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산 전전자교환기 TDX가 외국산 교환기를 대체해가고 있는데 비해 국산 중형컴퓨터 타이컴은 왜 수요자가 없어 사장될 위기에 몰리고 있는가? 한때 세계적인 PC 수출국이던 우리나라가 최근 수출부진으로 쩔쩔매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나라 과학 기술 중 설계분야는 매우 취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생산기술은 뛰어난데 설계기술이 매우 취약하다는 말은 외국에서 설계 및 제품생산도면을 도입해 저렴한 인건비와 우수한 생산기술로 가까스로 상품을 생산해 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따라서 최신 설계 도면은 선진국의 기피현상으로 설계하기 힘들고 자체 확보에는 시간이 걸리므로 항상 한발 뒤떨어진 제품을 생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컴퓨터 기술분야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나라의 개인용 컴퓨터(PC) 생산은 한때 세계적이었는데 누구도 그 PC를 우리가 설계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즉 이미 해외에서 설계 개발된 소프트웨어를 들여와 거의 표준화된 하드웨어보드를 생산 조립해 공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프트웨어 로열티 지급, 해외의존 부품비용 등을 제외하면 경쟁력 우위가 다 떨어져나가 현재와 같은 수출부진에 허덕이게 된다.
마이크로나 중형급 이상은 어떤 상태인가. 현재까지 중대형컴퓨터는 전량수입 의존이고 마이크로(소형급)는 세계적인 표준화경향에 힘입어 하드웨어 보드 생산 및 조립과 외국 표준소프트웨어이식, 그리고 일부 응용소프트웨어를 자체 개발하고 있다. 중형 부분에서는 이제 막 행정전산망용 주전산기인 타이컴의 국내 개발로 자체 하드웨어 설계 개발(부품 칩 및 입출력장치 제외) 및 일부 시스템 소프트웨어 설계 개발이 포함된 방대한 소프트웨어의 개량 및 이식 등이 이루어진 상태다.
컴퓨터로 컴퓨터를 설계
그러면 '이제야 말로 기술개발에 투자해야 한다' '자체 설계기술을 확보해야 한다' '고부가가치 기술인 핵심 설계가 확보돼야 한다'라는 이구동성의 주장이 왜 그렇게 실현되기가 어려운 것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설계기술의 확보는 여러 분야의 성숙한 과학 기술이 상호 연계돼야 되고 이를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과 투자가 요구되므로 쉽지 않다는 점 때문이다. 더구나 이렇게 이루어진 설계기술은 다음 단계인 개발기술과 연결되어야 하고 궁극적으로 상품화생산기술로 이어져야 하는데 그렇다고 반드시 사업에 성공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업가 입장에서 보면 위험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위험성을 회피해 손쉬운 도입 및 생산에 전념하는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다.
설계도 한두명이 집중적으로 할 수 있는 것에서 부터 여러명이 분야별로 나누어해야 하는 것이 있다. 컴퓨터 분야처럼 복잡하고 첨단기술을 요하는 것은 여러명이 나누어 하는 것이 보통인데, 최근에는 분야별로 표준화 동향이 강해 표준에 따라 설계하면 후에 통합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설계작업에도 잘 조화된 협동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특히 한번 잘못된 설계는 오류가 한참 뒤에 밝혀지기 쉬우므로 설계시에 서로의 의견이 틀린다든지 설계 검증시 설계자만의 고집이 강하다든지 하는 것은 자칫 팀 활동을 깨는 요인이 되기 쉽다.
최근에는 설계 보조도구를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에 따라 설계 속도 및 정확성이 좌우된다. 컴퓨터를 설계하는데도 CAD(컴퓨터이용설계)의 활용이 점점 중시되고 있다. 즉 컴퓨터 설계개념에서부터 구현 직전단계까지 자동화된 도구를 이용하는 것이다. 컴퓨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설계시부터 개념적인 설계를 개념언어로 표현하여 CAD에 의해 점차 구체적인 상세언어 및 도면작업으로 들어가는데 하드웨어 CAD의 경우는 상세화 단계별로 모의실험(simulation)을 미리 해보아 오류 등을 사전에 발견한다.
