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1년간의 연구로 발견된 약은 그리 흔하지 않다. 단기간에 발견된 최초의 당뇨병 치료제 인슐린. 발견의 업적을 둘러싼 연구자들의 공치사 경쟁으로 그 빛을 잃기도 한다.
당뇨병은 이름 그대로 소변에 당이 섞여 나오는 병이다. 우리의 선조는 소갈병(消渴病)이라 해 갈증이 심한 병으로 봤다. 췌장의 랑게르한스섬에서 분비되는 인슐린은 세포가 포도당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하거나 저장하도록 도와준다. 만일 랑게르한스섬에 문제가 있어 인슐린이 제대로 분비되지 못한다면, 세포는 정상적으로 포도당을 섭취하지 못한다. 흡수되지 못한 포도당은 혈중에 남아 혈당농도를 높이고 우리 몸은 삼투압 유지를 위해 물을 많이 먹게 된다. 콩팥은 과량의 포도당을 제대로 걸러내지 못해 과량의 포도당이 소변에 섞여 나온다.
당뇨병의 영향은 몸 전체에 나타난다. 오래 굶은 사람처럼 전신쇠약증상이 오면서 크고 작은 혈관과 신경세포가 병든다. 당뇨병을 오래 앓으면 눈에 합병증이 발생하고 심하면 맹인이 되기도 한다.
인슐린은 1922년 프레데릭 밴팅과 찰스 베스트에 의해 발견됐다. 그 전에는 당뇨병을 치료할 약이 없었다. 인슐린 발견은 의학사에서 중요한 사건일 뿐 아니라 연구가 시작된 후 1년만에 발견됐고, 그 1년 뒤 노벨상 수상이라는 '최단 시간의 성공과 명예'의 흔치 않은 기록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1923년 밴팅과 함께 노벨의학상을 공동 수상한 존 매클로드에게 '개 몇마리를 제공하고 차지한 상' 이라는 불명예의 딱지를 붙이는 사람도 있다.
속전속결로 끝내다
캐나다 토론토대학 출신인 밴팅은 제1차 세계대전에 군의관으로 복무한 후 1919년 온타리오주의 런던에서 정형외과의로 개업했다. 학구적인 그는 웨스턴대학 생리학과에서 시간제로 교수의 강의와 연구를 돕고 있었다. 1920년 11월초 밴팅은 췌장의 랑게르한스섬에서 분비되는 물질(인슐린)이 당뇨병과 관계가 있다는 한편의 연구논문을 읽었다. 그는 인슐린의 분리를 생각했으나 췌장에서 인슐린을 추출할 때 소화효소에 의해 인슐린이 파괴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날 밤 밴팅은 췌관(膵管)을 얼마동안 결찰(묶어둠)해 소화효소 분비세포를 퇴화시킨다면 인슐린이 들어있는 췌장 조직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착상을 했다.
밴팅은 다음날 아침 출근해 생리학교수와 상의한 후 도서관에서 이것 저것 문헌을 찾아보고 새로운 시도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그는 연구 장소로 당시 당뇨병 분야의 권위자였던 토론토대학의 존 매클로드 실험실이 가장 적합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밴팅은 1920년 11월 6일 매클로드를 방문해 자신의 계획을 상의했다. 그들의 대화는 즉시 소화효소문제, 췌관 결찰까지 이어졌다. 이 때 알콜 추출법도 토의됐다. 아이디어는 밴팅이 냈으나 생리학교수인 매클로드는 그것이 특별히 새로운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즉시 알 수 있었다. 매클로드는 밴팅에게 4-5개월동안 의사개업과 조수직을 희생할 각오가 있으면 다시 연락하라고 했다.
1개월 후 밴팅은 자신의 결정을 매클로드에게 알리고 학기가 끝난 1921년 5월 14일 토론토에 도착했다. 매클로드는 밴팅이 연구경험이 없음을 알고 췌장을 떼내 당뇨병이 걸린 개(당뇨병개)를 만드는 방법, 췌관결찰법 등을 시범적으로 보여주고 관련문헌도 제공했다. 이 실험의 성공은 분리한 물질을 효과적으로 시험하는데 달려있으므로 혈당 및 요당측정에 경험을 가진 생화학과 학생 찰스 베스트를 조수로 할당해줬다.
