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우리가 아네모네라고 부르는 바람꽃은 봄에 벌써 겨울을 생각한다.
설악산정 바람받이의 신선한 곳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 풀이 있다. 이 식물은 비교적 포기가 크고 높이 40cm 정도까지 자란다. 그리고 굵은 뿌리줄기에서는 많은 잎이 비스듬히 퍼지고 밑부분은 마른 잎자루가 겉을 둘러싸서 보호한다. 자세히 보니 잎은 자루가 길고 심장형이며 크게 세개로 갈라진 다음 다시 잘게 갈라져 있다.
윗부분에 잎처럼 생긴 총포잎(화서 전체의 기부를 싸고 있는 잎)이 세개씩 두루 달려 있고 그 중앙에서 5, 6개의 꽃대가 산형으로 퍼진다. 이 꽃대 끝에 흰꽃이 한개씩 달려 있는데 이 꽃의 이름은 바람꽃이다. 대개 바람꽃은 봄철에 피지만 설악산정의 바람꽃은 8월에 핀다. 오랜 세월에 걸쳐서 고산지역의 환경에 적응한 결과다.
미나리 아재비과에 속하는 다년초인 바람꽃은 꽃잎과 꽃받침이 분화되지 않았다. 얼핏 보아 꽃잎같이 보이는 것이 사실은 꽃받침이다. 꽃받침은 5~7개가 수평으로 퍼져 있는데 길이가 1.5cm 정도이고, 타원형이다. 꽃 속을 들여다 보면 수술이 많아서 종자를 많이 생산한다.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바람꽃류 중에서 큰 것은 주로 설악산 이북에 퍼져 있다. 바람꽃이란 이름은 봄바람과 더불어 피기 시작한다고 해서 붙여졌다.
바람꽃이란 이름이 붙어있는 식물은 꿩의 바람꽃 회리바람꽃 들바람꽃 등 우리나라에서 보고된 종류만도 12종에 달한다.
바람꽃의 공식 명칭은 아네모네(Anemone)라고 한다. 아네모네는 그리스어의 '바람의 딸'이란 말을 라틴어화한 것이다. 우리가 바람꽃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꽁꽁 얼어붙었던 땅덩어리가 봄바람을 맞아서 풀리게 됨과 동시에 이 꽃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비교적 튼튼하게 생긴 바람꽃과는 달리 회리바람꽃과 그밖의 종류들은 지상부나 뿌리가 모두 나약하게 생겼다. 뿌리가 땅속 깊숙히 들어가서 추위를 피하기보다는 지면 가까이서 추위를 즐기는 듯하다.
바람꽃의 뿌리는 연한 육질이며 포동포동 살이 쪄 있다. 그 끝에 달린 새싹은 밖을 향하여 봄을 기다리고 있다. 마치 남극의 신사펭귄이 혹한 속에서도 얼음목욕을 즐기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수도자같은 생활사
지상부는 나약하고 가늘지만 탄력이 있어 바람따라 제멋대로 흔들린다. 대개는 나무 밑에서 자라고 있기 때문에 강한 바람은 덜 받지만 늦은 봄까지 눈과 얼음속에서 고난의 세월을 보내야 한다.
일찍 겨울잠에서 깬 바람꽃은 재빨리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다. 주변에서 자라는 식물들이 잠에서 막 깨어 살아 남기 위한 생존경쟁을 시작할 때 바람꽃은 벌써 다가올 겨울잠 준비를 한다.
살아남기 위한 식물의 생존경쟁은 참으로 격렬하게 벌어진다. 그러나 바람꽃은 이러한 이전투구와 관계없이 혼자서 유유히 살아가는 수도자같은 생활사를 보여준다.
바람꽃의 잎은 뿌리에서 한개씩 돋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꽃줄기에 달린 총포잎이 정상적인 잎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잎처럼 생겼기 때문에 꽃줄기에 잎이 세개씩 달린 것 같다.
중국에서는 바람꽃을 은연화(銀蓮花)라고 부르고 있다. 꽃이 은같이 희고 어떤 종류는 뿌리가 연뿌리를 축소시킨 것같이 보인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이다.
약재로 쓰이는 꿩의 바람꽃
꿩의 바람꽃은 중부지방에서 자라는 바람꽃류 중에서 꽃이 가장 크다. 이 꽃의 잎은 회청색인데 꽃이 활짝 피었을 때 산뜻한 느낌을 주는 꽃이다. 다소 습기가 있는 곳에서 자라는 꿩의 바람꽃이 막 피려고 할 무렵에는 날씨가 춥고 바람이 심하게 불기 때문에 꽃봉우리가 오므라든 채 옆을 향하고 있다. 아울러 잎도 움츠리고 있어서 볼품이 없지만 날씨좋은 날 하늘을 향하여 활짝 핀 모양은 참으로 아름답다.
