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런한 농부처럼 바다 밑바닥 구석구석을 일구는 갯지렁이는 해양생태계의 환경미화원 노릇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바다 속의 생물로 물고기나 플랑크톤 같이 해수 중에 살고있는 것만 생각 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는 바다 밑바닥에 높은 밀도로 생물들이 분포하고 있다. 이러한 해저의 저서생물(benthos)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갯지렁이류(Polychaeta)들이다 지렁이와 같은 모양에 다리를 달고 있는 꼴이 이상해 보여 기분이 좋지 않은 동물로 취급해 버리기 쉬우나 이러한 모양이 아닌 것이 더 많다.
지구상에 8천종
이들은 농부처럼 부지런하게 바다 구석구석의 땅을 찾아 일구고 환경미화원보다 더 능숙한 솜씨로 오염원을 찾아서 걸러낸다. 또한 꽃보다 예쁜 자태로 수중의 궁궐을 장식하는 귀중한 우리의 이웃들이다.
크기는 2m 정도에서 부터 1㎝ 미만의 것까지 매우 다양하다. 지구상에 8천종 정도 살고 있으나 우리나라엔 3백종 정도가 알려져 있다.
비교적 큰 개체들은 자라면서 마디 수가 점차 불어나게 되는데 제주도 해안에서 흔히 잡히는 왕털갯지렁이(Eunice aphroditois, 사진1)는 길이 1.5m, 마디 수가 4백개 이상자라는 대형종이다. 수심 5~10m 정도에서 흐름이 강한 큰 바위 아래를 뱀처럼 기어다니면서 입속의 턱을 돌출시켜 작은 동물을 포식하고 산다. 전신이 검붉은 색이지만 넷째와 다섯째 마디는 흰색으로 돼있어, 해조류나 부착생물 사이에서 함께 수류를 따라 일렁일 때는 쉽게 형태를 구분하지 못한다. 숨었던 바위로 부터 노출되면 강한 흐름을 따라 바다뱀처럼 헤엄쳐 멀리 이동해 가기도 한다.
적의 공격을 받아 몸이 잘려지면 곧 재생되는 힘이 강하다. 이는 약한 입장에 있는 자가 자위수단으로 지니게 되는 모든 갯지렁이류 공통의 특징이라 하겠다.
그러나 비교적 따스한 해역에 서식하고 부영양화된 충무지역 양식시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물등수염갯지렁이(Hesione reticulata, 사진2)는 19개 마디만 갖고 있다. 갯지렁이는 이와 같이 종류에 따라 일정 수의 마디를 갖는 특징이 있다. 위의 종은 갈색의 등판에 그물무늬의 흰줄과 굵은 흰점이 있어 물이 일렁이면서 반사되는 빛과 어울리면 쉽게 구별할 수 없다. 특별히 긴 등수염은 양식물의 틈 사이를 쉽게 더듬어 헤쳐나가는데 사용 된다. 또 몸을 지탱해주는 역할도 하게 된다.
대부분의 갯지렁이류는 암수 딴 몸이며 보통 때는 외형적 차이를 알아보기 어렵다. 짧은미륵비늘갯지렁이(Halosydnn brevisetosa)와 같이 생식시기가 되면 암컷(사진3) 체강내에 녹색의 알이 들어차 외부로 나타나는 색깔도 어두운 녹색이 돼 암수 구별이 가능한 것도 있다. 수컷은 우유빛의 정자를 품기 때문에 열은 갈색을 띤다.
서해안의 우점종으로 낚시미끼로 수출되고 있는 두토막눈썹참갯지렁이(Perinereis vancaurica tetradentata, 사진4)와 같은 참갯지렁이류들은 대개 펄이나 모래구멍 속에 살다가 일정한 마디의 체강내에 정자나 알(사진5)이 만들어지면 다리가 헤엄칠 수 있게 넓게 변형된다. 참갯지렁이류는 월령에 따른 생식주기가 되면 표면으로 올라와 다함께 생식군영(群泳)을 한다. 이때 수컷과 암컷이 함께 나선상으로 헤엄치다가 암컷이 조용히 곧게 나아가거나 머리부분을 세우고 원형을 그리는 혼인댄스를 추는 것을 신호로, 수컷은 암컷 머리 반대쪽으로 나아가면서 암컷을 휘어 감는다. 후단이 암컷 머리부분에 닿으면 수컷의 뒤를 물고 늘어지고 이때 수컷의 정자가 암컷 체강 속으로 빨려 들어 간다. 수정란이 만들어지면 곧 휘어감긴 압력과 알의 팽창으로 몸벽이 파열되면서 체외로 방출돼 플랑크톤의 유생시기로 들어간다.
고감도 센서
적으로 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가장 발달된 것이 안점이다. 대개 1~15쌍 정도를 갖고 있는데 광감각세포를 갖춘 간단한 구조에서 부터 인간의 눈과 같은 구조를 갖는 것까지 매우 다양하다.
