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부터 태아 심음까지 '소리'는 사람을 진단하는 중요한 매개체다. 몸 속 소리를 탐험하면서 건강을 판단해보자.
목소리로 당신의 건강을 판단할 수 있을까. 아나운서는 목소리를 관리하기 위해 소리를 컴퓨터에 저장한다. 산모 뱃속에 전극을 장치해 태아의 심장 상태를 확인하기도 한다. 21세기에는 내시경 없이 소리를 듣고 위염을 진단할 수 있지 않을까.
'불뚝 불뚝 불뚝 불뚝…'. 이것은 공포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심장의 박동소리. 관객들은 이 순간 무슨 긴박한 일이 생길지 몰라 손에 땀을 쥐고 숨을 죽인다. 이때 심장소리는 생명의 원천으로서가 아니라 공포의 대상으로 인식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명쾌한' 소리는 심장이 '건강하게' 활동할 때 발생하는 소리다. 만일 심장 밸브가 류머티즘열(rheumatic fever)로 손상이라도 입으면 피의 흐름이 방해돼 우르렁거리는 잡음이 들린다. 따라서 깨끗하지 않은 박동소리는 심장이 건강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안 들리면 '그림으로 그려서' 들어
몸속에서 발생하는 소리를 듣고 사람의 건강을 진단하는 청진(聽診)은 의학에서 가장 손쉬우면서 고전적인 방법이다. 청진의 기원은 히포크라테스가 환자 몸에 귀를 밀착시켜 체내 음을 직접 청취한데서 비롯됐다.
이후 19세기 초에 청진기가 발명돼 체내에서 발생하는 심음(心音) 호흡음 등을 청취, 몸이 정상적인 상태인지 여부를 확인하는 도구로 사용됐다. 아이들이 종이로 만든 통으로 귀에 대고 소리를 내며 노는 것을 보고 힌트를 얻어 응용된 것이다.
심음은 심장이 수축하거나 확장할 때 발생하는 소리다. 청진기로는 보통 심실 수축기 시초에 발생하는 제1음과 심실 확장기 시초에 발생하는 제2음을 들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제1음은 제2음보다 저음이고 둔하며 소리의 지속이 길다(그림1). 두가지 음 사이의 시간 간격, 음의 강약 등이 진단의 기초가 된다.
병원에서 흔히 볼수 있는 청진기는 의사가 양쪽 귀에 꽂고 소리를 듣는 쌍이형(雙耳型). 최근에는 보청기처럼 미세한 음도 측정할 수 있는 장치, 여러 사람이 동시에 들을 수 있는 확대장치, 직접 옷 위에서 청진할 수 있는 증폭장치 등을 함께 사용한다.
보다 자세한 소리를 집중적으로 듣고 싶을 때는 한쪽 귀로만 들을 수 있는 편이형(片耳型) 청진기를 사용한다. 이것은 청진할 수 있는 부위가 어느 정도 한정돼 있고, 옆으로 귀를 기울이고 청취해야 하는 결점이 있는 반면, 쌍이형보다 잡음이 적어 태아(胎兒)의 심음을 청취하는데 잘 사용된다.
청진기를 몸에 대는 부위는 당연히 몸의 소리가 가장 크게 전달되는 장소다(그림2, 대동맥 폐동맥 삼천판(tricuspid) 승모판(mitral valve) 부위). 사실 심장은 각종 혈관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어 심장부위별로 다양한 소리가 발생한다. 이 가운데 비교적 소리가 명료하게 들리는 곳을 선정해야 한다. 이 네부분의 앞조직은 고체성이면서 폐가 팽창 할 때 심장과 가장 얇게 겹치는 부위이므로 소리를 잘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심음의 크기는 무척 작아 청진기만으로 충분히 듣기 어렵다. 보통 심음의 주파수는 0.1-2천㎐. 인간의 가청범위가 20-2만㎐이므로, 20㎐ 이하의 소리를 들을 경우에는 별도의 조치가 필요하다. 또한 심장에서 발생하는 정상음과 잡음을 직접 귀로 구분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심장제1음만 해도 그 발생 메커니즘은 현재까지 제안된 것만 40개 이상. 즉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정확한 진단이 어려운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발된 것이 심음계(phonocardiograph)다. 심음계는 청진기 원리에 소리를 '쓰는' 장치를 결합한 장치다. 심음이 흉벽에 전달되면 흉벽에 진동이 생긴다. 심음계는 이 진동을 마이크로폰으로 전기에너지로 변환시키고, 증폭기와 필터를 거쳐 그래프로 나타낸다.
