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의학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의약품 관련 임상실험을 수행하며, 해외의 우수의학자를 유치할 수 있는 종합의학연구기관의 설립이 시급하다.
가까운 일본의 1인당 국민총생산액이 5천달러에 육박했을 때 각종 연구소들이 우후죽순처럼 세워져 창의성을 발휘함으로써 오늘날의 일본을 이루는 버팀목이 됐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앞으로 국민소득 1만달러 내지 1만5천달러를 누리는 고도산업사회를 이룩해내려면 지금부터 각 분야에 걸쳐 과감한 연구개발투자가 이뤄져야 함은 누구나 동감할 것이다. 의학분야에 국한된 얘기이지만 매년 단기간이나마 한국을 방문, 한국의 의학연구현황을 선전제국의 상황과 비교해 왔던 필자로서는 지금이야말로 국가적인 사업으로서인 종합의학연구기관의 설립을 서둘러야 할 때임을 느끼게 됐다.
미국의 대표적 종합의학연구소는 보건부산하에 있는 국립보건원(National Institute of Health, NIH)인데 여기에는 12개의 독립적인 질환을 다루는 연구소가 있다. 지금도 이곳에서는 노벨상을 받은 최고수준의 학자들이 각 분야의 책임을 맡아 최첨단의학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전국 각 대학연구비의 60%가 이 NIH를 통해 지급되고 있고 기초적인 연구뿐 아니라 부속병원에서는 임상적인 연구도 활발히 수행하고 있다.
필자도 미국 미네소타대학에 봉직하면서 4년간 NIH의 연구자금심사위원으로 일했다. 1년에 세번 워싱턴 근교의 베데스다에 있는 NIH 본부에 가서 출장심사를 했는데 이 기회를 통해 NIH가 주도하는 각종 연구분야의 현황과 연구자금지급 결정과정을 지켜보곤 했다.
결국 미국의 기초 학문분야의 연구자금은 대부분 NIH와 국립과학재단(National Science Foundation, NSF)을 통해서 지급되는 셈이다. 과학의 여러 분야중에서 의학과 관련된 부분은 대개 NIH를 경유해 지출되는데 이 예산은 연간 약 80억달러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에 필자는 직장동료이자 의공학과(biomedical engineering) 주임교수인 블랙셔(Blackshere)교수와 점심을 같이 할 기회가 있었다. 곧 이어 그의 초청을 받아 의공학세미나에도 참석해 보았는데 의공학은 미국에서도 비교적 새로운 분야이고 산학협동의 표본적인 분야라고 여겨졌다.
의공학 세미나를 참석해 보니…
그 의공학 세미나에서는 흔히 DDS(Drug Delivery System)라고 알려져 있는 약물투여방법에 관한 새로운 사실들이 발표됐다. 체내에 이식한 펌프를 통해 소량의 약물이 필요한 때 필요한 만큼 배출되도록 컴퓨터로 프로그램해 놓은 것이 눈길을 끌었다. 또 특수항체와 결합시킨 항암제를 주사, 암세포만을 파괴시키는 방법도 소개하고 있었다.
그중 전자는 당뇨병의 인슐린요법을 훨씬 간편하게 할 것으로 보였다. 아울러 혈당치(血糖値)의 변동에 따라 더 정확한 양의 인슐린을 투여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후자는 각종 항암물질의 투여방법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수많은 당뇨병환자와 암환자를 생각할 때 더 효과적인 치료방법의 개발은 시급하고도 긴요한 문제다. 아무튼 이 분야가 아직도 미개척분야이고 장래성이 있는 분야임을 세미나에 몇번 참석함으로써 새삼 인식하게 되었다.
미국 내에서도 규모가 큰 전자회사 중역으로 근무하다가 최근 한국의 유명 전자회사의 책임자로 자리를 옮긴 필자의 친구가 들려준 얘기는 한마디로 충격적이었다. 그는 한국산업의 최대고민은 선진대열과 경쟁할 수 있는 아이디어와 훈련된 인력의 부족이라고 잘라 말했다.