연안의 바위 벼랑 아래에는 남색꽃갯지렁이(Sabellastarte indica, 사진6) 접박이꽃갯지렁이(Sabellastrarte zebuensis, 사진7) 등이 몸에서 분비한 점액으로 장력이 강한 관모양의 집을 만들어 숨어 산다. 아가미관을 꽃처럼 밖으로 펴 부유생물이나 미소생물을 음식물로 모으거나 부유현탁물을 거른다. 여기에는 빛을 감지하는 세포가 분산돼 있어 외부의 변화를 감지한다. 위험을 느낄 때는 재빨리 집속으로 들어간다. 이 재빠른 행동은 몸의 길이를 따라 세포로 달리는 1백50㎛ 정도의 거대신경섬유가 인간보다 1백배 이상 빠른 속도로 반응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석회질의 집을 만들어 그 속에 사는 우산 석회관갯지렁이류(Hydroides, 사진8)는 아가미관 줄기의 일부가 변해서 만들어진 아래 위 이중마개까지 가지고 있다. 이는 유생시기에 양식어업장이나 임해 산업시설 등에 대량 부착해(사진9) 인간생활 및 산업시설에 큰 타격을 주는 오손생물(fouling arganism)이 되고 있다. 이를 방제하기 위해 화학적 방법이나 일광노출 등을 시도하고 있으나, 집 입구를 막는 마개가 정교하고 겹으로 견고하게 밀폐돼 장시간 노출이나 화학적 구제에도 잘 방제되지 않는다.
큰조름석회관 갯지렁이류 (Spirobran chus, 사진 10, 11, 12)는 아가미관의 색깔과 배색이 다양해 아가미관을 편 아름다운 자태는 우리들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유생이 선택적으로 돌산호 위에 정착해 산호의 성장에 따라 집을 그 속에 묻고 자라나오므로 여러색의 아가미관을 산호초 위로 펼쳐 마치 들장미밭 같은 아름다움을 준다.
이들도 치열한 생존경쟁이 전개되는 산호초속에 살아남기 위해 산호초에게서 은신처를 보장받는 대신, 산호초가 가장 무서워하는 불가사리와 섬게류의 침입을 격퇴해준다. 특히 마개위로 돋아있는 사슴뿔 모양의 가시가 마개를 열고 밀려 올라올 때 마개 자루가 반원운동을 하게 되므로 마개 위의 뿔과 산호초 사이에서 침입자의 조직이 찝혀 버린다. 이런 갯지렁이가 있는 산호초에는 외부 침입자가 기피하게 되므로 아주 현명한 공생관계라 할 수 있다.
자연속의 정화작용
남해안 모래펄에 흔히 보이는 작은검은갯지렁이(Arenicola brasilliensis, 사진13)는 앞이 굵고 뒤가 가늘어진 원통모양이라 쉽게 모래펄 속으로 굴을 파들어갈 수 있다. 파들어간 굴 표면엔 분비되는 점액을 발라 깊이가 몸 길이의 2~3배에 달하는 L자 모양의 굴을 만들어 둔다. 끝에서 부터는 다시 위로 수직굴을 지표면을 향해 파들어가므로(이때는 점액을 바르지 않음) U자 모양의 집(그림)이 만들어진다. 머리쪽에서 밀려 들어오는 모래를 먹는데 함께 들어오는 작은 동물도 부수적으로 얻게 된다.
때때로 몸을 후진하여 항문을 올려 불소화 물과 모래를 굴 가장자리에 배출한다. 이 똥의 덩어리가 화산처럼 쌓이고 반대쪽 머리가 향한 구멍은 함몰돼 들어가면서 일정량의 모래가 쏠려 내려가 먹이의 계속적인 공급이 이루어진다. 10회 정도 모래를 먹고 수분간 휴식한 다음 후진하여 굴 밖으로 똥을 배출하는 정확한 반복운동이 이루어진다. 썰물 때 노출된 똥의 덩어리는 밀물 때 조류가 밀어낸다.
따라서 썩은 모래질은 지표면으로 되돌려지는 결과가 되고, 집을 통해 물이 유통되므로 갯지렁이류가 서식하는 대부분의 간사지는 자연스럽게 정화된다. 특히 서해안의 광활한 갯벌속에 대군을 이루는 두토막눈썹참갯지렁이들은 바닥을 파 굴을 통하게 하여 해저 퇴적물의 구조를 다공질화하고, 부영양화된 내만이나 양식장 바닥 또는 검은색으로 변해버린 퇴적물 한 가운데로 해수를 활발히 수송함으로써 해양생태계의 정화를 담당하고 있다. 썩은 밭을 갈아 일구는 농부의 삽질같은 이러한 행동을 생물교반(bioturbation)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