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DNA는 사라진 세계의 소식을 전달해주는 우편배달부다. 분자고고학은 옛 DNA를 통해 초기 인류의 기원이나 생활양식에 얽힌 궁금증을 풀어줄 것이다.
1993년의 노벨화학상은 미국의 케리 멀리스에게 돌아갔다. 1983년에 창안한 중합효소 연쇄반응(PCR)기술이 유전공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인정된 것이다. PCR은 유전물질, 즉 디옥시리보핵산(DNA)을 손쉽게 대량으로 만드는 기술이다. 멀리스박사는 생체에서 DNA가 합성되는 과정을 본떠서 PCR 방법을 개발해냈다.
DNA분자 증폭기술
유전자의 본체인 DNA분자는 두 개의 사슬이 나선모양으로 얽혀 있으며 네 종류의 염기를 갖고 있다. 염기는 특정의 상대와 결합하므로 한쪽 사슬의 염기배열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다른 쪽 사슬의 염기배열이 결정된다. 한쪽 사슬이 다른 쪽 사슬의 주형(鑄型)이 되는 셈이다. 따라서 DNA의 이중나선이 풀려 두 가닥의 사슬형태로 되면 각 사술을 주형으로 하여 새로운 DNA 사슬이 합성되므로 DNA 분자가 복제된다.
DNA 복제과정에서 새로 합성되는 사슬에 염기를 연결하는 것은 중합효소(polymerase)이다. 최초로 발견된 것은 1955년 미국의 아더 콘버그가 찾아낸 DNA 폴리머리제이다. 콘버그는 이 공로로 1959년 노벨상을 받았다.
PCR은 실험실에서 단시간에 아주 손쉽게 DNA를 합성하는 기술이다. 필요한 것은 시험관, DNA폴리머라제 등 서너가지의 간단한 시약, 열을 순환하는 장치뿐이다. 복제하게 될 DNA 조각 역시 특별한 조건이 없다. 순수한 것이건 아니면 극도로 복잡한 생물재료의 복합물이건 상관이 없다. 멀리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병원의 조직표본, 한 오라기의 사람 머리카락, 범죄현장에 말라붙어 있는 피 한방울, 미라의 뇌 조직, 빙하에 냉동된 4만년 전의 코끼리에서 나온 DNA"를 모두 복제해낼 수 있다.
PCR 공정은 두 단계로 진행된다. 먼저 DNA 조각과 DNA 폴리머라제 등이 뒤섞인 혼합물에 열을 가한다. 그러면 DNA 견본의 이중나선이 두 개의 사슬로 분리된다. 따라서 높은 온도에서 견디는 중합효소가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타크(taq)폴리머라제가 사용되는 까닭이다. 온천에 사는 타크 박테리아에서 정제해낸 DNA폴리머라제이다.
DNA분자가 분리된 다음에는 냉각을 시킨다. 그러면 혼합물에 섞여 있는 염기가 달라붙어 각 가닥에 대응하는 새로운 사슬이 합성된다. 요컨대 가열과 냉각이 순환되는 주기마다 합성되는 DNA분자의 수가 1, 2, 4, 8… 식으로 곱절씩 증폭된다. 따라서 한 개의 아주 작은 DNA 견본으로 몇 시간 내에 1천억개 이상의 DNA분자를 복제할 수 있다.
분자 고고학의 성립
PCR 기술로 특정 유전자의 대량복제가 수월해짐에 따라 그 응용분야가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다. 예컨대 의료 분야에서는 배양검사를 PCR기술로 바꿔가고 있다. 정확성이 높고 시간이 단축되기 때문이다. 폐결핵의 경우 병원균의 유무를 확인할 수 있는 견본을 얻는데 있어 배양검사로는 4~6주가 소요되지만 PCR로는 하루가 채 안걸린다.
또한 PCR은 군사용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1993년에 미국 국방부는 반도체 칩으로 명함 크기의 PCR 장치를 개발하는 연구에 착수했다. PCR 장치의 휴대가 가능해지면 전쟁터에서 세균전에 살포되는 미생물을 검출하거나 사상자의 신원을 확인하는 일에 사용될 것으로 예상된다.
