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전자서비스의 방식을 둘러싸고 세계 각국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싸움이 한창이다. 그리고 그 싸움의 1차 승자는 디지털로 굳어지고 있다. 과연 디지털이란 무엇인가. 또 왜 디지털인가.
지난 2월 18일 일본 우정성의 에가와 아키마사(江天晃正) 행정국장은 신생당의 한 모임에 참석, "미국과 유럽이 이미 고선명 텔레비전(HDTV)의 표준을 디지털방식으로 결정했는데 일본만 아날로그방식을 고집한다면 국제적으로 새로운 불씨를 만들 우려가 있다"고 지적하고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디지털방식으로 전환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발언이 매스컴에 보도되자 일본 방송계와 가전업계는 즉각 '에가와 발언'을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일본 NHK방송은 91년부터 아날로그방식의 HDTV '하이비전'을 하루에 8시간씩 시험방송해왔다. 97년부터는 방송위성 BS-4에 의한 본격 방송이 시작된다.
일본 가전업체들은 68년 도코올림픽 이후 하이비전 수상기 개발에 수조엔을 투입했다. 처음에는 1천만엔이나 하던 수상기 가격이 작년에는 1백만엔까지 떨어졌다. 이제 막 HDTV산업에 서광이 보이는 시점에서 이제까지 노력을 모두 허사로 돌리고 '디지털방식을 새로 개발해야한다'니 반대가 없을 수 없었다.
에가와국장은 이러한 압력에 못이겨 이틀 후 "뜻이 와전됐다"며 자신의 발언을 취소했다. 그러나 우정성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일본은 '세계 최초'를 자랑하며 기세좋게 하이비전방송을 시작했지만 3년이 지난 지금 사면초가의 딱한 사정에 놓여 있다.
우왕좌왕하는 가전왕국 일본
일본은 당초 '세계 가전산업을 주도하는 일본이 먼저 아날로그방식의 HDTV를 시작하면 전세계가 일본을 따라올 것'이라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타도'를 외치며 칼을 갈아온 미국은 '처음부터 HDTV는 아날로그방식보다 한발 앞선 디지털방식으로 시작한다'고 공표하고 그동안 지리하게 진행되던 디지털규격안 작성을 지난 2월초에 마쳤다. 오는 96년 애틀랜타 올림픽방송에 디지털 HDTV의 첫 전파를 쏜다는 계획.
미국이 디지털방식을 결정하자 아날로그방식으로 기술개발을 해온 유럽공동체는 그동안 해온 작업을 포기하고 디지털로 돌아섰다. TV수상기에 관한 한 세계시장에 적지않은 비중을 차지해온 우리나라도 일찌감치 디지털 방식으로 입장을 정하고 수백건의 국제특허를 출원했다. 가전왕국 일본이 미래의 가전시장을 좌우할 HDTV분야에서 낡은 기술에 집착하다가 '2등국가'로 전락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우정성이 '디지털'을 들고나온 또다른 이유는 초고속정보통신망에서 찾을 수 있다. 클린턴정부 등장 이후 '미래의 사회간접자본'이란 차원에서 미국과 일본은 경쟁적으로 '정보고속도로'에 투자하고 있다. 정보고속도로란 현재의 전화선을 동축케이블에서 광케이블로 전부 교체해 단순히 음성정보 뿐아니라 문자 그림 영상 음악 등의 멀티미디어 정보를 수만배 고속으로 흘려보내자는 것이 골자다.
현재 정보고속도로에 흘릴 정보로 가장 매력적인 것이 HDTV방송이다. 그런데 일본이 아날로그방송을 고집한다면 디지털통신망에 HDTV는 제외된다. 이것은 미국과의 경쟁에 앞서 주요 메뉴를 하나 빼놓는 것과 마찬가지다.
HDTV에서 디지털과 아날로그는 어떻게 다른가. 먼저 디지털방식은 송신도중 전파간섭으로 인한 신호의 왜곡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즉 약간 데이터가 손상되더라도 수상기에서 교정을 통해 원래의 깨끗한 영상을 회복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둘째 디지털방식은 개별영상을 따로 분리하고 조작하는 멀티미디어 기능을 가질 수 있다. 가령 TV영상을 컴퓨터에 보관했다가 게임화면으로 이용하거나 화상을 마음대로 고칠 수 있다.
디지털이 불리한 점도 있다. HDTV 화면 하나를 디지털로 바꾸면 수십억비트나 되기 때문에 이대로 전송한다면 TV 채널 1백개분의 주파수를 잡아먹는다. 따라서 디지털 데이터를 압축 또는 복원하는 기술이 실용화의 전제가 된다. 현재 디지털 방식의 표준을 정하는데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데이터압축 기술이다. 또 방송장비 전송장비 수상기등의 가격이 비싸지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우정성의 일보후퇴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으로 일본도 디지털 HDTV를 채택할 것으로 보인다. 얼마 전 한·일체신장관회담을 위해 방한한 일본 우정성의 고위관리도 이 점을 인정했다. 그는 "당장은 아니지만 HDTV가 대중적으로 보급되는 2005년경에는 일본도 이미 디지털로 넘어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에가와를 성토한 일본 가전업체들도 실상은 아날로그방식과는 별도로 디지털기술개발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따라서 HDTV에서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싸움은 디지털쪽으로 이미 승부가 기울었다고 볼 수 있다.
