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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방사광가속기 지상공개

첨단과학의 신병기

신물질, 마이크로머신, 고집적반도체 등을 만드는 데 필수적인 방사광가속기가 완공됐다. 원리는 무엇이며 어떻게 이용되는 것일까.


(표1) 제3세대 방사광가속기 현황
 

우리가 사물을 볼 수 있는 것은 빛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빛이 있어도 볼 수 없는 것이 있다. 아주 미세한 물질, 세포나 금속의 원자 등은 아무리 빛이 밝아도 우리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왜 그럴까.

여기서 빛이란 가시광선을 말하는데, 이 빛의 파장이 길어 세포나 원자를 그냥 지나쳐 버리기 때문이다. 최소한 가시광선의 파장보다 물체가 커야 빛이 반사돼 우리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방법은 가시광선보다 파장이 짧은 빛을 미세 물체에 쪼이면 아무리 작은 물체라도 모습을 드러낸다(그림1). 이처럼 파장이 짧고 휘도(輝度)가 높은 빛, 즉 방사광(synchrotron radiation)을 인공적으로 만들어 첨단산업에 활용하는 기계가 바로 방사광가속기다.

우리나라도 본격적인 방사광가속기 시대가 열린다. 12월 초 문을 열게 될 포항방사광가속기는 세계적으로 다섯손가락 안에 꼽히는 최고 수준의 3세대형이다(표1). 포항공대의 20만평 부지에 1천4백98억원(정부 지원 6백억원)의 예산을 들여 건설한 이 시설은 91년 4월 착공된 이후 44개월만에 완공됐다. 길이 1백 50m의 선형가속기에서 전자를 빛의 속도에 가깝게 가속시켜 주저장링(원둘레 2백80m)에 넣어주면, 20억eV의 에너지를 가지는 전자가 회전을 하면서 접선 방향으로 강한 방사광을 내 뿜는다. 이 방사광이 바로 머리카락 굵기보다 작은 모터를 만드는 첨단산업의 신병기다.
 

(그림1) 광원의 파장과 관찰 가능한 물체들
 

애물단지가 보물단지로

일반적으로 가속기는 기초과학을 상징한다. 물리학자들은 물질의 궁극구조를 밝히기 위해 좀 더 높은 에너지를 가진 입자를 충돌시키기를 원했다. 그래야만 양성자를 깨뜨려 쿼크를, 전자를 깨뜨려 렙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충돌입자의 에너지를 높이기 위해서는 하전된 입자(양성자나 전자)를 가속시킬 수밖에 없다. 2차대전까지 입자의 속도를 높이는 방법으로 사이클로트론이라는 가속장치가 가장 인기였다. 사이클로트론이란 점점 반지름을 늘여가면서 나선형으로 입자를 회전시키는 것.

그러던 중 싱크로트론이라는 새로운 원형가속기가 고안됐는데, 이 장치는 등장하기도 전에 문제점부터 노출시켰다. 즉 가속된 입자가 전자석의 힘으로 꺾여 폐쇄된 원형커브를 돌 때마다 접선방향으로 강한 빛(방사광)을 방출하면서 에너지를 잃어버리는 점. 강한 충돌만이 유일한 목적이었던 입자물리학자들에게 에너지가 중간에 샌다는 것은 큰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모든 세상만사에는 이면이 존재하듯이 '걱정거리'는 곧 '새로운 용도'로 전환됐다. 쓸모없는 것으로 인식됐던 방사광이 응용물리학자들에게는 결정체나 분자 속의 원자 위치를 알아내는데 뛰어난 성능을 발휘하는 훌륭한 도구가 된 것이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가시광선으로 보지 못했던 미세물질은 가시광선보다 파장이 짧은 자외선이나 X선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자외선이나 X선을 발생하는 광원을 만들어 사용했으나 휘도가 떨어져 고심해왔다. 싱크로트론에서 발생하는 방사광은 이러한 걱정을 일거에 해결해 주었다.

