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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란과 미르 앞세워 새 활로 찾는 옛소련 우주항공기술

러시아의 우주개발계획은 앞으로 개방화 국제화 상업화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다.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된 옛소련의 우주항공관계 자료는 대부분 미국이 제공한 것이다. 따라서 우주개발 역사를 볼 때 미국과 더불어 옛소련이 또 하나의 커다란 흐름을 이루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옛소련의 우주항공관련 기술에 대하여 알고 있는 내용은 상당히 미흡한 수준에 그치고 있다.

그러나 소련이 붕괴되어 독립국가연합이 탄생한 이후 이 분야에서도 개방의 물결이 급속도로 일고 있다. 독립국가 체제 내의 각 공화국들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경제의 활성화인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그들은 더욱더 개방화 자본주의화하고 있다. 이와 흐름을 같이 하여 러시아공화국은 그들의 첨단기술중 하나인 우주항공관계 기술을 상업화하고 있다. 기술수준으로 볼 때 이 분야는 현재 러시아의 가장 경쟁력있는 분야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필자가 이곳에서 공부하면서 지켜본 옛소련의 우주항공 군사관계기술은 그들의 안보체제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상당 부분이 비밀에 싸여 있다. 대부분의 연구소 공과대학이 91년 중반까지만 해도 외국인 학생들을 거의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점만으로도 이를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렇지만 옐친의 집권 이후부터는 과학아카데미 산하의 연구단체들이 더욱 개방되어 현재는 외국인들이 이들 연구소나 대학에서 연구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 모스크바 내에 있는 국내 이공계 출신 학생수는 겨우 10여명 정도이며 우리와 러시아공화국 간의 공동연구도 아직 시작단계에 머물고 있다.

이는 옛소련 사회에 대한 우리의 정보가 매우 부족하기 때문인데, 특히 과학기술 교육체제가 우리와 상당히 달라서 이곳에서 공부하려는 학생들에게 상당한 장애가 되고 있다.

초기에는 미국보다 앞서

로켓을 누가 처음 만들었는가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없으나 우주개발 초기자료를 보면 최초로 이론적 완성을 이룬 인물을 찾을 수 있다. 로켓개발 역사에 있어 독일이 선도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이보다 앞서서 이론적 근거를 최초로 제안한 사람은 옛소련의 과학자이자 교육자인 치올코프스키(1857~1935)였다.

놀랍게도 그는 당시 자신의 논문(후에 조그만 책으로 발간)에서 이미 구체적 부분에 이르기까지 세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우주 공간에 어떤 물체를 띄워올릴 수 있다는 이론적 근거를 그가 처음으로 제시했는데 그 방법이 원리상 현재의 방법과 일치하고 있다.

치올코프스키는 하나의 로켓만으로는 낼 수 없는 속도와 고도를 얻기 위해서는 여러개의 로켓을 같이 묶어 띄워올림으로써 이를 실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는 현재 로켓을 띄워올릴 때 다단분리방식으로 발사하는 방법과 유사하다. 1903년에 그는 이미 로켓의 속도방정식을 분사가스의 속력과 연료의 무게를 이용하여 수학적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의 논문은 당시 소련에서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옛소련이 군사강국의 길을 걷게 되면서 그의 이론에 근거, 옛소련 내에서 자체적 연구가 시작된다. 옛소련이 미국보다 로켓 관련 연구를 먼저 시작했다고 보는 근거는 패전한 독일의 과학자들을 그들이 어떻게 이용했는가와 초기의 로켓성능이 어떠했는가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아폴로 11호 발사계획의 총책임자가 독일의 과학자 폰 브라운이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미국의 로켓기술은 많은 부분 독일과학자들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패전 독일의 고급두뇌들을 대부분 미국이 데리고 갔기 때문에 가능했다. 반면 옛소련으로 간 독일 기술자들은 (옛소련은 주로 실무진과 기술자들을 데리고 갔다) 옛소련의 과학자들과는 격리돼 본격적인 로켓개발 사업에는 참여하지 못하고 추진기관과 유도조정분야 연구에 종사하며 옛소련 과학자들로 구성된 개발팀을 지원하는 일을 주로 하게 된다.