밴팅과 베스트는 즉시 연구에 착수해 7월말까지 당뇨병개와 몇주동안 췌관을 결찰한 개(췌관결찰개)를 얻었다. 그들은 췌관결찰개에서 떼낸 췌장을 얼음으로 냉각한 생리식염수와 함께 갈았다. 이렇게해서 얻어진 물질을 당뇨병개에 주사한 결과 혈당의 감소를 관찰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11월까지 밤낮으로 여러가지 추출법을 시험했다. 인슐린이 트립신에 의해 분해되므로 단백질이라고 추정했고, 추출용매로는 물-알콜 혼합액이 가장 적절한 것을 알아냈다. 밴팅과 베스트는 그 동안의 연구결과를 11월 중순 생리학과 세미나에서 처음으로 발표했고 매클로드의 조언을 받아 논문으로 작성했다. 이 때 매클로드는 논문작성법을 알려줬고 작성된 논문을 검토하고 수정해줬음에도 논문이 두사람의 연구결과이므로 자신의 이름은 넣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1921년 12월 미국 생물과학학회가 뉴헤븐에서 열렸다. 발표논문 제출 일시가 임박하자 매클로드는 아직 완전한 결과가 나온 것은 아니지만 발표할 가치가 있다고 했다. 이 때 밴팅의 제의로 매클로드는 초록을 작성했고 자연스럽게 매클로드의 이름이 발표논문에 들어가게 됐다. 뉴헤븐학회에서의 발표를 계기로 인슐린에 대한 학계의 관심이 고조됐다.
이런 중에 임상실험이 진행됐다. 1922년 1월 11일 밴팅과 베스트가 만든 소췌장 추출물이 14세의 톰프슨에게 주사됐다. 처음에는 혈당과 요당이 일시 감소했으나 주사부위에 종기가 생겨 주사를 계속할 수 없었다. 불순물 때문이었다.
매클로드는 좀더 순수한 추출물을 만들도록 제임스 콜립에게 지시했다. 에드먼턴대학 교수인 콜립은 당시 매클로드 실험실의 방문교수로 인슐린 주변 연구를 돕고 있었다. 콜립은 밴팅과 베스트가 만든 물-알콜 추출액에 몇배의 순수 알콜을 다시 가해 좀더 순수한 인슐린을 제조했다. 이 물질은 톰프슨에게 계속 주사됐고 그는 수년 후 교통사고로 사망할 때까지 좋은 건강을 유지했다. 톰프슨의 임상결과는 1922년 3월에 발표됐다.
1922년 2월 임상실험을 위한 대량의 인슐린 제조가 토론토대학 코너트연구소에서 시작됐다. 콜립은 생산책임자가 됐고 밴팅과 베스트는 1차 추출액을 만들어 콜립에게 제공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점차 생산율은 저하됐고 콜립은 더 이상 제조를 할 수 없다고 실패를 선언했다. 베스트는 다시 실험에 착수해 문제를 해결했고 5월 중순 임상실험에 충분한 순도를 가진 인슐린을 만들었다. 새로이 제조책임자가 된 베스트의 주관하에 대량으로 인슐린이 생산됐다.
공치사 경쟁으로 얼룩진 노벨상
인슐린의 발견자는 밴팅과 베스트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밴팅 베스트 콜립 매클로드라고 기재된 책도 있다. 실제 노벨의학상은 밴팅과 매클로드가 받았고 노벨상금을 밴팅은 베스트와, 매클로드는 콜립과 나눠가졌다. 밴팅과 매클로드의 갈등을 조정하기 위해 1922년 9월 토론토대학은 두사람으로부터 발견의 전말과 각자의 역할을 보고서로 제출받기도 했다.
두사람간의 갈등은 1921년 9월 매클로드가 여름 휴가에서 돌아오면서 시작됐다. 봉급과 실험실 환경을 개선해줄 것을 공식요청한 밴팅에게 매클로드는 차갑게 대했다. 그러자 밴팅은 다른 곳으로 떠나겠노라고 맞섰고 결국 매클로드가 밴팅의 요구를 수용하는 선에서 문제는 해결됐다. 후에 밴팅은 이것을 매클로드가 인슐린 연구에 흥미가 없었던 증거로 내세웠다.
1921년 11월 생물학과 세미나에서 결과가 발표된 뒤 갈등이 다시 나타났다. 밴팅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단지 연구조수로 여기고 매클로드의 연구가 훌륭하다고 말하는 데 충격을 받았다. 이에 밴팅은 매클로드가 아무 한 일이 없는데도 발표시 우리라는 용어를 쓰도록 강요했다고 비판했다. 갈등은 1921년 12월 뉴헤븐학회 발표 후 더욱 표면화됐다. 밴팅은 노골적으로 매클로드가 한 일이 없음에도 이 연구가 자기연구인 것처럼 행동한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언론에서 매클로드의 연구라고 보도한 내용을 정정하라고 공개적으로 대들었다.