PCR 기술의 출현으로 가장 덕을 본 분야는 아무래도 분자고고학이다. 지난 10년간 일부 분자생물학자들은 오래 전에 죽은 동식물의 잔존물로부터 영원히 상실된 것으로 여겨진 유전정보를 찾아내서 생물진화의 수수께끼를 밝히는 연구에 몰두했다. 이와 같이 옛날 생물의 DNA분자를 자연의 타임캡슐로 간주하는 신생과학이 분자고고학이다. 장차 발굴될 것을 예상하여 그 시대를 대표하는 기물이나 기록을 넣어서 묻는 그릇이 타임캡슐이다.
분자고고학의 선구자는 1991년에 작고한 미국의 앨런 윌슨이다. DNA가 유기체 사후에도 살아남을 수 있음을 처음으로 입증한 인물이다. 그가 이끄는 캘리포니아대 연구팀은 1984년에 콰거의 피부에서 DNA를 복원해냈다. 멸종된 생물에서 찾아낸 최초의 DNA분자이다. 콰거는 얼룩말 비슷한 동물로서 남부 아프리카에서 1백40년 전에 멸종되었다.
1년 뒤인 1985년에는 스웨덴 태생(1955년)으로 독일 뮌헨대 교수인 스반테 파보가 4천4백년 전에 생존했던 이집트의 미라에서 DNA를 추출해내는 개가를 올렸다. 박물관에 소장된 미라는 대부분 조직이 극도로 손상되었지만 예외가 있었다. 손가락이나 발가락의 피부는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었던 것이다. 파보가 미라의 피부로부터 DNA를 찾아냄에 따라 분자고고학의 가능성이 재확인되었다.
그러나 옛 DNA 연구는 한계가 있었다. 옛 DNA 조각의 대량복제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반복실험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준 것이 PCR 기술이다. 1988년 파보는 옛 DNA 복제에 PCR을 적용한 최초의 학자가 되었다. 그는 죽은 사람의 뇌에서 DNA를 대량으로 복제해냈다. 이듬해인 1989년에는 마침내 영국 옥스포드대의 브라이언 시키즈가 처음으로 옛날 사람의 뼈다귀로부터 DNA를 대량복제했다. 오로지 피부조직에 의존하던 연구가 뼈로 옮겨가는 계기가 되었다. PCR이 옛 DNA 연구의 가능성을 열어줌에 따라 분자고고학이 비로소 독립된 학문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윈도버인과 아이스맨
분자고고학에서는 옛DNA를 찾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집트의 미라처럼 바싹 마른 피부에는 DNA가 보존되어 있지만 토탄 늪에서 가끔 발견되는 간물에 전 몸뚱이는 대부분 DNA가 파괴되어 있다. 예컨대 덴마크와 영국의 토탄 덩어리에 묻혀있던 사체는 놀랍게도 모가지의 깊은 상처, 몸통의 문신, 창자 안의 음식, 심지어는 눈초리 주름까지 그대로 보존되어 있지만 DNA는 찾아볼 수 없다. 늪속의 타닌산 때문에 역시 산인 DNA가 손상된 것이다.
