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3) 전자파 장해 막을 수 없나

전파환경공학으로 대책모색

EMI의 영향은 집적회로처럼 밀집도가 크고 정밀한 부품을 많이 사용하는 장비일수록 민감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첨단 전파산업에 치명적인 적으로 대두되고 있다

걸프전에서 이라크에 대한 다국적군의 대규모 공습이 있기 전날, 이라크와 그 주변지역에서는 모든 통신수단이 두절되고 심지어는 방송까지도 청취할 수 없는 극도의 전파방해현상이 있었다고 보도된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이후 감행된 공습에서 이라크의 방공레이더망이나 주요 전략통신체계는 전혀 공습사실을 감지하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이 작전에서 다국적군이 택한 전술은 ECM(Electronic Counter Measure)이라는 고도의 전자전술로서, 강력한 전자파를 쏘아 레이더나 통신전파를 교란함으로서 그 기능을 마비시키는 방법이다.

이처럼 전파는 다른 전파에 방해를 주거나 거꾸로 방해를 받을 수가 있다. 전파에 의한 장해의 유발은 동종의 전파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각종 전자장비 심지어는 인체에까지 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때 장해의 용인이 되는 전파는 걸프전의 일화에서와 같이 고의적으로 만들어진 것 뿐만이 아니라, 우리 일상에서 늘 사용하고 있는 전기전자기기들에서 늘 발생하고 있고, 오히려 후자의 경우가 더 많고 더 심각하다고 말할 수 있다.

더구나 전자기술의 비약적인 발달로 산업현장이나 군사시설 혹은 일반 가정생활에까지 각종 전자기기의 보급과 사용이 크게 늘면서, 전자파로 인한 피해의 양상과 정도는 더욱 다양화되고 심각해지고 있다. 다행히도 이러한 피해사례를 연구하고, 그에대한 원인규명과 효과적인 방지책을 다각적으로 모색하려는 노력들도 꾸준히 이어져, 이제는 하나의 새로운 학문분야로까지 발전해 가고 있는 상황이다. 이를 '전자기환경의 양립성'(electromagnetic compatibility) 혹은 '전파환경공학'이라고 하는데, 흔히 영문약자를 따서 'EMC'라 부르고 있다.

대부분의 전자장비가 작동하고 있을 때는 다양한 형태의 전자파가 외부로 흘러나오게 된다(이렇게 전파가 흘러나오는 현상을 radiation 즉, 복사라 한다). 이들 중에는, 안테나처럼, 외부로의 정보전달을 위해 의도적으로 발생시킨 것도 있지만, 의도와는 무관하게 발생되는 누설전파의 형태도 있다. 일단 복사된 전파는 각종 전자장비들에 무차별하게 피해를 입힐 수 있다. 예를 들어 자동차 점화플러그의 전원장치에서 발생된 불필요한 전자파는, 차 내부의 전자제어장치에 침투하여 오동작을 유발시킨다거나, 주변의 텔레비전수상기에 섞여 들어가 화질을 떨어뜨리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전화선을 타고 통화상태를 방해하기도 한다.

몇 해 전에 실제 있었던 사건으로, 일본의 야마나시현에 있는 공장에서는 컴퓨터로 제어하는 자동선반이 갑자기 이상을 일으켜서 옆에서 지켜보던 작업자를 숨지게 한 사고가 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공장 내에 있던 크레인에서 발생한 방전이 전자파를 발생시키고, 이것이 자동선반의 제어회로에 침투해 사고를 일으킨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전자파가 전자기기에 피해를 유발시키는 것을 '전자파장해'(Electromagnetic Interference)라 하며, 줄여서 EMI라 부르기도 한다. EMI의 영향은 집적회로(IC)처럼 밀집도가 크고 정밀한 부품을 많이 사용하는 장비일수록 민감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소형화 고집적화 다기능화를 지향하는 오늘날의 전자산업에 있어서는 가장 치명적인 장해요소로 대두되고 있다.
 

전자파차폐기능을 가진 플라스틱을 전자현미경 1백배 배율로 관찰한 사진. 꼬여있는 실가닥은 알루미늄 등을 소재로 한 도체 섬유로 이것이 그물처럼 얽혀 전자파 방출을 막는다.


인체 모세혈관 없는 곳 피해 커

 

전자파에 의한 피해는 비단 전자장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인체나 각종 생명체에도 직접적인 위협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생체에 대해 전파가 미치는 영향은 주로 유전가열에 의한 열작용으로 설명되고 있다. 생체조직은 전기적으로 중성이지만 외부에서 전기장을 가하면 조직을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분자 내부에 있던 전자들이 외부전기장의 양극(+)쪽으로 향하고 나머지 부분은 음극(-)쪽으로 향해, 모든 분자들이 한 방향으로 정렬하게 된다. 이를 분극자라고 하는데, 이렇게 분극이 되어 미시적으로 극성을 갖게 된 것을 분자쌍극이라고 부른다. 이때 외부전기장의 극성배치방향이 바뀌면, 분자쌍극자들도 바뀐 전기장의 방향에 따라 재정렬하게 된다. 하나하나의 분자쌍극자의 움직임은 지구자기의 방향을 찾아 나침반의 바늘이 움직이는 것과 유사하다.