그러나 매클로드의 입장은 달랐다. 그는 인슐린 분리는 밴팅 혼자의 노력이 아니었고 밴팅 베스트 콜립 그리고 자신이 공동으로 이룬 것이라고 주장했다. 처음 연구를 시작한 것은 밴팅이었지만 그의 연구 아이디어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닌, 이미 알려져 있던 것이며 실험과정 중의 아이디어는 4인의 공동토의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노벨상 위원회는 이런 매클로드의 주장을 인정해 그에게 상을 수여했다.
밴팅과 매클로드의 문제는 연구의 공로할당이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가에 관한 문제다. 밴팅은 매클로드로부터 실험시설 조수 연구비의 혜택을 받았다. 더욱이 매클로드에게 연구결과를 보고했고 그의 조언을 들었다. 매클로드의 말대로라면 전체 연구방향은 4인의 토의에서 나온 것이었다. 실제 상황은 매클로드를 연구지도자로 팀연구 형태로 운영됐던 것이다.
한편 매클로드는 올바른 연구지도자였는가. 그는 처음에 흥미가 없다가 연구결과가 나오기 시작하자 적극적으로 콜립과 함께 연구에 개입한 인상이 크다. 그는 팀연구형태가 최단기간내에 완벽한 연구결과를 나오게 했다고 주장하지만 밴팅의 독자적 연구로도 가능할 수 있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또한 밴팅과 베스트가 하던 추출물 제조를 중도에 콜립에게 맡기는 행위는 연구지도자로서 비난받아 마땅한 행위다.
그렇다고 밴팅의 잘못이 없는 것도 아니다. 연구실에서 일어나는 일이 자신에게 불합리하다고 생각되는 연구원은 그저 불평만 할 것이 아니라 일이 발생한 시점에 정확히 문제점을 지적해 토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밴팅은 매클로드팀의 일원으로 일하면서 문제를 공식적으로 지적하기보다는 비난만 했고 자신이 인슐린의 발견자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매클로드와 콜립의 공로를 전부 무시하려 했다.
왜 밴팅은 그런 행위를 했을까. 밴팅의 성격상 문제일 수도 있지만 다른 시각에서는 밴팅이 매클로드의 인품을 미리 알고서 자신의 공로가 희석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적극적 행동을 취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밴팅의 비난은 노벨상을 타기 위한 포석이었는지도 모른다.
1921년 12월 뉴헤븐학회에서 밴팅이 연구결과를 발표할 때 미국 인디아나폴리스 소재 제약회사 일라이릴리(릴리)의 연구소장인 조지 클라우스가 참석하고 있었다. 클라우스의 제의에 의해 릴리와 토론토대학은 1922년 5월 상업개발 계약을 했다. 이 계약은 인도적 목적에 주안점을 둔 것으로 속히 당뇨병환자에게 인슐린 공급이 가능하도록 토론토대학의 정보를 모두 릴리로 넘긴다는 것이었다.
릴리는 조지 월덴을 책임자로 1백여명의 인원을 동원해, 개발연구를 시작했다. 월덴은 소나 돼지의 췌장으로부터 대량으로 추출하는 방법을 개발했을 뿐더러 순수하고 안정된 인슐린을 제조하는 방법을 발견했다. 1922년 이 방법으로 인슐린 제조를 시작했고 1년내에 미국의 모든 당뇨병 환자가 사용하기에 충분한 양의 순수한 인슐린을 생산할 수 있었다.
인슐린이라고 모두 동일하지는 않다. 되도록이면 한번 주사해 오랫동안 원하는 혈중 농도를 유지시켜 주는 제제가 당뇨병 환자에게 필요한 것이다. 1950년대까지 이런 지속성 인슐린 제제가 많이 연구돼 약으로 나왔다. 동시에 인슐린의 정체에 대한 연구도 진행됐다. 케임브리지대학의 프레데릭 생거는, 1953년 인슐린의 1차구조를 밝혀내 소나 돼지의 인슐린이 인간의 인슐린과 구조상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알게됐다. 또한 미국의 폴 버그(1980년 노벨화학상) 등에 의해 1972년 최초의 유전자 이어맞추기가 성공하자 인슐린의 유전공학적 제조에 관심을 돌리게 됐다. 그후 무수히 많은 논문이 발표된 가운데 1978년 9월 릴리와 지넨테크의 연구진은 인간인슐린 유전자 합성에 성공한다. 임상실험을 거쳐 인공합성된 인슐린은 1982년 영국과 네덜란드를 시작으로 판매되기 시작됐다.(자료도움, 미국 일라이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