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중국은 자체 개발한 위성제작과 발사기술을 보유한 5개국 중의 하나이고, 위성회수기술을 보유한 3개국 중의 하나다. 또한 다연장 위성로켓 발사기술을 보유한 4개국 중의 하나이며, 자체 개발한 중속 로켓을 이용해 정지궤도위성을 발사할 수 있는 5개국 중의 하나다.
1992년 8월 14일 오전 7시. 중국 국민들은 지난 3월의 발사실패를 떠올리며 국영TV로 중계되고 있는 위성발사의 카운트다운을 숨죽이면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호주의 통신위성 '옵터스 B1'을 실은 중국의 '장정(長征)2-E'호 로켓은 실패의 불안을 말끔히 씻어주며 사천성 서창우주기지의 창공으로 힘차게 날아갔다. 17분후 '옵터스 B1'은 '장정2-E'호로부터 분리돼 지상 1천49km의 정지궤도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중국의 세계적인 항공우주기술을 다시 한번 확실히 확인시켜 주면서.
그렇지만 이러한 위성발사소식이 중국 전역에 전달되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다. 그것은 시골지역의 통신체계는 매우 미약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행정관리가 파견돼 있는 행정부락의 50% 정도가 전화가 없으며, 많은 시골지역의 각 가정에는 이따금 라디오의 소식을 전해주는 유선 확성기만이 설치돼 있는 상황이다. 그 유선확성기의 보급률도 42%정도에 그쳐 있다.
과학기술의 두 얼굴
도시와 농촌, 핵심지역과 주변지역의 극심한 이중구도를 가진 사회체제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과학기술도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유선 확성기와 인공위성처럼 조악한 중저급 상품에서 나타나는 낙후된 생산기술과 외국의 상업위성을 우주에 발사해 줄 수 있는 첨단기술이 공존한다. 중국의 평균 과학기술수준을 한마디로 말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국사람만큼 이해하기 힘든 것이 첨예한 양극구조의 중국 과학기술이다.
종이 나침반 화약 인쇄술 등 4대 과학기술 발명국임을 자랑했던 중국은, 그들이 가진 풍부한 자원과 무한한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잠자는 거인'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의 과학기술활동도 정치경제환경의 명암에 좌우되는 굴절된 역사로 특징지워진다. 즉 중국 현대사를 규정했던 '홍'(紅:정치이데올로기)과 '전'(專:전문성)의 논리가 과학기술에도 그대로 적용돼 1950~58년의 건국후 부흥기나 1962~65년의 정책조정기, 그리고 1978년 이후 개혁기에는 '전'의 논리가 주류를 이루면서 과학기술이 고양되는 시기였다면, 1959~61년의 대약진 운동기나 1966~76년의 문화대혁명기에는 '홍'의 논리가 앞서는 과학기술의 정체기라고 말할 수 있다.
발전과 담보의 발자취
1950~58년까지 건국 후 부흥기에는 근대적 과학기술의 요구가 증가되면서 소련의 과학기술 시스템을 본뜬 광범위한 하부구조가 건설됐다.
건국 직후 열악했던 과학기술상황은 1958년 9월 원자핵반응장치를 완성할 만큼 초기의 기반을 착실히 쌓아 나갔다. 그 이전과는 달리 급속한 발전속도를 보일 수 있었던 원인은 소련의 적극적인 선진기술의 원조와 전학림, 이사광, 조충요 같은 뛰어난 과학자들의 잇따른 귀국이었다. 특히 소련의 기술원조는 대부분 국방관련 기술부문에 이루어져 이후 중국이 항공우주, 핵, 전자 등에서 강점을 보일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50년대 말 중소의 대립으로 일체의 원조가 중단됨에 따라 '대약진운동'으로 대변되는, 모택동 사상에 입각한 독자적인 중국식 사회주의가 모색됐다. 그동안 기초가 다져지기 시작한 과학기술계에도 많은 영향이 가해진다. 즉 15년 이내에 영국을 따라 잡겠다는 목표아래 과학기술성과도 조기달성해야 한다는 '과학약진운동'이 전개됐던 것이다. 연구개발과정에서 오히려 비전문가인 당간부가 주도함으로써 정치운동이 과학실험을 지휘하는 오류가 계속됐고, 기술민족주의, 자력갱생전략의 추구로 외국으로부터의 기술도입을 전면 중지했다. 결과는 화려한 구호속에 혼란과 무질서만 가중되는 정체기를 맞게 된다.