덴마크의 사체는 철기시대에 제물로 바쳐진 희생자로 판명되었으며, 1984년에 발 한개가 드러난 영국의 사체는 서기 50년 경에 끔찍하게 살해된 뒤 더러운 물에 내던져진 약 33살짜리 사내로 추정된다. 토탄 늪(Peat Moss)이라 명명된 이 사내는 1990년에 상체까지 출토 되었는데, 도끼로 정수리를 내리쳐 죽였기 때문에 그 타격의 힘으로 어금니가 으깨진 것으로 짐작된다. 하체 등 몸의 일부는 주변의 토탄과 함께 잘려서 땔감으로 팔린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뜻밖에도 토탄 수렁의 사체에서 DNA가 발견되어 학자들을 흥분시켰다. 1991년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의 글렌 도란이 윈도버인(Windover man)의 뇌로부터 DNA 단편을 추출해낸 것이다. 도란 교수는 윈도버지방의 도탄 연못을 발굴하여 1피트 두께의 지층에서 1백 77개의 뼈대와 91개의 두개골을 출토하고 60개 가량의 해골은 그대로 묻어 두었다. 지층이 1천년간의 퇴적물이기 때문에 가장 오래된 것은 8천년 전, 가장 새로운 것은 7천년 전의 인디언 미라로 추정된다. 이 중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는 DNA 단편이 확인된 것은 7천5백년 전의 윈도버인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사람의 DNA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DNA가 토탄늪에서 훼손되지 않은 까닭은 타닌산을 중화시키는 석회석이 연못에 똑똑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1991년에는 윈도버인 못지 않게 색다른 미라가 발견되어 학계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그 해 여름 이상 고온으로 남부알프스산맥의 빙하가 녹으면서 동결 건조된 시체가 얼음 속에서 튀어나왔다. 아이스맨(Iceman)이라 불리는 30대 초반의 남자이다. 근처에서는 활과 화살통, 구리도끼, 칼 등 다양한 연장이 함께 나왔다. 약 5천3백년 전 석기시대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이스맨은 상처가 전혀 없고 뼈나 기관 역시 모두 제자리에 있었다. 단지 사슴가죽 옷을 발가벗기는 과정에서 바지와 함께 잡아뜯겨 생식기가 분실되었을 따름이다. 고기를 포함하여 충분한 먹거리를 지니고 있었다. 예컨대 9월에 익는 플럼(서양자두)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보아 질병 또는 굶주림으로 죽거나 피살된 것은 아닌 듯싶다. 사냥중에 피곤하여 잠이 들었다가 추위 때문에 얼어죽은 것으로 유추된다.
사체는 찬바람은 건조되어 미라가 된 다음에 눈덩이에 파묻혀 동결되었기 때문에 온전하게 보존된 것이다. 동결 건조된 해골은 타닌산의 공격을 받지 않아서 사람의 DNA 뿐만 아니라 그의 조직에서 발견된 박테리아 또는 기생충의 DNA까지 뽑아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아이스맨이 나타난 장소가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의 국경선 언저리이기 때문에 소유권을 놓고 두 나라가 벌인 입씨름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멸종생물의 옛DNA
옛DNA는 사람뿐만 아니라 멸종된 동물로부터 속속 발견되었다. 콰거를 비롯해서 사일러사인, 공조(恐鳥), 매머드의 유해로부터 의미있는 유전정보를 얻게된 것이다.
사일러사인은 80년전에 사멸된 태즈메이니아섬의 주머니늑대이다. 타조 비슷한 새로서 날지 못하는 공조는 뉴질랜드에 살았으며 4천3백년 전에 멸종되었다. 매머드는 시베리아의 영구동결대에서 냉동된 사체로 발견되었다. 4만년 전에 지구상에서 사라진 털많은 거상이다. 이와 같이 오래된 타임캡슐이 나타내게 되면서 옛DNA를 따라 소급할 수 있는 과거의 시점이 관심사가 되었다.
DNA는 물과 산소에 의하여 쉽사리 파괴된다. 물이 DNA로부터 염기를 씻어내는데는 5만년이 채 안걸린다. 산소 또한 DNA 파괴에 기여한다. 설령 물과 산소가 없는 상태일지라도 자연방사선이 모든 유전정보를 말소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몇년 사이에 진기한 옛DNA가 발견되었다.
사람의 경우 가장 오래된 DNA는 7천5백년 전 인디언의 것이었으나 이 기록이 이미 깨지고 있다. 미국 로스알라모스 국립연구소에서 네안데르탈인의 척추뼈로 DNA 복원을 시도하고 있다. 이라크에서 발견된 이 뼈조각은 5만년전의 것으로 추정된다. 멸종생물 역시 기록이 갱신되고 있다. 이미 1990년에 1천7백만년 전의 화석잎에서 DNA가 추출되었다. 미국 아이다호주에 있는 호수 밑바닥의 찰흙 안에 퇴적된 목련잎으로서 아직도 초록빛을 간직하고 있다.
