카락 냄새와 촉감을 느낄 수 있다면 감정통신은 실현된다. 할머니가 어린 손자의 볼을 비벼볼 수 있고, 손자는 할머니의 냄새를 맡고 안정된 심리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꿈이 바로 감정통신이다. 이런 가능성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촉각통신과 후각통신이 밑받침돼야 한다.
피부가 느끼는 감각은 여러 가지다. 아픔, 압력, 따뜻하고 찬 느낌, 부드러움, 미끄러움 등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다양한 느낌이 포함돼 있다. 우선 각양각색의 촉감을 수치화하기 위해서는 센서만도 최소한 10개 이상이 작동돼야 할 것이다. 또한 센서가 검출한 신호를 통신망에 올리고 이를 다시 감각으로 재생해야 한다.
아픔이나 부드러움, 또는 미끄러움을 각 분야별로 감지하는 센서는 충분히 개발될 수 있지만(실은 이 작업도 만만치 않다) 전송된 정보를 다시 종합해 일정한 형태의 감각으로 재구성해내는 일은 현재의 기술로는 상상도 할 수 없다. 감각의 디지털화도 어렵지만, 전송된 감각정보를 다시 물질화 시키는 일은 더욱 난감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할머니와 손자가 만나 서로 얼굴을 비볐을 때의 촉감을 통신망에 올린다는 것이 가능할까.
촉감에 비해 후각은 상황이 조금 나은 편이다. 냄새의 원인물질을 분석하고 이를 지각하는 센서를 만들면 되기 때문. 또한 받는 쪽에서는 냄새발생기를 부착하고 전달돼온 신호에 따라 원인물질을 자극하면 된다. 그러나 냄새를 발생하는 원인물질은 몇만 종류가 넘는다. 그리고 후각의 구조와 기능에 대한 연구도 아직 미진한 형편이다. 따라서 모든 냄새의 종류를 식별할 수 있는 센서를 개발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이미 인공적으로 합성이 가능한 향수라든가, 술냄새 등 특정한 분야의 냄새에 국한해 후각통신이 실용화될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어 원격진료를 할 때 의사가 환자의 입 냄새나 대소변 냄새로부터 질병 상태를 검진할 때 후각통신이 실용화된다면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그러나 입 냄새나 대변 냄새를 정확히 재발생시킬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이 냄새들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냄새 발생기에 숲속에서 맡을 수 있는 피톤치트 등을 캡슐화해 놓고 원하는 때에 캡슐을 깨뜨려 숲속의 향을 느낄 수는 있다. 하지만 자유자재로 실제 인간이 느끼는 냄새를 식별해 이를 재생할 수 있는 시스템은 현재로서는 난공불락이다.
인간의 혀에는 1만개의 미각세포가 있어 입안에 들어오는 다양한 음식물의 맛을 감정해낸다. 흔히 단맛 신맛 짠맛 등 기본요소만 센서를 만들면 되지 않겠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실제로 느끼는 미각은 각각의 맛이 서로 분해되어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종합돼 느끼는 감각이다. 소금이 동일한 농도라도 혼합된 물질의 상태에 따라 실제 느끼는 짠맛은 천양지차. 더구나 미각이 통신에 올려져 전송된다 하더라도 이는 가상의 디지털 물건이기 때문에 실제로 맛을 볼 수는 없다. 이런 한계로 인해 미각통신은 촉각이나 후각 통신보다도 연구가 더딘 편이다.
비트는 본질에 접근하려는 가상 존재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인간의 입출력시스템은 아톰을 매개로 한 아날로그 형태인데, 이를 자꾸 가상의 디지털로 바꾸려는데에 문제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시공간의 공백을 허물고 좀더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 소리와 문자, 또는 영상을 디지털화 하다보니 인간의 욕심이 지나치게 발현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가장 완벽한 통신을 구현하려면 5감통신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흔히 이야기하는 가상현실시스템도 5감통신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응용분야는 극히 제한될 것이다. 집안에서 벽면을 대형입체화면으로 치장하고 바닷가 풍경을 실현시킨다고 하자. 냄새발생기에서는 바다 냄새가 풍겨나오고, 에어컨디셔너에서는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온다. 하지만 직접 바닷물에 발을 담글 수도 없고 바닷모래에 찜질할 수도 없다는 것이 디지털의 한계다. 아무리 사회가 디지털화된다 하더라도 직접 물질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보를 전달하는 매체(책 등)는 쉽게 디지털화가 가능하지만, 독자적인 성격을 갖는 물질의 비트화는 단지 가상일 뿐이다. 네그로폰테의 "아톰의 시대는 가고 비트의 시대가 왔다"는 말은 "아톰은 본질이고, 비트는 본질에 접근하려고 노력하는 가상적인 존재다" 로 고쳐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