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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생각하기엔 이질적이기만 한 재료공학과 정보화 사회.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두 분야의 만남은 필연이다.


KIST 자성합금 연구실장 김희중 박사
 

과학기술 분야를 거론할 때마다 등장하는 단어가 첨단(尖端)이란 말이다. 국어사전에서는 이 단어에 대해 '물건의 뾰족한 끝'이란 설명과 함께 '시대의 흐름이나 유행 따위의 맨 앞장'이라 설명하고 있다. 물론 사용되는 용례를 따지자면 분명 다른 말이긴 하지만, 어떻든 앞과 끝이란 이중의 뜻이 한 단어에 포함된 것이 흥미롭다.

흔히 재료공학이라면 특수한 성질의 금속이나 비금속을 연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KIST 자성합금 연구실 실장인 김희중 박사(金喜中·40)의 최근 관심사는 다가올 '정보화 사회'에 쏠려 있다.

재료공학과 정보화 사회. 첨단의 양쪽처럼 다소 이질적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이들 두 분야는 기실 따지고 보면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쉬운 예로 컴퓨터만 하더라도 용량과 기능은 커지는 반면 크기는 줄어든 제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이는 재료의 뒷받침이 없다면 도저히 꿈도 못 꿀 일이다. 즉 소재는 부품-기기-시스템의 순으로 이어지는 기술 개발의 축 맨 앞에 서 있는 셈.

김박사는 차세대 멀티미디어 디스플레이용 핵심소자를 비롯해 첨단 기기에 사용되는 부품의 재료 개발에 대한 관심으로 정보화 사회를 흥미있게 바라보고 있다.

그는 얼마 전 철과 36%의 니켈을 섞은 고순도 재료인 '임바'를 이용해 HDTV에 필요한 섀도 마스크(shadow mask) 개발에 성공했다. 새도 마스크란 컬러 텔레비전 브라운관 내부에 설치된 전자빔의 차폐판으로, 금속판에 뚫린 무수한 원형의 작은 구멍을 통해 색채 화상을 재현하는 역할을 한다. 이번에 김박사팀이 만든 섀도 마스크는 순철로 만든 이전의 것에 비해 색의 번짐을 줄여 화상도를 크게 높일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보통의 크롬 카세트 테이프를 이용해 CD와 같은 음을 재생하는 디지털 콤팩트 카세트(DCC)의 헤드 개발도 역시 최근의 연구 성과물. DCC는 아날로그 방식으로 녹음된 음향도 디지털로 재생이 가능한 획기적 제품으로, 가전사들이 제품을 만들어 판매하기 시작했을 만큼 시장성 면에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소프트웨어와 재료의 만남


재료의 자기적 특성을 측정하는 시료진동형지속계(VSM)방에서 한 연구원의 실험결과를 놓고 대화를 나누고 있다.


자기기술 영역은 점차 반도체 기술과 연결되고 있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그래서 많은 재료공학자들은 소프트웨어가 체화(體化)된 고기술집약도의 소재들이 차세대 소재의 주역으로 등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결국엔 재료와 부품의 구분이 없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가 몸담고 있는 KIST의 자성합금 연구실은 원래 변압기에 사용되는 실리콘 스틸의 전기 강판이나 오디오 헤드 전전자교환기 등에 사용되는 니켈 철 합금의 퍼말론 등을 연구 개발하는 곳이다. 요즘들어 이곳에서 가장 관심있게 연구하고 있는 분야는 박막자성재료. 멀티미디어용 오디오의 헤드를 만드는데 필수적인 재료다.

박막 연구는 KIST가 지난 5월 발표한 'KIST 2000 연구 프로그램'의 하나이기도 하다. 세계적으로 연구 초기 단계에 있는 신생기술중 우리나라 산업구조에 적합한 기술을 개발한다는 목표아래 2천년대 정보 자동화 사회에 대비한 원천기술 개발에 역점을 둔 야심적인 프로젝트인 이 계획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이 그동안 다른 신기술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약했던 소재분야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는 점. 박막자성재료 이외에도 초고밀도 정보기록매체에 필요한 광메모리 디스크나 복합자기헤드 재료개발 등이 포함돼 있다.

"한 제품이 등장하면 더 나은 성능의 제품으로 개량되다가 결국 새로운 제품으로 혁신되는 것이 일반적인 과정이죠. 이때 각 단계마다 새로운 재료가 투입돼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가공기술은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소재 분야는 많이 뒤진편이에요 더 나은 기술 확보가 쉽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번에 만든 섀도 마스크도 이를 제조하는데 필요한 재료를 일본에서 들여와 개발한 것인데, 재료까지 우리가 만들어야 했다면 5년은 더 걸렸을 겁니다."

공학은 끊임없이 사업분야와 연관을 맺으면서 성장하는 학문이다. 밖으로 드러나는 결과물 없이는 연구를 지속하기 위한 연구비를 충당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반도체 기술 자체만을 놓고 본다면 상당한 수준에 올라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설계를 비롯한 연관 분야가 이에 보조를 맞추지 못하고 있는 점은 취약한 첨단 기술의 구조를 지적할 때마다 누누이 강조돼 왔다. 김박사는 이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중 하나를 연구지원단체의 조급함에서 찾았다.

