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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에 대한 아이디어를 먼저 떠올리고 경험도 앞선 그레이는 상업적 가치를 앞세우다 우선권을 놓쳤다. 전화 발명에만 골몰한 벨의 승리였다.

최초로 전화를 발명한 사람은 벨(Alexander Graham Bell)이다. 최근 광고에서 '역사는 1등만을 기억합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벨의 사진이 커다랗게 실렸다. 그러나 전화가 발명되기 직전 당시의 전신업계는 전화를 발명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으로 그레이(Elisha Gray)를 꼽았다. 간발의 차로 그레이는 후대의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인물이 됐다. 1876년 2월 14일 그레이는 벨보다 전화 특허를 1시간 늦게 신청한 것이다.

미국의 전신업계에서 벨은 무명의 청년이었고 그레이는 유명한 발명가이자 기업가였다. 아마추어인 벨이 프로인 그레이보다 전화를 빨리 발명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레이가 벨보다 아이디어를 먼저 떠올렸고 실험도 더 많이 했다는 점에서 이 의문은 더욱 커진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레이는 전화 발명보다 그 원리를 활용해 당시의 전신 시스템을 개량하는데 주력한 반면, 발성학 선생으로서 인간의 목소리에 관심이 많았던 벨은 시종일관 전화를 발명하는데 모든 정열을 바쳤기 때문이다.

욕조에서 얻은 아이디어

모스가 1837년 전신기를 발명한 이래 19세기 후반 미국 사회에서 전신 시설은 급격히 늘어났다. 특히 남북전쟁을 거치면서 전신의 필요성이 부각되자 1865년 5만마일에 불과했던 전신선이 5년 후 5배로 급증했다. 그러나 초기의 전신 시설은 하나의 주파수를 이용해 신호를 전송하는 단일 시스템이었다.

이때 전신 기술의 획기적인 변화를 예고한 사건은 이중 시스템의 출현이었다. 1872년 웨스턴유니온사는 이를 채택해 통신망의 능력을 두배로 향상시켰다.

이중 시스템의 성공이 분명해지자 수많은 신호를 동시에 전송할 수 있는 다중 시스템의 개발이 새로운 관심거리로 부상했다. 다중 시스템을 발명하는 사람이 부와 명성을 얻게 되는 것은 불보듯 뻔한 분위기였다.

웨스턴일렉트릭사의 고위 경영진이던 그레이는 1874년 우연히 단서를 잡았다. 어느날 그는 전기실험 애호가인 사촌동생 집에 놀러갔다. 사촌동생은 욕조에 두개의 회로로 구성된 전기 장치를 설치해 실험을 즐기고 있었다. 한 회로의 전지가 금속판에 진동을 발생시키면 그것이 소음을 내면서 유도코일이 설치된 다른 회로를 열거나 닫았다. 그레이는 이 진동 전류가 전신 분야로 응용될 가능성에 주목, 회사를 그만두고 연구에 전념했다.

그는 몇가지 전송기와 수신기를 만들어 실험하면서 세가지 활용분야를 생각해냈다. 첫째는 키보드를 누르면 전송기가 작동해 다양한 음이 발생하는 일종의 전자오르간 시스템이었다.둘째는 복합 전류를 전송할 수 있는 전신선을 개발하는 일로, 이때 전류를 개별 신호로 분리하는 일이 관건이었다. 마지막이 바로 사람의 목소리를 전달하고 재생하는 기계, 즉 전화를 개발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전송된 인간의 목소리를 여러 주파수로 분류하고 다시 합성하는 일이 큰 문제였다.

생각이 전화까지 미치자 그레이는 자신의 생각을 전신 전문가들에게 알렸다. 처음에는 그레이의 생각이 세간의 흥미거리로 떠올랐다. '뉴욕 타임스'는 전화가 전신 기술의 지평을 확장할 수 있다고 호평했다.