이 과정에서 각 분자 쌍극자들 사이에서는 마찰이 일어나 열이 발생한다. 만약 외부전기장의 극성방향을 바꾸어 주는 빈도를 매우 빠르게 하면, 그 발생열은 대단한 정도로 증가해 조직 전체가 가열될 수도 있다. 특히 물분자는 전기장이 가해지지 않은 상태에서도 분자쌍극자의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물을 많이 함유한 물질일수록 가열효과가 월등히 크다. 이러한 가열의 원리를 유전가열이라 하는데, 극성이 빠르게 바뀌는 전기장이란 바로 전파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때 전파의 세기가 강하고 주파수가 높을수록 가열효과가 커지게 된다.
 

가정에서 조리에 이용하고 있는 전자레인지는 바로 이러한 가열원리를 유용하게 이용한 것인데, 사용되는 전파의 주파수는 2450㎒로서 1초동안에 49억 번의 극성변화를 줄 수 있으며, 그 세기는 수백 와트 수준에 이른다. 이 정도라면 1리터 정도의 물을 5분 이내에 끓게 할 수 있다. 만약 이런 정도의 전파가 제대로 가두어져 있지 않고 밖으로 새어 나온다면 어떤 상황이 초래되겠는가? 전파가 새어 나오는 곳에 놓아둔 생선이나 고기 등이 먹기좋게 익을 정도가 될 수도 있다. 그 주변에 사람이 서 있다고 할때 어떻게 될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새어나오는 전파의 세기가 약하다거나 그 부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해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전혀 영향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물론 충분한 안전설계와 엄격한 누설시험을 거쳐 제작된 것이어서 그런 염려를 할 필요는 없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그 구조가 변형되었을 때는 즉시 사용을 중지해야만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다.


전파 열작용으로 암세포 퇴치하기도

전자레인지 뿐만 아니라 우리는 다양한 종류의 전파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크든 작든 전파로 인한 열작용을 늘 받고 있다. 특히 방송 송신탑이나 레이더 시설 등에서 장기간 근무를 하거나 심지어 카폰을 오랫동안 이용하는 사람들은 각별히 그 안전성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인체에서 비교적 외부에 드러나 있는 부분들, 그 중에서도 특히 모세혈관의 분포가 적은 곳일수록, 전파의 장기적인 열작용에 의한 피해를 받기 쉬운 것으로 조사되어 있다. 아무래도 전파의 침투깊이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난 부분에서의 영향이 더 심하고, 모세혈관이 없는 곳에서는 혈류의 순환에 의한 냉각작용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피해가 커진다. 이러한 특징을 갖는 대표적인 인체기관은 안구의 수정체와 남성의 생식샘이다. 2차대전 중에 레이더 시설에 종사하던 미군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백내장이나 녹내장 등의 수정체 이상과 불임증 등의 생식샘 이상 증세가 가장 많이 발견되었음은 주목할 만하다. 몇 해 전에는 국내의 유명한 전자회사에서 레이더 개발에 참여하던 연구원이 한쪽 눈의 백내장으로 실명상태까지 갔다가, 결국 인공수정체로 이식수술을 받고 시력을 회복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전파의 열작용은 이렇게 해로운 면만 있는 것은 아니고, 여러가지 유용한 용도에도 이용되고 있다. 전자레인지로의 응용이 그러하고, 요즘에는 살균이나 건조 심지어는 암치료 분야에까지 그 유용성을 확장하고 있다. 특히 전파의 열작용을 이용한 암치료법으로 하이퍼서미아 요법(hyperthermia therapy)이 각광받고 있다. 이는 전자파의 유전가열에 의한 발열효과가, 혈관발달이 잘 된 정상세포보다 혈관분포가 거의 없는 종양조직에 선택적으로 가해져, 암세포를 효율적으로 파괴할 수 있다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거리상 멀면 일단 안전
 

(그림1) ANSI 안전기준 (1982년)