아마도 이러한 간격을 짧은 시간내에 극복하려면 우리 국민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조직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장기적 안목의 연구기관을 육성해 나가는 길 밖에 없을 것이다. 현재 각종 질환의 진단 치료에 필요한 기초적인 이론과 그것을 제품화한 첨단의 의료기기 및 의약품은 전세계적으로 끊임없이 연구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분야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된다.
한국이 이제 중진국을 벗어나 선진국으로 도약하려는 이 시점에서 볼 때 기초의학 연구진흥 및 응용을 위한 새로운 기구의 창설은 시급하고도 긴요한 일이다. 이 종합연구소는 기존연구소가 다루지 않고 있는 분야, 특히 기초의학지식의 임상적인 응용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런 연구소가 설립되려면 무엇보다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겠지만 만약 정부의 투자여력이 부족하다면 민간자본에도 문호를 개방하는 자율적 체제가 바람직하다. 새 연구소는 기존연구소와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하고 또 대학과도 협력관계를 이뤄 대학원 학생의 파견연구 및 시설이용을 통한 산학공동연구가 원활하게 수행되는, 즉 효율적인 운영이 가능한 체제를 갖춰야 할 것이다.
기초의학기술은 많이 낙후돼 있어
필자가 좋은 모델로 꼽고 있는 외국의 예는 이스라엘의 와이츠만연구소(Weizman Institute)다.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태계 학자들이 이 연구소에 수시로 드나들며 최신지식을 공급하고 후진들을 양성하고 있다. 그들은 조국에 최신의학정보를 제공한 뒤 되돌아가서 다시 연구에 몰두하는데 때로는 와이츠만연구소에서 인연을 맺은 학생들을 데리고 가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기도 한다.
이런 연구소가 있어야 국제적인 학자교류가 활발해지고 우리의 의학수준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수준에 도달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지금 의료보험의 확대를 통해 전국민에게 골고루 의료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제도와 시설을 확충해 나가고 있다. 이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이러한 양적인 면에서의 팽창과 함께 그 질적인 면을 보장할 수 있는 종합적인 의학연구체제가 하루빨리 정립되기를 기대해 본다.
의학의 발전정도는 그 나라의 복지수준 더 나아가 국력의 기준이 되고 있다. 현재 국내의학의 임상기술 수준은 어느 정도 세계수준에 도달해 있으나 기초의학 연구체제는 아직도 산만하게 진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는 의학분야에도 우리의 경제력 향상에 상응하는 투자가 과연 이뤄지고 있는가를 반성해 볼 시점이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지 말고 새로운 아이디어에 도전할 수 있는 창조적인 두뇌집단을 조직적으로 육성 영입 활용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얘기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종합의학연구소는 생명과학을 다루는 기존의 여러 연구소와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고 공동연구의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 또 질병의 기초의학적 규명에 그 중점을 둬야 할 것이다. 이 연구소는 또한 국민보건상 가장 중요시되는 질병의 연구와 기초적인 통계자료 수집에도 열중해야 한다. 아울러 의약분야의 노다지라고 할 수 있는 특허의 획득에도 적극 참여, 새로운 의료기와 의약품에 대한 임상실험을 수행할 뿐 아니라 세계시장으로의 진출을 돕는 기관으로 육성돼야 할 것이다.
이처럼 광범위한 분야를 다루는 연구기관의 설립은 세계각국에서 첨단적인 연구활동을 수행하고 있는 한국계 의약분야 연구자들의 귀국기회를 마련해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배출되는 유능한 의약분야 학자들을 대거 수용, 그들의 연구의욕을 높여주는 도장(道場)으로도 유용할 것이다.
의약분야는 날로 세분화되고 있으므로 첨단기술의 습득 및 개발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요청된다. 만일 뜻있는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 이같은 종합의학연구기관을 세운다면 이 연구소는 가장 알찬 연구기관의 하나로 성장할 것이다. 그것은 다가오는 21세기를 맞이하는 또 하나의 새로운 준비작업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