꿩의 바람꽃의 근경은 연뿌리같은 형이며 양끝이 좁아들어 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양두첨(兩頭尖, 양쪽 머리가 뾰족하다)이란 한약명으로 이 꽃을 지칭하기도 한다. 중국의 식물학자들이 부르는 일반명칭은 다판은연화(多瓣銀蓮花, 꽃잎이 많은 바람꽃)이다.
우리나라에서 통하는 꿩의 바람꽃이란 이름은 그 뜻이 쉬운 듯하지만 실제로는 다소 애매한 이름이다. 아마도 먹을 것이 많지 않은 이른 봄 꿩이 먹을 만한 식물이라고 생각하여 그런 이름을 붙였을 가능성이 크다.
한방에서는 이 꽃의 근경을 허리와 다리의 병을 치료하고 관절염 월경불순 등을 해소시키는 데 사용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감기약으로 또 가래를 제거하기 위해 쓴다고 한다. 그러나 남한 내에서 이 식물을 약용으로 썼다는 기록이 없다.
꿩의 바람꽃의 근경 끝에는 비늘같은 잎이 나 있는데 한개의 잎이 비스듬히 나와서 꽃이 진 다음 20cm 내외로 자란다. 여느 바람꽃들과 마찬가지로 이 꽃의 잎도 엽병(잎을 지탱하는 꼭지) 끝에서 세개로 갈라진 다음 다시 세개씩 갈라진다. 꽃줄기는 한개인데(높이 15cm 정도) 그 끝에 한개의 커다란 꽃이 달린다. 꽃잎같은 꽃받침잎은 꽃 하나에 8~13개씩 달려 있는데 길이는 약 2cm다. 꽃받침잎은 흰색이지만 겉은 연한 자주빛을 띤다. 많은 수술과 암술이 있으며 풍부한 꽃밥과 화려한 꽃색으로 벌레들을 유인한다.
화려한 꿩의 바람꽃과는 대조적으로 꽃받침잎이 밑으로 처져서 꼬여 있고 꽃밥덩어리와 암술만이 보이는 다소 초라한 바람꽃도 있다. 회리바람꽃이다. 꽃받침잎이 회리(회오리)처럼 꼬였다고 해서 회리바람꽃이라고 하는데 이 꽃은 벌레의 힘을 빌리기보다 바람의 힘을 빌려 번식을 한다.
원예가들에게 인기높은 양귀비바람꽃
한편 양귀비바람꽃은 이스라엘의 봄을 장식하는 꽃중의 하나다. 꽃이 양귀비같이 아름답고 봄바람과 더불어 피기 시작한다고 해서 양귀비바람꽃이라고 부르지만 그냥 아네모네로 통하기도 한다.
이스라엘에서는 성서시대부터 이 꽃이 자라왔기 때문에 일찍 알려졌는데 학자들은 복음성서 중에 나오는 백합꽃들 중의 하나가 양귀비바람꽃일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이스라엘은 지중해성 기후대 안에 속해 있다. 따라서 겨울비가 2월까지 계속된다. 우기가 지나서 3월이 되면 온갖 꽃들이 앞을 다투어 피어나는데 이때 피는 빨간 양귀비바람꽃은 우리나라의 봄을 장식하는 진달래처럼 이곳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다.
이 꽃의 지하경(땅속줄기)은 둥굴고 많은 양분을 저장하고 있으며 매년 그 지상부가 자란다. 보통 높이 45cm 정도까지 자라며 잎은 대가 없고 잘게 갈라진다. 원줄기 끝에 한개씩 달려 있는 꽃의 지름은 6cm 정도인데 빨강 자주 보라 하양 파랑 및 그밖의 많은 원예품종이 개발돼 있다.
이 꽃 역시 꽃받침과 꽃잎의 구별이 없다. 꽃받침은 6~13장이지만 대개는 6장이며 야생종은 빨간색이다.
이 꽃은 오래 전부터 자라왔기 때문에 전설도 많이 간직하고 있다.
예를 들면 그리스의 아름다운 소년 아도니스(Adonis)가 멧돼지에 받혀서 목숨이 위태로워졌을 때 그를 사랑하던 애인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에서 돋아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양귀비바람꽃은 본디 흰꽃이었으나 예수가 골고다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힐 때 떨어진 그 피로 인하여 모든 꽃이 혈색으로 변하였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개량된 양귀비바람꽃은 원예가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데 흔히 아네모네 또는 포피 아네모네(poppy anemone)란 이름으로 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