디지털 혁명의 총아 CD
'아날로그'와 '디지털'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날로그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어떤 수치를 길이 각도 전류등의 연속된 물리량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쓰여있다. 아날로그는 '파'(波)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오르막과 내리막, 정점과 최저점을 잇는 곡선으로 모든 현상을 표현하는 것이 아날로그방식이다.
사람의 얼굴을 묘사할 때 아날로그방식은 카메라가 잡은 그 사람의 영상을 그대로 전파에 싣는다. 전축은 레코드판에 접촉한 바늘의 떨림을 파동으로 표현해 소리를 낸다. 인간의 눈에 보이는 풍경도 연속성이 있는 아날로그 영상이다.
디지털은 이에 비해 모든 정보를 0과 1의 2진법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전기는 1, (-)전기는 0으로 전파의 속도만큼 빨리 '00111010101010…'하는 식으로 정보를 전달한다.
디지털방식은 아날로그에서의 파를 잘게 짤라 무수히 많은 0과 1로 다시 정리한다. 콤팩트디스크(CD)의 경우 인간이 들을 수 있는 모든 주파수에 숫자를 매겨 이를 CD에 기록한 뒤 레이저로 이것을 읽어들여 소리를 재생한다.
디지털의 또다른 이름은 '컴퓨터'다. 즉 아날로그가 인간의 표현방법이라면 디지털은 컴퓨터만 알아듣는 세계다. 디지털로 표현되는 모든 정보를 인간의 표현방식인 아날로그로 바꾸기 위해서는 컴퓨터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전쟁'은 1946년 최초의 컴퓨터 에니악이 탄생하면서 시작됐지만 첫 포성이 울린 것은 80년대 들어와서다.
1982년 네덜란드 가전업체 필립스사는 콤팩트디스크를 선보였다. 지름 12㎝의 이 작은 원판에는 6백MB가 넘는 정보를 저장할 수 있었다. 이를 이용한 음악용 CD와 플레이어를 내놓은 것은 역시 일본 가전업체들이다.
이후 CD는 아날로그방식의 레코드판(LP)과 겨뤄 하나하나 성을 빼앗아간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92년을 넘기면서 CD는 판매량에서 LP를 능가했다. CD는 넓은 음폭과 깨끗한 음질로 보수적인 오디오팬들을 순식간에 사로잡았다. LP의 경우 사소한 실수로 판이 긁히거나 오래 사용하면 음질이 떨어지지만 CD는 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CD는 그 영역을 점차 넓히고 있다. CD-ROM은 1장에 백과사전을 거뜬히 집어넣을 정도로 저장용량이 커서 종이책을 대신할 '전자책'으로 불리고 있으며 멀티미디어시대의 가장 핵심적 도구로 지목되고 있다.
필립스사는 컴퓨터보다 TV가 더많이 보급된 것에 착안, 컴퓨터 대신에 TV화면을 이용해 멀티미디어를 즐기는 CD-I(interactive)쪽에 강한 집착을 보이고 있다.
요즘 각광받는 비디오 CD는 이보다 한발짝 더 발전한 것이다. CD-ROM이나 CD-I를 개발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므로 현재 필름이나 비디오에 영화들을 CD에 담아 빨리 소비자들에게 접근하자는 구상이다. 현재 기술로 CD 1장에 1시간 분량의 영화를 담을 수 있으므로 2-4장이면 영화 1편은 거뜬하게 들어간다. 음질이나 화질에서 CD는 비디오 테이프와 비교가 안된다.
조만간 비디오테이프 대신에 CD를 진열한 비디오가게가 나타날 것이다. CD에서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싸움은 '비디오CD 대 비디오테이프'로 옮겨가고 있다.
국내에서 벌어진 논쟁
국내에서는 지난해 두차례 아날로그와 디지털논쟁이 벌어졌다. 첫번째는 위성방송 전송방식 논쟁이다. 우리나라는 내년 6월쯤 최초로 우리 국적의 상업용 방송통신위성 '무궁화호'를 발사한다. 여기에는 위성방송용 안테나가 3개 설치된다. 이를 이용한 위성방송은 빠르면 내년 하반기부터 가능하다.
이 위성방송의 전송방식을 놓고 체신부는 디지털, 공보처와 방송사는 아날로그로 입장이 갈라져 힘겨루기를 벌였다. 공보처의 주장은 ▲위성방송이 궁극적으로 디지털화하는 것은 틀림없지만 현재 세계적으로 실용화되지 않은 디지털방식을 채택하기에는 위험부담이 크고 ▲위성방송 수신장비가 비싸져 보급에 차질이 생기며 ▲방송사의 시설투자가 너무 부담스럽다는 것이었다.
이에대해 체신부는 ▲디지털방식으로 하면 채널이 9개로 늘어나며 ▲어차피 디지털로 갈 바에는 중복투자를 피하고 먼저 기술을 개발해야 원천기술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디지털방식을 주장했다.