1962년, 조정국면에 들어섬에 따라 중국과학계에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던 '과학약진운동'도 종지부를 찍었다. 이후 65년까지 중국의 과학기술계는 제궤도를 찾게 되면서 화학 전자 핵에너지 미사일 등 국방기술 분야의 성과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중국공산당은 건국 후부터 과학자일지라도 이데올로기로 무장돼 있어야 한다는 이른바 '쌍홍쌍전'(雙紅雙專)의 기본 입장때문에 과학자의 정치집회 참석, 자아비판을 요구했다. 그러나 1961년 이후 정책조정기를 거치면서 과학자는 6분의 5에 달하는 시간을 연구에 투입해야 한다는 규정 덕분에 연구환경은 탈정치적이 됐다.
그렇지만 이 과학자의 '붐'은 '문화혁명'(66~76년)과 함께 사라졌다. 기초이론연구가 전면 중지되고 기술인원들은 현장노동에 투입됐다. 대외 과학기술교류도 대부분 중단됐고, 연구활동에 필요한 문헌 정보 기자재등이 사실상 전면 파괴됐다. 특히 기술혁신과 노동생산성 향상에 대한 일체의 인센티브가 부르주아적인 것으로 간주돼 전반적인 기술답보 상태를 면치 못했다. 문혁은 중국의 경제건설을 제자리걸음 시켰을 뿐 아니라 과학기술면에서도 오늘의 중국에 커다란 후유증을 남기는 원인이 됐다.
1976년 10월, 4인방의 숙청과 77년 8월 문혁의 종결, 등소평의 복권을 계기로 중국의 과학기술은 본격적인 도약의 태세를 갖추어 나갔다. 등소평은 실용주의 노선을 제기하면서 국가건설에 필요한 것은 '과학기술'이지 '정치'가 아니라고 보고,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국가의 운명과 앞날에 관계되는 지위'로 끌어 올렸으며, 국가현대화의 열쇠는 과학기술역량에 담겨 있음을 강조했다. 이와 같은 기조 속에서 중국은 그들의 잠재력을 바탕으로 21세기 선진국으로의 발돋움을 위해 맹렬히 달려 가고 있다.
중국 과학기술의 버팀목 기초과학분야
세계 청소년들의 과학실력을 겨루는 국제과학올림피아드대회의 단골 우승국인 중국은 올해도 예외없이 그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지난 7월에 열렸던 제33회 국제수학올림피아드와 제23회 국제물리올림피아드를 석권함으로써 그들이 가진 탄탄한 기초과학의 토대를 단적으로 보여 주었던 것이다.