옛소련은 1948년 처음으로 고도 3백㎞까지 P-1이라는 로켓을 쏘아올렸으나 미국은 이로부터 9년 후인 1957년에야 뱅가드라는 위성을 고도 1백75㎞까지 띄워올린다. 이어 1957년 10월 4일 옛소련은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고도 9백㎞의 지구궤도에 띄워올려 세계를 놀라게 한다. 이 위성은 궤도공간상의 밀도와 온도를 측정하는 계기를 장착하고 있었다. 약 한달 후인 11월 3일에는 스푸트니크 2호를 띄워 올렸는데 이 위성은 생물체(개)를 싣고 있었다. 미국은 1년 뒤인 1958년 1월 31일에 엑스플로러(Explorer) 1호를 쏘아올린다.

초기 옛소련과 미국의 위성은 중량에 있어 큰 차이가 난다. 스푸트니크 1호는 83.6㎏, 미국의 뱅가드(Vanguard) 1호는 1.5㎏, 스푸트니크 2호는 5백8.3㎏ — 이때는 약 4천㎏이나 되는 로켓 겉 동체의 일부도 같이 궤도 비행했다-. 미국의 엑스플로러 1호는 4.8㎏으로서 초기 두나라의 로켓 발사능력에 큰 차이가 났음을 알 수 있다.

옛소련은 1959년 1월 2일 루나 1호를 쏘아올렸는데 이 우주선은 최초로 달 주위의 궤도비행에 성공한다. 또한 61년부터는 우주선을 이용한 금성관찰을 시작하게 된다.

옛소련은 이후 인류 최초의 유인 우주비행에 성공하는데 1961년 4월 12일 최초의 우주 비행사 유리 가가린을 태운 보스토크 1호가 1백8분 동안 우주에 머물러 우주개발사에 있어 커다란 이정표를 남긴다.

1963년 6월 16일에는 최초의 여자 우주비행사 발렌티나 테레시코바를 태운 보스토크 6호의 발사에 성공한다. 2년 뒤인 1965년 3월 18일에는 알렉세이 레오노프가 최초의 우주유영에 나서게 된다.

1966년 2월 3일에는 루나 9호를 발사시켜 최초로 달 착륙에 성공했는데 이 우주선은 해상도 높은 달 표면 영상을 지구로 보내왔다.

1969년은 인간의 우주탐험사에 또 하나의 발자취를 남긴 해로 7월 16일에 미국의 아폴로 11호는 인류 최초로 인간을 달에 착륙시켜(암스트롱과 콜린스) 21시간 36분 동안 달에 머무는 기록을 남긴다. 이후로 옛소련과 미국은 경쟁적으로 우주선을 발사함으로써 두 나라에 의해 우주항공분야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한다.

로켓설계 철학의 차이

1970년 9월 20일에는 옛소련의 우주선 루나 16호가 다시 달착륙에 성공한다. 같은 해 11월 17일 옛소련은 달표면 이동차량 루나호트 1호를 달에 착륙시켰는데 달 표면의 '비(rain)의 바다'라고 명명된 지역에서 6개월동안 10.54㎞를 이동하며 최초로 달에 관한 복합적 연구를 수행한다.