결국 칼자루를 쥔 체신부가 판정승를 거둬 디지털방식으로 결론이 났다. 그러나 방송사의 끈질긴 반대로 방송 송출장비는 아날로그 방식으로 하고 위성통신장비만 디지털로 결정하는 '비빔밥'식이 될 수밖에 없었다. 또 감정이 틀어진 체신부와 공보처는 정기국회에 '통신위성법'과 '방송위성법'을 제각기 올려 하나의 위성을 관리하는데 2개의 법안이 만들어지는 웃지 못할 사건이 벌어졌다.
방송사들은 겉으로 시청자들의 부담을 내세웠지만 채널이 늘어날 경우 새로운 위성방송국이 생겨 자신들의 기득권이 침해되는 것을 우려, 강력하게 반대한다는 인상을 짙게 풍겼다.
제2이동전화 사업자선정을 둘러싼 디지털 논쟁도 관심을 모았다. 지난 92년 노태우정부 말기에 이동전화 신규사업자로 대통령사돈인 최종현씨가 회장으로 있는 선경그룹이 선정됐다가 국민적 반발에 부딪히자 선경이 이를 반납, 이 문제는 지난해 체신부의 최대 숙제였다.
지난해 6월 윤동윤 체신부장관은 "가능한 빠른 시일내에 사업자를 재선정한다"는 당초의 방침을 철회하고 "제2사업자는 새로 개발되는 디지털방식으로 서비스를 시작하며 이를 위해 사업자선정을 연말까지 미룬다"고 발표했다. 당시 공직자재산공개 군숙청 등 김영삼대통령의 사정작업이 한창이었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집권초기에 대형이권사업을 피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아니냐는 분석도 제기됐다.
체신부가 채택한 CDMA(코드분할다중접속)방식의 디지털표준은 세계 어느나라도 실용화한 사례가 없고 표준으로 정한 나라도 우리나라가 처음이었다. 통신선진국 미국조차 지난해 7월 기존 표준방식인 TDMA(시분할다중접속)에 CDMA를 표준으로 추가하면서 한국의 표준채택을 참고할 정도였다.
체신부는 이에 대해 "디지털 기술개발이 예상했던 것보다 2, 3년 빨라져 처음부터 디지털로 가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고 이 경우 원천기술을 얻기가 훨씬 수월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동전화 통화량이 급증해 사업자의 조기선정이 불가피하다며 아날로그의 우수성을 주장하다가 1년만에 입장을 1백80도 바꾼 것에 대한 해명으로는 미흡했다.
TDMA방식은 기존 아날로그 주파수폭을 3등분해 세사람이 시간을 쪼개 교대로 통화를 하므로 아날로그보다 가입자를 3배 정도 수용할 수 있다. 이에 비해 CDMA방식은 통화자별로 코드를 부여해 수용능력이 아날로그의 10-20배나 되는 첨단이동통신방식이다. 미국 퀄컴사가 개발한 이 기술은 현재 한국전자통신연구소가 삼성 금성 현대 대우등 통신 4사와 함께 공동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아무튼 지난 2월 한국이동통신은 선경그룹, 제 2사업자는 포철-코오롱의 단일컨소시엄으로 이동전화사업자 진용을 확정한 체신부는 내년말까지 CDMA 디지털 이동전화 기술개발을 끝내고 상용서비스까지 해야 하는 절대절명의 과제를 안고있다.
아날로그도 할 일 많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전쟁은 도처에서 디지털이 승승장구하고 있다. '낡은 기술'로 낙인찍힌 아날로그는 이제 일어날 가망이 없는 것일까.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시각도 일부 존재한다.
퍼지이론이 그 한 예다. 퍼지(fuzzy)란 '애매하다'는 뜻으로 0과 1로 단정할 수 없는 애매한 개념을 다룬다. 즉 0과 1 사이에 0.5 나 0.36도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가령 컴퓨터에게 '키가 1백75㎝ 이상이면 큰 것이다'라고 입력해두면 키가 1백 76㎝든 2m든 똑같이 '크다'고만 판단한다. 그러나 1백76㎝와 2m는 머리 하나 차이날 정도로 격차가 있다. 0과 1밖에 모르는 컴퓨터는 이러한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다.
퍼지이론은 이러한 것을 판단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퍼지이론을 어떻게 보면 아날로그적인 개념과 가깝다. 물론 퍼지이론을 디지털을 더 세분화한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단순히 마이크로컴퓨터를 많이 연결한다고 퍼지적인 판단이 잘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또하나 인간이 받아들이는 정보는 모두 아날로그정보라는 주장이 있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입으로 맛보는 것은 모두 연속성이 있는 아날로그정보다. 두뇌의 사고기능이 디지털인지 아날로그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디지털통신망을 타고 온 전화도 인간에게 전달되려면 아날로그 음성으로 변해야 한다. 디지털위성방송도 TV수상기에서는 아날로그신호로 바뀌어야 시청자들이 알아본다. 디지털의 출발과 종착역은 아날로그다. 그렇다면 디지털은 영원히 아날로그에 승리를 거둘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