실질적으로 지금까지 꾸준히 쌓아올린 기초과학의 잠재력이 향후 과학기술 도약의 중요한 발판으로 작용할 것으로 예상되며, 수학 물리학 화학 지구과학 등의 수준은 세계정상급으로 평가되고 있다. 1991년, 중국과학원이 발표한 제7차 5개년계획 기간(1986~90)중 이루어졌던 세계적 수준의 10대 기초과학 연구성과들도 이러한 자신감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①'우 방법론'(Wu Method)으로 알려진 우웬전의 컴퓨터를 이용한 수치해석이론 ②고온초전도체 연구 ③반도체의 극미결정 구조연구 ④반결정(結晶)연구 ⑤결정의 비선형 광학효과에 관한 입자 유전자이론 ⑥기후 동력학 및 기상 예측이론 ⑦효소활성 유지의 동력학 ⑧해밀튼연산법 ⑨DNA 변성구조의 관찰을 위한 투과주사현미경(TEM) ⑩방사광 가속기의 완성 등이다. 특히 방사광 가속기는 뛰어난 성능과 설치비용의 저렴으로 세계 각국으로부터 가속기의 설계 및 장비구입 요청이 있으며, 현재 포항공대도 중국의 지원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1956년 핵무기개발 결정
중국이 핵무기개발을 결정한 것은 1956년이다. 육해공군 현대 무기의 전면적 개발은 막대한 자금, 자원을 필요로 하고 있어 중국의 경제, 재정적 능력을 초과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파악했던 모택동은 정치적 전략적 이점을 최대로 살릴 수 있는 핵무기 개발에 역점을 두었던 것이다.
1964년 10월, 최초의 원폭실험이 성공리에 끝났다. 핵무기를 제조하는 경우, 원료는 우라늄235나 플루토늄 239를 사용하는데, 일반적으로 우라늄235가 더 많은 비용과 고도의 기술을 요하고 있어, 중국은 플루토늄형일 것으로 예측됐다. 그러나 최초의 핵폭발은 우라늄235를 사용해 이루어졌다. 이것은 군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데, 첫째는 원폭과 수폭실험의 기간을 단축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1966년 12월, 수폭실험 직후 북경방송은 "미국이 7년 4개월, 소련이 4년 걸린 원폭실험과 수폭실험 기간을 중국은 2년2개월밖에 소요하지 않았다"라고 자랑스럽게 보도한 바 있다. 둘째는 원자력 잠수함의 건조를 용이하게 해준다는 데 있다. 원자력 잠수함에는 소형 경량의 농축우라늄 원자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국에서 원자력 잠수함 건조는 1969년부터 시작됐다.
대미 직접 공격력을 강화하려 했던 중국은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 개발에도 전력을 다했다. 그 전단계인 중거리 탄도 미사일(MRBM)은 1966년 10월, 제4회 원폭실험에서 이미 사용됐다. 위성발사능력이 향상됨에 따라 1980년 5월, 사정거리 1만2천8백km의 ICBM이 개발됐고, 이어서 82년 10월, 잠수함의 미사일 수중발사를 성공하는 등 중국의 핵무기개발은 꾸준히 진전되고 있다.
중국의 우주 세일즈
1970년 4월 24일, 주천우주기지를 떠난 '동방홍(東方紅)1호'는 중국의 우주시대를 알리는 서막이었다. 이후 92년 현재까지 29개의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면서 중국은 그들의 항공우주기술을 확고히 다지고 있다.
인공위성의 운반로켓으로 직경 높이 중량 등에 따라 '장정'(長征:Long March)1,2,3,4호와 '풍폭'(風暴:Storm)1호 등이 사용됐는데 1982년 이후 풍폭1호는 사용되지 않고 있다. 중국의 우주개발 노력은 몇번의 기술적인 전환점을 이룬다. 1975년 11월 16일. 4번째 위성이 중국 최초로 회수됐다. 81년 9월 19일, 9번째 발사된 위성은 하나의 운반로켓에 3개의 위성을 싣고 가 궤도에 진입시켰다. 84년 4월 8일에는 정지궤도위성을 쏘아 올렸다. 88년 9월 7일에는 최초의 기상위성을 발사했다.
1984년까지 14개의 위성을 쏘아 올린 중국은 85년, 자신감을 바탕으로 위성발사의 상업화를 선언하고 나섰다. 다른 나라의 위성을 유로로 발사해주는 우주세일즈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이다. 실질적으로 중국은 뒤지지 않는 기술력과 값싼 비용을 무기로 충분한 경쟁력을 보이고 있다. 90년 10월 5일, '아시아새트1호'를 성공적으로 발사한 이래, 92년 8월 14일, 호주의 '옵터스1호' 통신위성도 성공시켰다. 급증하고 있는 통신위성의 수요에 따라 중국의 로켓은 더욱 우주를 누빌 가능성이 커졌다.