물론 심음계만으로 심장의 많은 상태를 알 수 없다. 흔히 사용되는 보다 정확한 측정기는 심장의 수축에 따른 활동전류를 그래프로 작성 하는 심전계(electrocardiograph). 심음계는 심전계의 보조수단으로 사용되는 정도다.
태초의 심장소리
현대 의학기술의 발달로 등장하는 각종 첨단장비로 인해 진단분야에서 청진이 차지하는 비중은 점차 줄고 있다. 인체에 대한 정확한 측정은 구조적(X선 CT MRI 등) 흑은 물리화학적 분석 방법으로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김영모씨((주)메디슨 경영정보실장)는 청진술이 다른 방법에 비해 학생에게 가르치기 어려워 이 분야에 대한 연구가별로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소리를 듣고 상태를 파악하는 정도가 되려면 상당히 오랜 기간의 연륜이 쌓여야 하기 때문이다.
청진술의 학습원리는 '경험사례에 기초한 추론'이다. 과거에 해결했던 문제를 기억해 새로운 환자에게 적용하는 방식이다. 한 예로 학생들이 심장이 확장될 때 잡음을 듣지 못하면, 보다 잡음이 명확한 환자로부터 그 소리를 듣게 해서 정확하게 인식시킨다.
하지만 청진술은 가격이 저렴하고 진단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의학에서 여전히 중요성을 잃지 않는다. 특히 임신부의 태아 심음을 관찰할 때 청진술의 가치는 더욱 빛난다. 태아 심음은 태아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안전한 지 여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태아의 심음은 임신부가 태동을 느낄 때부터 2-3주일 후에 편이형 청진기를 모체 복부에 대고 들을 수 있다. 정상적인 심음은 제1 제2음을 합해 1분에 1백20-1백40회. 1백회 이하 혹은 1백60회 이상인 경우는 태아가 질식 등의 이상 증후를 보이는 것이다.
최근에는 초음파 도플러법 진단장치가 개발돼 태아 심음이 보다 정확히 측정되고 있다. 도플러효과를 고려하고 초음파를 이용해서, 태아 심음 중 청취하기에 적당한 주파수 성분을 스피커로 듣고, 동시에 이를 그래프로 나타내는 것이다. 이 장치로 임신 12주 이후 태아의 심장박동을 들을 수 있게 됐다.
초음파는 파장이 짧고 방향성을 가지므로 특정 부위 상태를 알 수 있다. 초음파를 태아에게 보내면 태아의 심장박동으로 인한 심장벽 혈관벽 혈액 등의 움직임에 반사된다. 이때 혈류의 양은 소리 크기로, 혈류 속도는 그래프에서 주파수 형태로 나타난다.
이 장치는 기존의 편이형 청진기보다 정확하고 안정적으로 태아 심음을 관찰할 수 있다. 더욱이 모체 복벽에 여러개의 센서를 장치함으로써 태아가 자궁에서 하강하는 정도도 측정할 수 있다. 국내의 한 병원은 기형으로 관찰되는 태아 중 약 23%가 심장기형을 나타내므로, 임신 18주부터 32주 사이에 초음파검사를 실시하도록 권장한다.
최근 미국에서는 초음파검사와 함께 산모 뱃속의 태아로부터 직접 심전도를 측정하는 방법이 확산되고 있다. 태아를 둘러싼 양막을 뚫고 태아머리 부위에 전극을 부착, 심장의 활동전류를 측정하는 것이다. 산달이 찬 산모는 병원에 입원해서 분만할 때까지 계속 태아의 상태를 관찰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물리적 상처나 병균감염 등으로 태아나 산모에게 위험을 주지 않을까. 이렇게까지 무리해서 태아 심음을 측정하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내장에서 나는 소리까지
미국에서 매년 사망하는 신생아 중 1천1백 명 이상이 산모가 분만할 때 자궁에서 가사(假死)와 질식 상태에 빠져 사망한다고 보고된다. 이런 상황이라면 직접적이고 지속적으로 심전도를 확인해 필요한 조치를 좀 더 정확하고 빨리 취해야 할 것이다. 미국의 한 통계에 따르면,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1980년 미국 신생아의 절반 정도가 이 방법을 거쳐 태어났다고 한다.
사람의 목소리도 건강정도를 알수 있는 지표다. 문영일씨(이대부속병원 이비인후과)는 "사람이 건강한지를 목소리로 어느 정도 구별할 수 있으며, 특히 발성기관과 관련된 질병은 90% 이상 진단할 수 있다"고 한다.
맑고 공명이 잘되며 음폭이 넓고 윤기가 있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건강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판단은 다소 피상적이며 객관성이 결여되기 쉽다.