지금까지 옛소련의 50년대와 60년대의 우주탐사 과정을 살펴 보았다. 여기서 옛소련의 우주발사체가 왜 초기부터 강력한 추진력을 갖도록 설계되었으며 그후 여러 해 동안 큰 변화를 보이지 않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미국과 옛소련, 두 나라의 로켓설계 철학을 이해해야 한다. 같은 기능을 가진 로켓을 설계하는데 있어, 별도의 다른 설계팀이 각기 독자적으로 설계하면 최종 설계결과는 각 팀마다 다를 수 있다. 미국의 경우에는 각 회사들이 정부로부터 로켓제작권을 얻어 내기 위해 제출하는 설계방법이 다른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연구인력을 통일적으로 관리 하기 어렵다는 단점과 함께 다양한 형태의 로켓 설계가 가능하다는 장점을 보유하게 되었다. 옛소련의 경우는 이와 반대로 연구인력을 통괄적으로 조정할 수 있었으나 다양한 형태의 로켓생산이 어려웠다. 또 옛소련은 초기부터 로켓의 발사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기존형태를 버리고 새로운 형태의 로켓을 설계할 필요성이 적었다.

어쨌든 옛소련의 로켓들을 보면 초기부터 지금까지 거의 그 형태가 변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옛소련은 새로운 형태의 발사체를 만들기 보다는 기존의 발사체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을 해결해 나가는 식으로 로켓을 설계해 왔다.

70년대 이후에는 달뿐 아니라 태양계 내의 다른 행성에 대해서도 본격적인 탐사를 시작하게 된다. 외계 행성에 우주선을 보낸 경험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미국과 옛소련 두 나라뿐이며 현재에도 여러 우주선들이 태양계 내의 여러 행성들을 탐사해 얻은 자료들을 지구로 보내오고 있다.

미르의 용도
 

발사대의 에네르기아 로켓과 우주왕복선 부란
 

코스모스 위성들은 옛소련이 가장 많이 띄워올린 인공위성으로서 많은 수가 군사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군사목적용 인공위성의 수는 아직도 미국보다 월등히 많다고 한다. 미국이 스타워스 우주방위시스템을 구축하려 했던 이유중 하나가 바로 옛소련 군사위성 시스템의 우위 때문이었다. 옛소련이 띄워올린 인공위성들은 민간통신 기상예보 첩보 조기경보 군사항법 해양정찰 등의 목적에 이용되고 있다.

1986년에 처음 띄워진 미르는 기존의 우주선들과는 다른 성격을 갖고 있다. 이 우주 정거장은 산업 목적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결정체(크리스털)제조, 순도 높은 의약품 추출, 합금 제조, 생물학 실험재료의 추출 등 여러 복합적 연구가 이 우주 정거장에서 수행되고 있다. 미르에 탑승했던 우주비행사 티토프와 마나로프는 1988년 12월 21일 최장 우주체류기록(3백66일)을 세운다.

1982년 11월 11일 미국은 최초의 우주왕복선 컬럼비아호의 발사에 성공하는데 옛소련은 이보다 6년 늦은 1988년에 유사한 성능을 지닌 우주왕복선 부란을 띄워올린다. 부란은 추진체인 에네르기아로켓과 함께 지상에서 발사되는데, 발사시 최대 10명의 승무원(미국은 8명)이 탑승하게 돼 있다. 또 화물적재 능력은 30t(미국 29.5t), 귀환시 화물 적재능력은 14t(미국 14.5t)으로 미국의 우주왕복선과 비슷한 성능을 갖고 있다. 부란 역시 미르처럼 여러가지 복합적 연구에 이용 할 목적으로 제작됐는데 예를 들면 우주발전소 건설, 우주궤도공장 건설, 우주안테나시스템 제작, 미르와의 공동작업 등이 그것이다. 또 현재 러시아공화국은 복합연구비행체인 보르를 보유하고 있는데 이 우주선은 지상에서 실험 불가능한 연구를 우주공간에서 수행할 목적으로 제작됐다.