중국의 우주개발노력은 이른바 모택동의 '자력갱생'에 따라 스스로의 힘만으로 이룩했다는 데 큰 특징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는 전학림(任學林), 임신민(臨新民) 같은 뛰어난 과학자들과 국가적 프로젝트로 총력을 기울인 중국 지도층의 노력으로 가능했다. 문화혁명의 대혼란기에도 주은래 수상등은 다른 분야보다 훨씬 피해를 덜 입게 했다. "우주기술이야말로 국가능력의 거울이고 국가 번영의 상징"이라는 등소평의 말도 이러한 분위기를 단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다.
첨단산업기술의 현주소
현재 중국의 우주기술은 자체 개발한 위성제작과 발사기술을 보유한 5개국 중의 하나이고, 위성회수기술을 보유한 3개국 중의 하나다. 또한 다연장 위성모켓 발사기술을 보유한 4개국 중의 하나이며, 자체 개발한 중속로켓을 이용해 정지궤도위성을 발사할 수 있는 5개국 중의 하나일 정도로 이 분야에서 높은 위치를 점하고 있다.
중국의 정보통신기술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첫째, 인공위성이나 군수산업의 일환으로 육성돼 컴퓨터 반도체 통신기술 등의 시작은 선진국과 크게 뒤떨어지지 않게 시작됐지만 상품화의 능력이 부족, 전반적인 기술수준이 낙후돼 있는 형편이다. 둘째는 공장이 소규모이고 생산라인이 미미해 양산에 어려움이 있어 생산비용이 높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중국의 컴퓨터 역사는 195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56년에 컴퓨터 연구를 시작해 58년에 진공관식 컴퓨터 제1호기인 '103'을 발표한다. 이때의 컴퓨터 기술은 주로 소련으로부터 도입해 복제품을 만드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중국의 제2세대 컴퓨터는 1965년, 중국과학원 계산연구소에서 '109Z'를 개발함으로써 비교적 짧은 시간에 선진기술을 확보했다. 제3세대 컴퓨터는 71년에 개발한 111기로 IBM 300시리즈가 발표된 7년 후의 일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있어서는 외국과의 교류가 적어 세계 기술변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기종간의 계열화·호환성이 경시됐으며, 경제성이 고려되지 않는 임무달성 제일주의는 많은 문제점을 나타냈다.
컴퓨터의 발달은 80년대에 들어와 급진전되고 있는데, 83년 국방과학기술대학이 슈퍼컴퓨터인 '은하'를 탄생시켰고, PC의 경우, 85년 IBM 호환 기종인 '장성'시리즈와 애플 호환기종인 '자금(紫金)Ⅱ'가 개발됐다. 87년에는 미니컴인 '태극2200'이, 88년에는 'CELL-280' 바이오 컴퓨터가, 91년에는 슈퍼마이크로컴퓨터인 'YH-MAC'이 차례대로 발표됐다. 그러나 반도체 주변기기 등의 품질, 가격 경쟁력이 약해 거의 수입품에 잠식당하는 형편이며, 소프트웨어의 부족으로 기계가동률이 매우 낮은 상황이다.
