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입자 50만명을 헤아리는 PC통신 인구.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한 우리의 PC통신은 인터네트의 상용 서비스로 새로운 도약기를 맞고 있다. 지금에 이르기까지에는 불모지에 밭을 일구려는 모험가들의 험난한 수고가 있었으니···. 국내 PC통신의 씨앗 '엠팔' 회원이 말하는 통신 초창기 '그때를 아십니까'.
94년 6월 현재 우리나라에 보급된 개인용 컴퓨터가 4백만대를 넘어섰고 그 중 모뎀을 가지고 있는 비율이 20%에 이른다는 보도가 있었다. 컴퓨터 통신의 선진국인 미국에서도 모뎀 장착률이 30%를 넘지 못하고 있고, 일본만 해도 우리와 비슷한 수치를 보일 뿐이다. 이들 나라에 비해 여러 분야에서 뒤지고 있는 우리가 적어도 컴퓨터 통신 분야 만큼은 선진국 수준에 올라와 있다는 얘기다. 컴퓨터 통신 초창기부터 깊숙이 관여해왔던 필자에게는 이런 통계를 보면서 지난 7~8년 동안 컴퓨터 통신 보급에 앞장서 왔던 얼굴들이 떠오른다.
이 글이 실린 '과학동아'의 로고를 디자인한 홍익대의 안상수 교수, 이 글을 쓰는 워드프로세서인 아래아 한글을 만든 '한글과 컴퓨터'의 박순백 이사, 뚱보강사 이기성 교수…. 이런 사람들이 초창기 컴퓨터 통신에 미쳐 30대 후반에 직업을 바꾼 사람들이다.
컴퓨터 통신의 초기 역사를 이야기하다 보면 엠팔이라는 단어를 만나본 적이 있을 것이다. 무슨 기술용어 같기도 하고 정보통신 서비스 이름 같기도 하다.
엠팔이라는 것은 Electronic Mail PAL의 약자로, '전자우편으로 사귄 친구들'이라는 뜻이다.
간첩 접선하듯 첫 대면
엠팔은 지난 88년 5월 우연히 만들어진 컴퓨터 통신 동호회의 이름이다. 87년 4월 (주)데이콤은 h-mail이라는 전자우편 서비스를 상용화했지만 당시는 전국에 보급된 16비트 이상의 개인용 컴퓨터가 5천대를 간신히 넘어서 있었고, h-mail 가입자가 채 1백명도 되지 않았던 때였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지만 3백bps 모뎀과 애플II를 가지고 h-mail에 접속하던 사람도 있었다.
h-mail을 업무에 적용하려고 해도 가입한 사람이 워낙 적어서 비즈니스 용도로는 사용이 불가능했다. 따라서 당시 h-mail에 가입하고 있던 사람들은 편지를 주고 받으려 해도 보내고 받을 데가 없어 몇 안되는 가입자들끼리 개인적인 내용을 주고 받는 것이 고작이었다.
88년 5월 박순백 교수(당시 경희대)가 가깝게 지내던 몇몇 가입자들에게 홍익대 앞에 '전자카페'가 새로 생긴다고 하니 그곳에 가 보기도 할 겸 서로 얼굴이나 한번 보자는 내용의 전자우편을 보내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서로 얼굴을 알고 지내던 가입자들은 거의 없었다. 단지 온라인으로 편지를 주고 받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는 사람이고 나이는 얼마나 되었는지 본인이 밝히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홍익대 앞의 전자카페에 십여명의 사람이 모였지만 서로를 알아볼 수 없었다. 간첩 접선하듯 겨우 만나 맥주 한잔씩을 하며 처음으로 눈인사를 나누었다. 온라인 하는 사람들은 이런 모임을 아이볼 미팅(eyeball meeting)이라고 부른다. 눈을 마주 친다는 뜻이다.
"tg032 박성현입니다."
"아! tg032가 바로 선생님이셨군요."
".결혼 날짜를 잡으셨다구요."