빛의 휘도란 단위면적의 광원에서 단위시간 당 방출되는 광자의 개수. 휘도가 높다는 말은 빛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가 높다는 의미다. 또 빛이 퍼지지 않고 얼마만큼 집속력을 가지느냐는 분광휘도로 표현한다. 방사광은 바로 이 분광휘도가 엄청나게 높은 강한 빛이라고 할 수 있다.

1960년대 등장한 레이저는 바로 분광휘도가 뛰어난 강한 빛이다. 그러나 파장이 짧은 자외선이나 X선 부근에서는 아직 레이저를 만들 수 없다는 점이 상대적으로 방사광의 장점을 부각시켜준다. 이미 '물건너 간 스타워즈 계획의 핵심이 바로 X선레이저(자유전자레이저라고도 함)를 만들어 우주공간에서 미사일을 격퇴시키겠다는 것이다. 또 하나 방사광의 장점은 레이저처럼 단색광(파장 영역이 일정 부위에 한정돼 있음)이 아니라 가시광선에서 자외선 X선 영역에 걸쳐 널려 있으므로 필요한 빛을 임의로 선택해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정한 암세포의 구조를 방사광을 이용해 알아보고자 했을 때 세포 크기에 따라 적절하게 빛을 선택할 수 있다는 뜻이다.

선형가속기와 주저장링

포항방사광가속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그림2). 하나는 전자를 가속시켜주는 선형가속기이고, 다른 하나는 빛의 속도로 가속된 전자를 폐쇄된 원형 루프 안에 가두고 계속 돌리는 저장링이다. 원형 저장링에 접선방향으로 붙어서 방사광을 빼내는 관을 방사광관이라고 부른다.

선형가속기의 출발점은 전자총이다. 텅스텐 튜브에서 가열된 전자가 튀어나오면서 1백50m 경주의 스타트가 시작된다. 전자는 직선으로 달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파도타기를 하듯이 관 주위를 돌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물론 전자는 하나씩이 아니라 전자빔이 일정량 뭉쳐져 있는 다발형태(bunch)로 도파관을 돌파한다.

처음부터 전자는 높은 속도, 높은 에너지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선형가속기 구간 동안 11개의 고주파발생기(클라이스트론)에서 마이크로파를 공급해 전자다발의 속도를 증가시킨다. 선형가속기의 끝부분에서는 빛의 속도(초속 30만㎞)의 99.999997%까지 가속된다. 이를 에너지로 표현하면 20억eV. 우리가 늘상 사용하는 1.5V 건전지 14억개를 직렬로 연결시켜 얻을 수 있는 에너지다. 전자볼트(eV)란 하나의 전자가 1V의 전위차에서 얻을 수 있는 에너지를 말한다.

저장링에 공급되는 전자는 선형가속기가 하루에 1시간만 가동되면 충분하므로 선형가속기 중간중간에 고집적 반도체 제조나 의학연구, 기타 기초과학연구에 활용하기 위한 별도의 범라인을 설치할 계획도 갖고 있다.

저장링에 들어간 전자는 1초에 1백만번씩 링을 회전한다. 이 전자가 오래 살기 위해서는 저장링 안이 초진공 상태여야 한다. 약간의 불순물이라도 있다면 전자가 뺑뺑이를 도는데 장애가 될 수밖에 없다. 포항방사광가속기의 진공도는 압력이 ${10}^{-11}$에서 ${10}^{-9}$토르(terr)로 거의 완벽한 수준. 이런 초진공 상태라고 하더라도 회전 전자 다발의 에너지는 방사광이 방출되면서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를 보충하기 위해서 고주파발생장치가 저장링 안쪽에 자리잡고 있다.

저장링의 핵심은 방사광관. 이곳에서 방사광을 빼내 신물질도 제조하고 바이러스나 효소의 메커니즘을 규명하기도 한다. 저장링에 설치돼 있는 전자석은 전자의 방향을 10도씩 36군데서 꺾어준다. 이때마다 방사광이 방출되므로 36군데서 방사광을 쓸 수 있다. 보통 한군데에 두개의 방사광관을 건설할 수 있으므로 이론적으로는 72개까지 방사광관을 설치할 수 있다. 포항방사광가속기에는 현재 2개의 방사광관이 완성돼 있는데, 매년 2,3개씩 신설해 최대로 60여개까지 방사광관을 늘릴 예정이다.