위협적인 전파원으로부터 중요한 전자장비나 우리 신체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가장 손쉬운 것은 전파원을 멀리하는 것이다. 전파는 복사된 지점으로부터 멀어질수록, 그 에너지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여 감소하기 때문이다. 1982년 미국의 국립표준연구소(ANSI)에서는 여러가지 실험결과를 토대로 하여, (그림1)에 인용된 전자파의 안전기준을 규정한 바가 있다. 예를 들어 전자레인지의 사용주파수인 2450㎒는 5mW/㎠이하로, VHF TV 방송주파수대에서는 1mW/㎠이하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수치는, 전자레인지의 문짝 틈새 부근과 1백KW출력의 TV송신 안테나로부터 약 30~40m 부근에서 측정될 수 있는 세기다. 이 정도라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는 문제될 만한 전파에 노출될 기회가 그리 흔치 않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위의 기준보다 낮은 에너지의 전파라 할지라도 장기적으로 접하게 되면 충분한 위험요소가 될 수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컴퓨터모니터를 오래 다루고 있으면 눈이 침침해짐을 느끼게 된다. 미약한 전자파라지만 지속적인 열작용이 누적된 때문이라 볼 수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전자파중화제니 뭐니 하는 터무니없는 물건을 사용한다든지 하면서 안심했다가는 치명적인 장애를 초래할 수도 있다.

또 한가지 방법은 차폐(shielding)다. 이것은 전파원과 피해를 입을만한 대상을 전기적으로 격리시키는 방법이다. 전파는 도체를 투과할 수 없다는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피해대상이나 전파원 자체를 도체판으로 감싸주면 된다. 굳이 완전한 도체판이 아니고 여기저기 구멍이 뚫린 도체라도 특정한 주파수에 대해서는 충분한 차폐의 효과를 볼 수 있다. 전자레인지의 문에는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는 구멍들이 뚫려 있지만, 마이크로파는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구멍의 크기를 정확히 계산하여 설계해 놓은 것이다. 또 가느다란 도체섬유로 촘촘히 짜여진 모기장형태의 재료를 플라스틱판 등으로 고정시켜, TV수상기나 컴퓨터모니터 등의 화면에 보안경으로 이용하면, 마이크로파 이하의 전파에 대해 대단한 차폐효과를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안전책은 사실을 보다 정확히 인식하고 해결하려는 노력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긍정적인 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문제를 간과해서도 안되거니와, 부정적인 면만을 침소봉대하는 것도 경계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벌집모양의 정밀 차폐망


텔레비전 속의 유령

여기저기 고층건물들이 생기면서 텔레비전에 유령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아니, 큰 산을 근처에 둔 집에서는 벌써부터 살고 있던 유령이다. 이녀석들은 텔레비전만 켜면 어김없이 나타나 시청을 방해하고 성가시게 굴지만, 누구를 겁준다거나 해치는 일은 없다. 텔레비전을 끄면 소리없이 사라지는 이들은 바로 화면상에 때로는 희미하게 때로는 또렷이 겹쳐서 나타나 시청을 방해하는 겹상(像)이다. 이 겹상을 학문적으로는 영어로 고스트(ghost)라고 부르는데 유령처럼 희미하게 보인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고스트가 생기는 원인은 전파의 반사현상에서 찾을 수 있다. 전파는 물체에 부딪치면 반사하게 되는데, 산이나 큰 건물 따위에서 반사된 전파가 고스트를 만드는 주범이다. 송신안테나에서 직접 도래하는 전파와 반사되어 오는 전파는 그 비행거리에서 약간의 차이가 나게 되는데, 아무리 빠른 전파일지라도 1백만분의 몇초 만큼은 도달시간의 차이를 갖게 마련이다.(1백만분의 1초는 1마이크로초라 한다.)

만약 비행거리의 차이가 3백m라면 도달시간차는 1마이크로초가 된다. 한편 텔레비전신호를 화면에 그림으로 그려주는 주사선이, 화면의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 한번 진행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50마이크로초다. 따라서 1마이크로초 만큼 늦게 들어온 반사파는 직접파에 의한 원화면이 그려지고 나서 1마이크로초 만큼 진행된 위치에 그려지게 되는데, 이는 화면 넓이의 약 50분의 1만큼 떨어진 위치다. 이 정도라면 확실한 이중화면 즉 고스트가 우리 눈에 보이게 된다. 반사파가 여러 개라면 그 개수만큼의 고스트가 생길 수도 있다. 화면상에서 고스트가 생긴 위치를 측정하면 계산을 역으로 수행해 반사를 일으킨 원인을 찾을 수도 있는데, 이는 레이더의 원리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어서 흥미롭다.

이웃 일본에서는 큰 건물의 외벽에는 반드시 전파흡수체를 발라 반사파가 생기지 않도록 규제하고 있고, 한편으로는 전자공학적으로 고스트를 제거할 수 있는 장치를 개발하고 있다. 현재의 기술수준으로는 이 장치의 가격이 TV수상기보다 비싸지만, 멀지않아 실용가능한 고스트제거기가 등장할 것으로 기대된다.

1992년 02월 과학동아 정보

  • 허정 교수

🎓️ 진로 추천

  • 전자공학
  • 컴퓨터공학
  • 정보·통신공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