이름보다도 가입자 아이디(Id)로 이야기 해야 바로 알아보는 동네가 바로 그곳이었다. 그 자리에서 엠팔이 탄생했다. 앞으로는 모임도 자주 갖고, 정보 문화의 확산을 위해 노력해 보자는 취지로 동호회를 결성한 것이다. 초대 회장으로는 당시 박순백 교수가 선출됐다. 초창기의 멤버들을 보면 박순백(한글과 컴퓨터 이사) 이기성(동국대 정보산업대학원 교수) 장석원(ABC시스템 대표) 이호식(한국컴퓨터 기술부장) 한규면(마이크로네트 실장) 염진섭(삼창제지 이사) 유경희(전 산업표준원장) 안상수(홍익대 교수) 탁연상(마이크로북 대표) 박성현(영진출판사 실장) 필자 등 십여명이었다.
그리고 이 모임이 알려지자 이찬진(한글과 컴퓨터 대표) 안대혁(한시스템 대표) 전영욱(바람시스템 기술이사) 김성수(전 한메시스템 대표) 김택진(현대전자) 정재훈(영진출판사) 이주희(한글과 컴퓨터 개발팀장) 황건순(수퍼세션 개발자) 유승룡(의사, 메디콤 개발자) 등 쟁쟁한 프로그래머들이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됐다.
초창기 엠팔의 활동은 크게 두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컴퓨터 통신의 확산을 위해 컴퓨터 전문 잡지에 많은 기고를 하는 것이었다. 88년 무렵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컴퓨터 통신 분야에 대해 상당히 많은 정보를 공개했다. 특히 박순백 이사와 이기성 교수의 정력적인 활동으로 컴퓨터 통신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게 됐다.
두번째는 통신용 프로그램의 개발 보급이었다. 당시의 워낙 시원치 않은 PC통신 에뮬레이터에 반기를 든다는 의미에서 '엠팔의 반란(Revolt of Empal)'이라는 통신용 프로그램을 개발, 88년 8월초에 공개 소프트웨어로 보급하기 시작했다.
이 프로그램은 첫 화면에 "이 프로그램은 공개 소프트웨어이므로 자유롭게 복사하여도 됩니다. 다만 영리를 목적으로 사용하면 안됩니다."라는 기묘한 메시지가 나타나게끔 돼 있어서 소프트웨어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던 상황에서 공개 소프트웨어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엠팔의 반란 뿐만 아니라 전영욱이 개발한 '메아리', 유승룡이 개발한 '메디콤'을 '89년 초부터 공개 소프트웨어로 보급했다. 엠팔의 반란은 (주)데이콤의 h-mail 공식 에뮬레이터였고 메디콤은 하이텔(당시 명칭은 ketel)의 공식 에뮬레이터였다. 이 흐름은 계속 이어져서 서강대에서 개발된 '인토크', 경북대에서 개발된 '이야기'도 계속 공개 소프트웨어로 배포됐다.
그 결과 우리의 통신 소프트웨어는 이제 세계적인 수준에 올라있어 아무리 개방 물결이 거세게 밀어닥쳐도 통신 소프트웨어 분야 만큼은 미국의 유명 소프트웨어 회사 조차도 시장 접근을 포기했다고 한다.
88년 10월 소위 '커밋 사건'이란 게 벌어졌다. h-mail은 전자우편 서비스라서 파일을 전송할 수 없었지만 (주)데이콤은 유닉스(UNIX) 운영체제를 이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닉스에 포함돼 있던 커밋(kermit)이라는 프로그램을 이용해 사용자들이 데이콤 모르게 파일을 전송하고 있었다. 이를 알아낸 데이콤은 보안상 문제점을 이유로 아무런 경고조치 없이 커밋 프로그램을 삭제해 버린 것이다.
드디어 BBS의 문을 열다
사용자들은 아우성을 쳐댔고 2주일 후 커밋은 되살아났지만 사용자들의 데이콤에 대한 신뢰는 그렇지 못했다. 엠팔은 긴급총회를 열고 커밋사건과 관련된 공식입장을 천명했다. 엠팔은 전자게시판(BBS:Bulletin Board System)을 개발해서 스스로 컴퓨터 통신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전자게시판이라는 것은 정보통신 서비스 사업자가 대형 컴퓨터를 이용해서 전자우편과 데이터베이스를 제공하는 것과는 달리 용량이 비교적 큰 개인용 컴퓨터를 이용해서 정보통신 사업자와 똑같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물론 전자게시판은 무료이다. 미국이나 일본에는 개인이 운영하는 수천개의 전자게시판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당시 염진섭 회원이 삼보컴퓨터 미국 지사에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전자게시판 운동에 대한 정보를 잘 알고 있었던 엠팔로서는 커밋사건에 자극받아 우리나라에서도 전자게시판이 시작돼야 할 시기가 왔다고 판단해 전자게시판 개발에 착수한 것이다.