"방사광관 하나를 건설하는 데 20억원 가량이 드는데다, 방사광관은 사용자의 요구에 따라 조금씩 설계가 달라지므로 사용자 그룹이 형성되는 상황을 보아가면서 설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저장링 빔라인 실장인 이기봉박사의 설명이다. 국내에 방사광 가속기 사용자 그룹이 늘어(현재는 1백50명 수준) 각 분야별로 신청이 쇄도하면 소재 연구용, 신약 등 신물질 제조용, 의학 연구용, 반도체 제조용 등 특정분야 전용 방사광관을 만들 예정.

저장링 주위에 설치되는 방사광관은 주로 어떤 방사광이 필요하느냐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진공자외선을 주로 빼내는 방사광관이 있는 반면에 연(軟)X선만을, 때로는 강(強)X선만을 빼내는 방사광관을 설치할 수 있다. 연구 대상이 어떤 물질이냐에 따라 선택이 이루어진다.

저장링을 살펴보면 주위에 수많은 전자석이 붙어 있는 걸 볼 수 있는데, 이 전자석이 바로 빛의 방향을 틀어주고(휨전자석) 전자빔이 흐트러지면 다시 집속시켜주며(4극전자석) 빔의 색수차와 상하좌우 진동을 교정해준다(6극전자석 등).

한편 전자석 이외도 언듈레이터나 위글러라 불리는 특수한 삽입장치가 붙어 있는데, 이는 전자범을 한번 요동시켜줌으로써 원하는 파장대에서 보다 강하고 집속력이 강한 방사광을 얻을 수 있는 장치다. 보통 삽입장치가 붙어 있으면 3세대 방사광가속기라고 부른다.
 

(그림2) 포 항방사광 가속기의 구조
 

등잔밑 밝혀줄 신광(新光)

앞으로 방사광이 어떻게 쓰여 질 것인가는 쉽게 짐작할 수 없다.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해주는 '새로운 빛'이니 방사광의 미래는 그야말로 신천지인 셈이다. 일반적으로 물리 화학 생물 의학 분야는 물론, 반도체 마이크로머신 등 첨단산업 분야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활용될 것이라고 예상된다.

방사광이 어떻게 이용되는지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물체에 방사광을 쪼였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아보자. 원자에 X선이 입사되면 일부는 그냥 지나가기도 하고 원자핵 외각을 돌고 있는 전자구름에 부딪혀 산란된다. 그러나 일정한 궤도를 돌고 있는 어느 전자보다 에너지가 큰 경우는 궤도 전자를 바깥쪽으로 쫓아버리기도 한다. 쫓겨난 전자를 광전자라고 부른다. 물론 이 때 입사된 X선의 광자에너지는 소멸된다. 궤도가 비게 되면 외각궤도에서 전자 하나가 천이를 일으키면서 내부로 들어오게 된다. 이 때 형광(螢光)방사가 일어나면서 외부로 그 물질 고유의 X선형광이 방출된다(그림3). 이 형광 X선은 물질의 구조해석과 화학결합 상태를 알아내는 좋은 단서가 된다. 산란될 때도 마찬가지로 물질의 내부구조 정보를 수집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방사광 X선은 시료에 포함돼 있는 원소가 아주 미량이라 할지라도 귀신같이 분석해낸다. 그 한계는 ${10}^{-15}$g. 실제로 새로운 물질을 만들었을 때 아주 작은 양밖에 얻어내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때 방사광가속기를 이용한다면 단시간 내에 정확한 실험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다.