러시아공화국은 미르와 부란을 상업적 차원에서 활용할 계획이다. 그들의 경제적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앞으로 당분간은 외국자본을 이용하여 이 우주선들을 운용하려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앞으로 띄워올릴 인공 위성의 발사체 선정작업에 있어서도 러시아 공화국의 적극적인 참여가 예상된다. 러시아의 이와같은 움직임은 경제적 기술적 측면에서 우리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옛소련이 1986년 이래 12번째로 승무원을 미르에 보내는 광경
 

미르의 생존기간을 늘려라

현재 러시아공화국의 우주개발 계획은 국내의 경제적 문제로 인하여 과거 어느 때 보다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미국이나 유럽도 비슷한 상황이지만 특히 러시아의 우주 항공분야 기술은 복잡한 국내 사정 때문에 가까운 시일 내에 어떤 구체적 이윤을 가져다 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과거에 이뤄놓은 거대한 잠재력은 최소의 경비를 가지고도 이 분야에 대한 연구를 가능케 하고 있다.

소련이 붕괴되기 얼마 전 우주인들은 미리 계획된 프로그램에 따라 우주정거장으로 이동됐으나 현재의 상황에서 이런 사치(?)는 허용되지 않고 있으며 최장시간 우주작업 기록을 가지고 있는 우주정거장 미르의 기본블럭(block) 교환은 상당기간 이뤄지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현재 러시아의 우주공학기술자들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과제는 미르의 생존기간을 연장시키는 일이다. 미르에서 근무했던 한 우주인은 이 우주정거장이 적어도 1995년까지는 정상적으로 작동할 것이라고 말했으며, 어떤 이들은 발사당시 예상된 유효기간인 2000년까지도 미르가 정상적으로 동작할 것이라는 낙관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미르의 생존기간을 결정하는 것은 자이로스코프라는 모형용 지구본 크기의 계기다. 문제는 이 장치가 너무도 빨리 고장난다는 데 있다. 92년 중반까지의 자료에 의하면 미르에 장착된 12개의 자이로스코프중에서 7개만 정상적으로 동작하고 있다고 한다. 1989년 말에 발사되어 미르의 오른쪽에 결합된 모듈(module) '크반트-2'호의 6개의 자이로스코프중 이미 4개가 쓸모 없어졌다. 이 자이로스코프에 의해서 우주정거장이 오차 1㎝ 이하의 정확성을 유지하며 궤도비행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이 계기의 고장은 곧 우주정거장이 궤도에서 이탈하는 것을 의미 한다. 다시 말해 우주정거장이 정거장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럴 경우 우주정거장은 지구 대기권으로 추락하거나 지구를 벗어나 우주에서 떠돌아 다니는 운명을 맞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러시아는 1993년의 우주발사 계획중 많은 부분을 자이로스코프의 교환에 할당해 놓았다. 그중 첫번째 계획은 모듈 '스펙트르'호를 띄워 지금 미르와 결합되어 있는 '크리스탈'에 연결시키는 것으로, 이 모듈은 지구 관찰 임무(군사용 목적도 포함)를 띠고 있다.

그러나 미르와 결합시키려 하는 '스펙트르'와 마지막 모듈 '프리로다'의 발사계획은 향후의 자금 조달여부에 달려 있다.

외국자본 적극 유치해

우주정거장 복합체(complex)를 보면 여러 모듈들이 연결돼 있다. 예컨대 소유즈 TM-미르-크반트-프로그레스의 순으로 각 모듈들이 연결된다. 각 모듈에는 긴 직사각형 모양의 태양전지판이 부착되어 있다.

이 우주선복합체에서 작업을 계속할 때 소요되는 식량이나 장비의 교환, 승무원의 교대 등은 소유즈 로켓이나 우주왕복선 부란을 통해 이뤄진다. 92년 말에 러시아는 우주왕복선 부란을 발사했는데, 정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지 않고 외국자본만으로 이 일을 성공시켰다.

러시아공화국의 우주개발 계획이 앞으로 어떻게 진행돼 나갈지에 대해 누구도 구체적인 예상을 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개방화 국제화 상업화될 것이라는 점만은 명확하다. 그들의 이런 움직임이 우리의 우주항공 계획에 유리하게 작용하길 원한다면 우리도 시야를 넓혀 보다 넓은 선택의 폭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승무원 고대를 위해 우주비행사들을 싣고 출발하는 소유즈 TM-8
 

1993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 가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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