필자를 주축으로 한규면 안대혁 정재훈 전영욱 등이 엠팔테크를 구성, 개발에 착수했다. 개발에 소요된 비용과 전화가입비는 엠팔회원들의 기부금으로 충당됐다. 그리고 개발을 시작한지 4개월만인 89년 5월 드디어 박순백 교수의 집 지하실에서 엠팔 BBS는 전화 8회선을 개통했다.
BBS 소프트웨어 개발도 어려운 일이었지만 가장 어려웠던 것은 우리나라 법체계의 문제점 때문이었다. 개통 후 2주일이 지나고 몇군데 신문에 보도가 되면서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지자 청량전화국에서는 불법 서비스라는 이유로 전화회선을 끊어버렸다 체신부에 진정서를 냈지만 '정보통신서비스 허가를 받지 않은 개인, 혹은 법인이 정보통신 서비스업을 영위할 수 없다'는 법조항을 들어 불허방침을 밝혔고 엠팔과 체신부 정보통신국 사이에 논쟁이 계속됐다.
만일 엠팔이 법적 제재(당시 법조항에 따르면 3년 이하의 징역, 혹은 5백만원 이하의 벌금)를 받게 되면 기소를 담당할 검사, 재판을 담당할 판사, 대법원, 변호를 담당할 변호사도 엠팔회원으로 있어서 회원 내부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것이 좋겠다는 농담을 주고 받기도 했다.
한편 이 사건이 다시 뉴스 거리가 돼 동아일보와 한겨레 신문 등 언론에 보도되었고 체신부에서는 2~3일 지나자 슬그머니 회선을 재개통시켜주어 엠팔 BBS는 무사히 운영될 수 있었다. 지금은 개인이 운영하는 BBS가 전국적으로 수백개에 이르는데, 그 당시 이러한 해프닝이 없었더라면 우리나라 정보통신 문화는 오갈 데 없을 뻔했다.
생활에 정착한 전자 우편
88년 11월 우리나라 컴퓨터 통신 분야에 획기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한국경제신문사와 한국통신이 손을 잡고 케텔(현재 이름은 하이텔)이라는 정보통신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하기 시작한 것이다. 초창기의 붐을 일으키기 위해 케텔은 1200bps 모뎀을 5백대 한정으로 무료로 제공했다. 신청만 하면 모뎀과 통신 에뮬레이터를 무료로 나눠주는 바람에 불과 몇 개월 사이에 수천명의 가입자가 몰려들었다.
정보통신의 선발 주자를 자임하던 (주)데이콤도 데이터베이스 서비스인 천리안과 전자우편 서비스인 h-mail을 통합해서 케텔의 공세에 대비하기 시작했고 이 서비스는 90년초에 PC-Serve라는 이름으로 서비스를 개시했다(후에 천리안으로 개칭).
컴퓨터 통신은 개인용 컴퓨터가 폭발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92년부터 본격적으로 활성화됐다. 현재는 약 50만명의 가입자가 하이텔, 천리안을 사용하고 있고 업무에 컴퓨터 통신을 사용하는 것도 일반화됐다. 사무실에서도 전자우편이 없다면 매일 매일을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우리 생활에 가까이 와 있다.
더욱이 한국통신에서는 세계적으로 1천5백만명 이상이 사용하고 있는 인터네트를 94년 8월부터 상용으로 서비스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컴퓨터 통신 분야에 또 한번의 획을 긋는 일이다. 이제 우리의 컴퓨터 통신 분야도 보급률뿐만 아니라 내용에 있어서도 세계적인 수준으로 발전할 것이다. 이미 정보가 다닐 '고속도로'는 모두 건설되었다. 이제는 그 위를 달릴 '자동차'를 만들어 내야 하는 단계에 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