이보다는 축농증을 비롯해 각종 비염 등 공명과 관계된 질환이나 성대 이상이 소리를 통해 진단될 수 있다. 일단 목소리의 이상을 느낀 의사는 소형 카메라가 달린 성대경(聲帶鏡)을 환자의 목에 투입한다. 이때 환자에게 높은 음의 '이' 소리나 '애' 소리를 내게 한다. 그러면 성대를 덮고 있는 후두개(喉頭蓋)가 위쪽으로 열려 탄력 있는 두 줄의 인대(靭帶)로 구성된 성대가 관찰된다.
컴퓨터에 장치된 스트로보스코프(stroboscope)는 녹화된 성대 움직임을 천천히 재생하거나 정지시킨다. 이때 관찰되는 성대모양의 이상 혹은 성대의 진동으로 질환을 알 수 있는 것. 가령 암인 경우성대 움직임이 전혀 없다.
이 방법을 이용해 성대에 세균성 자극성 염증이 생긴 경우, 성대마비나 신경성 음성쇠약증, 여성이 남성처럼 굵은 목소리를 내는 현상 등 많은 질환을 진단할 수 있다. 특히 음성을 직업적으로 A]용하는 성악가나 아나운서 등의 경우, 평소 자신의 정상적인 소리를 컴퓨터에 입력시킨 후, 정기적으로 혹은 이상이 있을 때 음성분석기를 통해 비교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태아의 심장 박동으로부터 성인의 목소리까지 현대 의학에서 청진은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차지한다. 좀더 시간이 흐르면 위 창자 등의 내장기관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소리'도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의학적으로 당장 응용될 수 없어도 인체내 '소리 사냥'은 현대 의학이 발견하지 못하는 새로운 현상을 밝혀내는데 기여할지 모른다.
한의학의 소리 진단, 진맥의 기본 원리
양의학에서 맥이란 심장 수축에 의한 혈관의 운동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의학에서 맥은 심장을 포함한 오장육부 전신의 상태를 파악하는 매개체다.
경락(經絡)에서 경은 피부 깊숙이, 락은 피부 표면에 위치한다. 이 중 박동을 나타내는 곳은 경이므로 맥은 경에서 이뤄진다. 즉 진맥이란 경맥을 눌러보는 것.
인체에는 12경맥이 있고, 각 경맥은 체내장기와 연관돼 있다. 옛날에는 인체 12경맥 모두에서 진맥했으나, 현재는 팔목만을 통해 맥을 짚는다. 박종배씨(경희한의대교수)에 따르면, 이 부위는 몸 전체 기혈(氣血) 순환을 가장 잘 나타내며, 폐의 활동이 활발히 시작되는 새벽 3-5시에 맥이 가장 정확하게 감지된다고 한다.
세손가락을 팔목에 대고 촌 관 척 등 3곳의 맥을 관찰하는데, 각각은 몸의 상부 중부 하부의 상태를 반영한다. 이때 3곳 중 맥이 강하거나 약한 한곳이 감지되면 그곳이 문제가 있는 지점이다.
여기서 강약의 기준은 무엇인가. 한의학의 척도는 '당사자'다. 따라서 강약은 당사자의 3가지 맥의 상대적 강도로 평가된다. 즉 '1분에 몇 회가 정상'이라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청진이 양의학의 기본이듯 진맥 역시 한의학 진단의 출발점이다.
용어설명
류머티즘열 : 몸의 조직이나 세포 사이를 메우는 결합조직에 염증이 발생하는 증상. 용혈성(溶血性) 연쇄상구균이 원인이다. 관절 심장 신경계 등에서 발생한다.
도플러효과 : 파원(波原)과 관측자 중 한쪽 혹은 양쪽 모두가 운동할 때 관측되는 진동수가 파원의 진동수와 다르게 변하는 현상. 예를 들어 사람이 피리 부는 곳으로 다가갈 때 피리음이 높게 들리다가 그 장소를 지나치면 음의 높이가 낮게 들리는 것. 1842년 오스트리아 물리학자 도플러가 별의 운동 방향과 색의 변화를 연구하던 중 처음 발견한 효과다. 태아의 심장처럼 움직이는 대상의 상태를 알기 위해서는 도플러효과를 고려해야 한다.
공명기관 : 사람의 목소리는 성대 자체보다 공명기관에서 울려 귀에 들린다. 따라서 공명기관의 모양과 크기가 중요하다. 가장 큰 구강을 비롯해 비강 인두강 등 머리 전체에 8개의 공명강이 있다. 이 공명강에 고름 같은 이물질이 차는 현상이 축농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