반도체도 56년 게르마늄 트랜지스터를 개발할 정도로 역사는 길지만 현재 중국의 반도체 기술은 매우 낙후돼 있다. 대부분 보유공정은 바이플라, CMOS3~5㎛등의 가공 수준 정도로 낙후돼 있으며, 웨이퍼 역시 3인치와 4인치 생산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제품생산은 1K 4K 16K S램과 64KD램등 메모리 분야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바이오테크놀로지 분야는 의외로 강점을 갖고 있는 분야로 평가된다. 최근에 발표되고 있는 연구성과를 보면 B형 간염백신, 원형질체 복제 기술, 인간 유전자의 물고기이식(선진국보다 3년정도 앞선 것으로 평가됨), 암세포만 선별해서 없애는 '간암 미사일'등이 관심을 끌고 있다. 특히 전통 한의학과 양의학을 접목시키는 작업은 중국이 새롭게 도전하고 있는 분야다. 그밖에 광통신분야, 레이저, 농업기술 등도 선진국을 만만치 않게 추격하는 분야다.
중국은 선진국에 비해 상당히 뒤떨어져 있다고 판단한 첨단 정보기술의 추격을 위해 국가의 미래를 걸고 육성에 나서고 있다. 2000년까지 선진국 수준에 근접 또는 추월하는 것을 목표로 국제수준의 기술개발을 위한 핵심분야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고 있다. 이것은 '863계획'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기술분야별 8차5개년 계획의 중점분야를 살펴보면 생명공학은 종자개량 신의약개발, 정보기술은 인공지능 광전자산업 광통신 인공위성 모니터링 시스템 등이며 자동화기술에서는 CIM(컴퓨터에 의한 통합생산), 신소재에서는 광통신용 재료개발 등이다.
과학기술 손자병법
중국은 2000년대 중반까지 선진국에 진입한다는 장기적인 전략을 가지고 있다. 탈냉전 이후 새롭게 전개되고 있는 기술전쟁의 흐름을 재빨리 파악하고 있는 중국은 그들의 약점을 보완하고 강점을 살려나가기 위한 새로운 과학기술 손자병법을 들고 나왔다. 그것은 심화돼 있는 기술의 양극현상을 타파하려는 노력이다. 즉 발전된 기초과학이나 거대 과학을 생산기술에 접목시키기 위한 일대 '기술확산정책'을 실시하려는 움직임이다.
중국은 당면한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기술창출도 중요하지만 기술의 활용이 더욱 강조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내용은 과학기술추광계획(科學技術推廣計劃) 성화계획(星火計劃) 화거계획(火炬計劃)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과학기술추광계획은 90년부터 시작된 과학기술 연구결과의 응용을 대폭 확대하려는 시도다. 실지로 연간 1만여건 이상의 새로운 연구결과들 중에서 응용되는 비율은 10% 미만임을 감안해 연구결과의 응용을 확대하고 위한 환경조성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최근 등소평이 '11억 인구중 9억이 농촌에 살고 있으므로 농민생활의 향상 여부가 중국의 사회정국 안정과 직결된다"라고 강조하고 있는데, 성화계획(spark plan)에서도 적정기술의 집중적인 확산을 통해 농업생산량의 8~9% 성장률을 계획하고 있다.
화거계획(torch plan)에서 중점을 두고 있는 사항은 신기술의 대대적인 확산을 통한 전통산업의 개신(renovation), 해안지역과 내륙지역과의 활발한 교류, 대학과 기업의 협력체제 강화, 기술확산을 가속화하기 위한 새로운 기술벨트의 구성 등이다.
이와 더불어 국방기술의 민수전환도 활발히 모색되고 있다. 그동안 국가우선순위에 의해 발전돼 있는 국방기술들을 민간용으로 활용함으로써 국가 경쟁력을 높이려 하고 있다.
중국과학원 우주연구소의 왕덕유는 중국이 언제쯤 유인우주선을 발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주은래 수상의 말을 인용하면서 "우리는 현재 필요한 모든 기술과 능력을 가졌다. 그러나 우주기술의 우선 순위를 아직은 지구 안에 두고 싶다. 지구 밖의 일들은 다음 세대까지 기다리자"라고 답한 바 있다. 지금 중국은 그들이 가진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한발 한발 21세기를 향해 과감히 도전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