그러나 전신업계의 주도적 잡지 '텔리그래퍼'는 전화에 대한 착상이 진부한 것이고(1861년 한 독일인이 이미 전화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실제로 응용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전문가들의 견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부정적인 여론에 낙심한 그레이는 나머지 두가지 영역을 집중적으로 탐구해 곧 중요한 결실을 얻었다. 우선 그는 수신기 성능을 증대시켜 두 옥타브의 음역을 낼 수 있는 오르간을 개발했다. 또한 전송기의 접속 형식과 압력 상태를 개선함으로써 다양한 주파수를 전달할 수 있었다. 즉 다양한 신호가 수신기에서 재생되는 다중 시스템의 실현이 눈앞에 다가왔다.

이 개발은 전화에 관한 연구로 이어질 수 있었다. 전송기에 접속된 신호 압력을 적절하게 조절하면 인간의 목소리가 재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레이도 이 점을 분명히 알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전화에 대한 미련을 버린 상태였다.
 

같은 결론, 다른 출발

한편 벨은 전신 분야에 문외한이었지만 음향학 연구를 통해 전화와 '연결'될 수 있었다. 그는 에딘버러 대학의 발성학 교수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인간의 음성과 기능에 관심을 가졌다.

벨은 언어 감각이 매우 뛰어났다. 벨이 한때 캐나다 모호크족의 언어를 배워 말을 유창하게 구사하자 추장이 그를 명예부족원으로 대접했다는 일화가 있다. 벨은 발성학과 음향학을 전공한 뒤 1871년 보스턴 농아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전기 신호에 대한 관심은 1870년 독일 과학자 헬름홀츠의 음향이론에 관한 책을 접하면서 시작됐다. 헬름홀츠는 소리굽쇠의 끝을 진동시켜 전류를 발생시키고 그 전류가 다른 소리굽쇠를 작동시키는 방법을 고안했다. 전기를 통해 소리를 전달할 수 있는 단서가 제공된 것이다.

벨은 각 소리굽쇠가 개별적인 신호를 전송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다양한 주파수를 전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레이가 직면했던 똑같은 문제, 즉 복합 신호를 어떻게 개별 신호로 분류할 수 있는지의 과제에 부딪혔다.1874년 벨은 그레이의 활동소식을 듣고 자신의 연구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는 본격적인 연구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농아 여학생의 가정교사를 맡았다. 마침 그녀의 아버지는 전신 사업에 관여하던 금융가였다. 그는 벨의 연구 계획을 듣고 재정적 지원을 약속했다. 덕분에 벨은 전기 기술자와 기구 제작자를 고용해 자신의 연구를 급속히 진척시켰다.

벨은 곧 신호 압력을 조절함으로써 복합신호를 분류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레이와 같은 결론이었다. 그러나 두사람의 이후 행로는 상당히 달랐다.

벨은 전화를 자신의 가장 중요하고도 유일한 문제로 굳게 믿었다. 하지만 그레이는 벨이 부차적인 문제를 연구한다고 생각했다. 그레이는 자신의 특허담당 변호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벨은 모든 에너지를 전화에 쏟는 듯하다. 그것은 과학적으로 매우 흥미롭지만 어떤 상업적 가치도 없다. 왜냐하면 전신산업계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것보다 이미 사용되는 시스템을 개선하는데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역사는 2등을 기억하지 않는다

그레이는 결국 벨이 곧 전화를 발명한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부랴부랴 자신의 아이디어를 서류로 작성, 특허청에 특허정지신청을 냈다. 아이디어의 우선권을 인정받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벨이 전화 특허신청을 낸지 1시간 후였다.(그림)

이 사건은 발명의 우선권을 주장하는 논쟁으로 번질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다. 그레이와 그의 변호사는 전화가 큰 상업적 가치가 없을 것이라고 여기고 전화 특허에 미련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인간의 발명품 중 전화만큼 대중으로부터 열광적인 호응을 받은 것이 드물지 않은가.

1876년 3월 10일 벨은 조수에게 전화로 "왓슨 군. 이리와서 나 좀 보게"라고 말했다. 이 최초의 통화는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또한 같은 해 6월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에서 전화는 브라질 황제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유명인사들로부터 큰 관심과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벨은 전화의 발명가로 역사에 영원히 기록됐다. 그러나 그레이는 전신 시스템과 관련된 몇가지 부속 장치를 개발하는 것으로 그쳤고, 세월이 지나면서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인물이 되고 말았다. 역사는 1등만을 기억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