초미량 원소가 얼마만큼 들어있는지를 살피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튀어나온 광전자를 이용해 내부의 원소들이 어떻게 분포하고 있는지, 화학결합은 어떻게 돼 있는지를 살필 수 있다. 예를들어 머리카락 단면을 X선 미세탐침방법으로 살피면 유황 구리 칼륨 아연 등이 어떻게 분포하고 있는지가 일목요연하게 드러난다. 머리카락 한올로 건강진단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한편 방사광은 고성능 X선 현미경을 가능케 한다. 가시광선을 이용한 광학현미경은 이미 1백년 전에 한계를 드러냈다. 2천5백Å 이하의 물체는 광학현미경으로 볼 수 없다. 당연히 파장이 짧은 X선 현미경이 등장했는데 X선을 내는 광원의 휘도가 너무 약해 발전속도가 더디었다.

이 틈새를 뚫고 현미경계를 장악한 것이 전자현미경. 이는 광학현미경보다 분해능이 뛰어나고(2-20Å) 곧바로 컴퓨터영상을 얻을 수 있어 급속히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곧 여러가지 단점을 드러냈다. 우선은 전지의 투과력이 약하기 때문에 시편을 얇게 쓸어야 하고, 진공 속에서만 시료를 관찰할 수 있기 때문에 건조 염색 등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한 마디로 자연 그대로의 생생한 모습을 관찰할 수 없는 것이다.

방사광의 등장은 일거에 X선현미경의 위치를 회복시켰다. 세포와 같은 생물 조직체에 전혀 손상을 가하지 않고도 자연 그대로의 고분해능 영상의 획득이 가능해진 것이다. 1㎜보다 작은 시료의 내부 입체영상을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고, 결정체의 결함과 왜곡상태를 탐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됐다.

1953년 왓슨과 크릭은 X선 회절을 이용해 DNA 이중나선구조를 밝혀 노벨상을 받았다. 회절이란 파동이 장애물에 의해 퍼지거나 가장자리 부근에서 휘어지는 현상. X선 회절을 이용하면 신물질의 구조 파악이 쉬워 약효에 대한 평가가 빨리 이루어지기 때문에 임상실험기간을 단축할 수 있다. AIDS의 병원체인 HIV 등의 구조 파악도 가능하다. 더 나아가서는 특정 병원체에 대해 효능이 뛰어난 성분의 구조 파악이 용이해져 이들 물질의 합성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 미리 개발할 신약의 구조파악이 이루어진다면 시행착오를 거치지 않기 때문에 10년 이상씩 걸리는 기간을 2,3년 내로 단축할 수 있다.

기존 광원에서 나오는 X선과 방사광에서 나오는 X선은 회절을 이용한 분석에서도 많은 차이가 있다.

방사광은 빛이 워낙 세, 회절 최대강도치를 측정할 수 있으며 강도분포까지도 조절이 가능하기 때문에 시료 구조를 결정하는데 임의성을 최소화 할 수 있다. 최근 고온초전도체 재료로 부각되고 있는 여러 화합물과 ${C}_{60}$의 구조분석은 바로 방사광을 이용한 분말회절법으로 이루어졌다.

선진국의 방사광가속기는 흑연이 고온 고압에서 다이아몬드로 바뀌는 과정을 규명하기 시작했다. 또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10만여개의 거대분자 단백질의 구조와 배열을 밝히는데 앞장서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노벨상에 가장 가까이 있다는 버클리대학의 김성호 박사는 LBL방사광가속기를 이용해 대장암과 췌장암을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진 라스단백질의 입체구조를 밝혔다.
 

(그림3) 방사광에 물체를 쪼였을 때
 

반도체, 기가 시대를 연다

올해 우리나라는 세계 최초로 2백 56MD램을 개발해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고집적반도체는 회로폭이 0.25μ 수준. 이처럼 미세한 회로를 실리콘 웨이퍼에 식각하는데 쓰인 빛은 자외선이었다. 그러나 회로폭이 0.3μ 이하로 내려가면 여러가지 문제점이 노출된다. 따라서 집속력 강한 연X선이 요구되는데 이는 방사광가속기가 아니면 제공할 수 없다.