호박과 바구미
더욱 놀라운 멸종생물의 DNA는 호박(琥珀)을 연구하는 고곤충학자들로부터 발표되었다. 호박은 주로 소나무나 전나무 같은 침엽수 껍질에서 나온 끈끈한 수지가 굳어서 된 화석이다. 1백50만년 된 것부터 3억년 전의 것까지 다양하다. 그 중에서 도미니카공화국이 호박이 가장 과학적 가치가 있다. 1백개 중 한개꼴로 각종 생물의 유해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나뭇잎이나 깃털은 물론이고 나방 사마귀 장수말벌 같은 곤충에서부터 지네 개구리 전갈 도마뱀에 이르기까지 각종 생물이 갇혀 있다. 호박 내부는 물과 산소로부터 격리되어 있으므로 DNA의 완벽한 보존에 안성맞춤이다. 말하자면 잃어버린 세계를 보여주는 황금창문이다. 고곤충학자들이 호박 속의 곤충 연구에 몰두하는 이유이다.
1992년 9월 미국의 데이빗 그리말디는 도미니카 호박에 보존된 3천만년 전의 흰개미로부터 DNA를 추출하여 매스컴의 각광을 받았다. 호박연구의 권위자인 미국의 조지 포이너는 역시 도미니카 화석에서 4천만년 전의 침없는 벌로부터 옛DNA를 발견했다. 또한 포이너교수는 1993년 6월 1억3천5백만년 된 레바논의 호박에서 멸종된 초식곤충인 바구미의 DNA를 채취하여 가장 오래된 DNA를 발견한 행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 바구미는 딱정벌레의 일종으로 공룡과 같은 시기에 살았다.
때마침 영화 '쥬라기 공원'이 화제를 일으키고 있던 터라 포이너의 발견은 세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공룡의 피를 빨아먹은 호박 속의 모기에서 공룡의 DNA를 뽑아내서 공룡을 복원해낸다는 영화의 줄거리가 더욱 그럴법했기 때문이다.
이브이론 검증될 듯
옛DNA로 유기체를 되살리는 일은 과학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설령 수많은 DNA분자를 복원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이를 꿰맞추어 기능을 발현시킬 방법을 아직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멸종된 생물의 부활은 아마도 인간의 능력을 넘는 일인 것 같다. 한번 사라진 생물은 영원히 소멸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분자고고학의 진정한 목적은 옛DNA를 통하여 인류 진화과정의 수수께끼, 이를테면 초기인류의 기원이나 생활양식, 그들을 괴롭힌 유전병에 얽힌 궁금증을 푸는 데 있다. 이런 맥락에서 1987년 앨런 윌슨이 제안한 이브(Eve)이론이 검증될 것으로 기대된다.
윌슨에 따르면, 현생인류의 어머니는 대략 20만년 전에 아프리카에 살았던 이브라는 여인이다. 이브의 후손이 세계 도처로 퍼져나가서 그 당시 구세계에 살고 있던 호모 에렉투스의 후예, 예컨대 네안데르탈인이나 북경원인을 대체했다는 이론이다. 호모 에렉투스가 다양한 지역에서 제각기 오늘날의 인류로 진화되었다는 다지역진화론과 완전히 상반되는 가설이다. 윌슨은 화석 대신에 세포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분석하여 이브이론을 내놓았기 때문에 옛DNA 연구에 의하여 그 타당성이 판가름날 것으로 보인다. 네안데르탈인의 뼈에 보존된 DNA 분석결과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 증의 하나이다.
옛DNA는 오래 전에 사라진 세계의 소식을 전해주는 우편배달부이다. 미지의 과거 속으로 타임캡슐을 찾아나선 분자고고학자들의 또 다른 낭보가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