1백년 전의 과학 선진국들이 지금도 그 위치를 잃지 않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좋은 결과물은 축적된 연구의 바탕 위에서 나오는 것이지 어느날 갑자기 투자를 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러나 우리나라의 기업들은 1~2년 안에 '끝장'을 보려하기 때문에 '지금 없는 것은 외국에서 들여와 쓰면 된다'는 식으로 일을 서두른 것이 지금과 같은 상황을 만드는 요인이 됐다는 지적이다.

"예를 들어 일본의 대표적인 전자회사인 소니사는 자체적으로만 사용하고 있어 별로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반도체 기술이 매우 뛰어난 회사예요. 따지고 보면 일본의 전자산업이 지금과 같은 명성을 얻고 있는 것은 정책적으로 신제품을 만들 때 재료를 함께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이제는 세계 전자재료 시장의 80% 이상을 일본이 차지하고 있잖아요."

그는 지난 해에 과기처가 KIST에 의뢰한 소재분야의 대일의존 극복방안 연구에 참여했던 터라 일본과 관련된 풍부한 사례들을 수집해 놓고 있다. 그가 진단하는 우리와 일본의 기술 격차는 적어도 20년. 일본이 지금과 같은 기술력을 갖게 된 것은 그들보다 앞선 기술을 사와서 똑같이 만들어내는 모방력 때문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여기에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추가됐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디지털 콤팩트카세트의 헤드를 만든 박막제조기를 설명하는 김박사
 

창조적 교육의 중요성

완제품을 들여와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는 과정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90%라면 특허에도 나와 있지 않는 노하우가 10%인데, 일본은 이를 손재주와 자체의 기술로 메꾸고 또 덧붙였다는 그의 설명은 우리의 과학 기술이 취해야 할 방법의 일단을 제시하고 있다.

자동화의 결과 상대적으로 인원이 남아도는 일본은 그 인원을 연구원으로 활용하고 있어 우리보다 월등히 많은 인원이 연구에 투입되고 있다. 또 여기에 막강한 자금이 뒷받침해주고 있는 터라 '앞선 자들을 쫓아가다보니 맨 앞에 선' 처지가 됐다. 이제는 돈주고 사와야 할 기술로는 통신위성이나 우주왕복선, 무기 등만이 남았을 뿐이다.

일본이 외국의 기술을 들여와 '더 작은 것'을 착상했다면 우리는 우리 문화에 기반을 둔 제품들을 응용해 이를 발판으로 삼으면 된다는 점에서 그는 공기방울 세탁기나 국 끓이는 전자 레인지, 물걸레 청소기 등 최근 선보이고 있는, 이른바 '한국형 제품'의 등장을 매우 고무적으로 평가했다.

"물론 일본과 우리의 연구환경이 크게 다른 것은 사실입니다. 이전보다 우리 연구 환경이 개선되기는 했지만 아직 흡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거든요. 여하간 저를 포함한 연구자들의 더 큰 노력이 가장 중요하겠지요. 겉보기에는 비슷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처진 부분이 더 많은 상황에서 우리는 당연히 일본의 것을 보고 배워야 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일이 아녜요. 우리가 학교에 가는 이유가 뭡니까. 나보다 먼저 공부한 분들의 것을 배우기 위해서잖아요 우리가 그들의 것을 익히면서 여기에 우리만의 것을 집어넣는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봅니다."

우리의 과학 기술이 지금보다 더 나은 상황으로 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육이 뒷받침해줘야 한다는 것은 비단 그만의 생각이 아니다. 그 자신 주입식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또 같은 교육을 받으며 자란 후학들과 연구를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독창성을 키우지 못하는 교육'에 불만이 대단하다. 배운 것을 응용하지 못하게 하는 암기 위주의 교육은 새로운 것을 만났을 때 이를 분석하고 설명하는데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기 때문이다.

나름의 대안이 있는지를 묻자 그는 주저없이 '조기 영재교육'이라고 답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설립 이후 상당한 효과를 거두고 있는 과학고등학교를 중학교까지 실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독창성이 강조된 교육을 받으면 책과 다른 실험결과가 나와도 자신의 실험을 의심하기 보다는 미지에 도전하는 새로운 도전력을 갖출 수 있다는 게 그의 이야기.

그가 재료공학을 공부하려고 마음 먹은 데는 2차 경제개발 계획이 한창 추진되던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가 큰 역할을 했다. 고등학교 재학 당시 전자공학자가 되려 했던 그는 극장의 대한뉴스에서 본 당시 막 건립된 포항제철의 시뻘건 쇳물에 큰 자극을 받았고, 선배들의 소개로 서울대 금속공학과를 선택했다.

그러나 당시의 혼란한 정치상황으로 휴교가 잦아 그리 만족할 만한 충족감을 맛보지 못하던 그는 대학 3학년 여름 방학 때 포항제철 용광로에서의 2주간 실습을 계기로 비로소 '이 일은 해볼 만하다'는 믿음을 갖게 됐다. 이후 KIST에서 석 박사 과정을 거쳐 모교의 책임연구원으로 일하는 지금, 그는 자신이 선택한 이 길에 보람을 느끼는 듯했다.

아침 9시에 출근하면 밤 9시, 혹은 12시가 넘어 문을 나서는 고단한 나날의 연속이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다. 자신이 선택한 일이고 이 일의 중요성, 즉 우리가 21세기 정보화 사회로 진입하기 위한 문을 여는 일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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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 사진

    지재만 기자
  • 이강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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