반도체분야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일본에서는 이미 COSY(Compact Synchrotron)라 불리는 소형방사광가속기를 만들어 고집적반도체 제조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앞으로 회로 폭이 0.1μ 이하가 될 1GD램은 방사광 X선이 아니면 제조가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깨알보다 작은 미세로봇들이 환자의 몸속에 들어가 혈관 속에 쌓인 콜레스테롤을 긁어내고, 외부에서 판단하기 힘든 병을 진단해내는 이야기는 더 이상 공상과학이 아니다. 마이크로머신. 이는 단순히 크기가 작은 기계라는 뜻은 아니다. 기존의 기계처럼 부품 하나하나를 만들어 조립하는 것이 아니라 수백 수천개나 되는 미세기기를 동시에 제작하는 새로운 개념의 기기이다. 당연히 마이코로머신의 제작도구는 방사광 X선일 수밖에 없다. 톱니바퀴 하나의 높이가 머리카락 굵기의 반밖에 되지 않는 50미크론. 마이크로모터를 장착한 마이크로머신이야말로 인체기행이 자유자재로 가능한 미래의 '혈관의사'다.

심장 근육에 영양분과 산소를 공급해주는 관상동맥에 이상이 생기면 심근경색 협심증 등 여러가지 질병이 생긴다. 따라서 관상동맥의 사진을 찍는 앤지오그래피는 의학분야에서 중요한 기술의 하나다. 보통은 조영제인 요오드를 혈관으로 주사하여 X선 사진을 찍는데, 환자에게 심한 고통을 주고 환자 몸에 상당한 해를 끼친다. 그러나 방사광 X선을 이용하면 조영제를 조금만 집어넣어도 콘트라스트가 좋은 사진을 얻을 수 있어 의학계에서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세계의 유명 방사광가속기

가장 최근에 완성된 최고(3세대) 최대 규모의 방사광가속기는 유럽의 ESRF다. 프랑스 그레노블에 위치한 60억eV 규모의 ESRF는 유럽 12개국이 건설 및 운영비를 공동으로 분담 운영하고 있다. 준공된 것이 작년 9월 이후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업적은 나오지 않았으나 현재 23개의 빔라인 설치계획이 확정될 정도로 진전이 빠르다. 미국이나 일본에 의해 무참히 짓밟힌 유럽의 자존심을 살려줄 명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미국은 다양한 형태의 방사광가속기를 여러대 보유하고 있다. 1세대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스탠퍼드의 SSRL(30억eV)이 15년 이상 운영경험을 확보하고 있고, 2세대로는 브룩해븐국립연구소가 보유하고 있는 NSLS(25억eV)가 있다. 82년부터 가동된 NSLS는 진공자외선 영역과 X선 영역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방사광가속기 명문의 위치를 굳히고 있다. 브룩해븐국립연구소가 재료과학의 메카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것은 바로 NSLS 때문. 현재 4백개 기관 2천5백명이 넘는 이용자가 60여개의 범라인에서 실험에 열중하고 있다. 3세대로는 작년에 문을 연 로렌스버클리연구소의 ALS(15억eV)가 있고, 70억eV짜리 APS(아르곤국립연구소 소속)는 내년에 문을 열 예정이다. 이밖에도 IBM 등 일부 기업에서 소형 방사광 가속기를 갖추고 있다.

일본은 미국 못지 않은 방사광가속기 보유국가. 이중에서 군계일학은 문부성 산하 고에너지물리연구소의 포톤팩토리. 81년부터 가동되기 시작한 포톤팩토리는 92년까지 50개 이상의 연구용 및 산업용 빔라인을 설치하고 다방면에서 성과를 내고 있다. 또한 일본은 과학기술처가 주도해 3세대용으로 80억e짜리 스프링8을 건설하고 있다. 완공연도는 98년. 이밖에도 도쿄대학 규슈대학 도호쿠대학 등 일부 대학과 연구소 기업 등에서 10여대 이상의 방사광가속기를 보유하고 있고 건설 중인 것만도 6개나 된다.

대만과 이탈리아는 포항방사광가속기보다는 약간 규모가 떨어지는 3세대를 작년에 완공한 바 있다. 중국 고능물리연구소는 1세대이긴 하지만 20억eV 규모의 방사광가속기를 보유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방사광가속기 보유국가는 16개국(건설 중인 것 포함)이다.

'과연'이 '현실'로

80년대 후반 처음 방사광가속기 건설이 논의될 때 버클리대학의 김성호박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고 한다. 김성호박사의 라스단백질 규명은 방사광가속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 그만큼 방사광가속기의 필요성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고개를 가로 저은 이유는 우리나라에서 과연 가속기가 가능하겠느냐는 의미였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김성호박사만큼 포항방사광가속기(PLS, Phohang Light Sourse)에 대해 열광하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PLS는 최첨단과학시설이다. PLS의 완공으로 이 분야에서 황무지나 다름없던 우리나라에서 미국 일본 등 일류국가와 대등한 시설을 갖추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미국 브룩해븐국립연구소의 15억eV짜리를 그대로 복사하려 했으나, 기왕에 시작하려면 독자적인 모델을 건설해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져 방향이 급선회됐다.

설계도 우리 손으로 이루어지고 많은 부품의 국산화를 이룩했다. 특히 가속기 건설과정에서 확보한 초고진공기술, 고주파 관련 기술, 초정밀가공기술, 초정밀전자석 등은 반도체 제조라든가 통신산업 , 자기부상열차 개발 등에 당장이라도 활용 가능한 것들이다.

포항방사광가속기의 성패는 앞으로 이용자들이 이 시설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포항가속기연구소측에서는 그동안 이용자 그룹의 확보를 위해 수차례에 걸쳐 워크샵을 개최했고 일부는 유학을 보내서 교육시켰다고 밝혔다. 그 결과 현재 1백50명 정도의 이용자 그룹이 형성돼 있으며 2000년까지 7백명을 확보할 예정이다. 그러나 이는 시설 용량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숫자.

이에 대해 포항가속기연구소 최연상 부소장은 "방사광가속기는 가전제품이나 여타의 실험기기와 다르다. 완성품을 들여와 사용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다 활용할지부터 고민해야 된다. 따라서 처음 사용하는 사람들은 루틴화된 작업에 활용하는 것에 그칠 것이고, 좀더 창의적인 일에 활용하는 사람들은 지금 한창 학업에 전념하고 있는 학생들일 것이다"고 말했다. 본격적인 성과를 내려면 시간이 걸린다는 뜻.

앞으로 PLS 운영비(연간 1백 50억원)를 정부에서 전액 제공하느냐, 포항공대에서 일부를 부담하느냐는 문제도 아직 결말을 보지 못하고 있다. 현재 가속기연구소측에서는 "PLS는 국가적인 시설이고, 정부가 기초과학에 대한 지원을 해야 하는 입장이므로 외국의 예처럼 운영비는 전적으로 정부가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PLS 선형가속기개발단 운전실장인 고인수 박사는 "경험이 전무한 상태에서 이만한 결과를 냈으므로 이 연구개발 경험과 실적을 최대로 살릴 수 있는 2차 가속기 사업이 이어졌으면 한다"며 "최근 암치료용이나 핵폐기물처리용으로 각광받고 있는 양성자 가속기 개발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포항방사광가속기는 우리의 과학기술역사에서 기초과학에 대한 최초의 '투자다운 투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학기술입국을 부르짖으면서도 10년, 아니 5년 앞을 내다보는 투자를 할 생각이 없었다. 자신의 임기내에서 당장 성과를 낼 수 있는 것만 좇아서 허둥댔다. 그러니 '과학'은 없고 '경제'만 있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 정도가 됐다. 앞으로 국제 사회 경쟁에서의 경쟁은, 수십년 앞을 내다보는 안목이 있으면 살아남기 어렵다는 사실을 심각히 받아들여야 한다. PLS완공으로 모처럼 조성된 기초과학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 방사광가속기 이용률을 최대한 올리고, 한편으로 2,3의 새로운 기초과학프로젝트를 준비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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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김두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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