하드웨어 CAD의 경우 발전속도가 매우 빨라 이제는 하드웨어 기술언어(HDL, Hardware Description Language)라는 고급언어를 이용하면 중간모의실험 등을 거쳐 반도체칩까지 자동설계된다. 이에 비해 소프트웨어 개발도구는 아직 보급이 완만하다. 소프트웨어 공장 또는 소프트웨어공학 분야 등에서 소프트웨어 자동 생성을 위한 설계 개념언어나 도구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나 아직 보편화돼 있지는 않다. 일부 상품화 된 것으로는 CASE(Computer Aided Software Engineering) 도구들이 있다.
이처럼 설계를 위해서는 설계자 자체의 능력을 비롯해 협동작업과 고도의 설계도구를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가 중요하다. 우리나라 경우 컴퓨터 분야의 설계능력을 가진 전문가도 아직 드물고, 협동작업의 경험이란 대형 프로젝트 경험이 있어야 정착되는데 이러한 개발이 일천한 상태다. 또한 협동작업이란 교육 등 일반 사회문화적인 영향을 많이 받으므로 우리 나라의 평소 교육 문화 습관 등이 알게 모르게 모두 반영된다. 고도의 설계도구 활용은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많이 활용되고 있다.
설계전문가가 따로 있어야
설계활동은 개발을 전제로 할 때 존재하는 사항이다. 이것은 과학이나 기술자체의 향상과는 다르다. 즉 최종 만들어질 물건을 전제로 한 활동이므로 아무리 뛰어난 과학이나 기술이 별도로 존재해도 제품 과정에서의 설계단계를 고려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게 된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말이다. 설계는 설계전문가가 따로 있고 풍부한 현장 개발 경험이 없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경우 컴퓨터 관련 학자가 교수 등 상당수 있고 전문가라고 하는 인력도 그런대로 있으나 이들이 설계 활동에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렇다고 기초 과학이나 기술이 없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설계자는 끊임없이 이러한 기술을 이용하고 고려하며, 또한 궁극적으로 만들어질 제품의 성격과 제품개발 과정 모든 것을 설계시 고려하고 반영해야 한다.
설계가 이루어져도 상품화를 위한 별도 노력이 없으면 제대로 성공하기 어렵다. 이미 설계시에 상품화를 위한 고려사항이 들어가야 하고 마케팅이나 유지보수를 위한 여러가지 사항을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설계를 위해서는 과학이나 기술적 개념이 각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제품의 개발과정상에서 종합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이것이 무너지면 '유럽은 기초과학, 미국은 설계, 일본은 엔지니어링'이라는 현실에서 과히 틀리지 않는 우스갯소리도 나오게 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상품을 만들어 팔아 돈을 버는 곳은 일본밖에 없다는 의미다. 상품가치를 위해 모든 과학기술이나 설계활동이 연계되어야 한다는 좋은 예다.
현재 우리나라는 개발과정 가운데 모든 부분이 아직 취약한 형편이나 최근 들어 대형과제의 출현 등으로 이제 개념을 정립중에 있다. 특히 컴퓨터 분야의 과제가 상당히 많이 있었으나 대체로 이론이나 기초실험 등 논문 발굴을 위한 수준에서 머무르고 본격적인 컴퓨터 설계에는 못미치고 있다. 한편 해외에 있는 한국 과학자들이 주로 미국 등지에서 새로운 개념의 컴퓨터 등을 설계해 한국의 파트너를 찾는 경향도 생기고, 반대로 한국의 기업이 설계부분은 미국 등과 공동으로 하고 생산을 국내에서 하는 시도가 생기는 등 설계분야에 대한 인식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TDX와 타이컴
설계란 개발품을 전제로 하므로 개발품은 목적이 있어야 한다. 대체로 컴퓨터 분야에서는(다른 분야도 비슷) 개발에 따른 요구사항이 지정된 한 곳에서 주문적으로 오는 경우와 요구사항 자체를 스스로 정립하는 경우로 나눌 수 있다.
주문적으로 오는 경우는 이미 수요가 정해져 있어 수요처에서 사용자 요구사항을 제시하게 돼 있고, 개발자는 이를 기술적인 요구사항으로 변환해 결국 개발을 하기 위한 설계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이 경우는 수요가 이미 있으니 개발을 위한 설계 기술에 힘을 기울이면 된다. 우리나라 경우 이와 같은 예는 전자교환기(하나의 큰 특수용 컴퓨터라고 볼 수 있음) TDX 개발사업이 대표적이다. 외국의 경우 미국 국방부에서 주문하는 특수 컴퓨터나 대기업이 자체 시스템의 일부로 컴퓨터가 독특하게 필요할 경우 이런 개발을 하게 된다. 설계기술이 빠진채 생산만 하여 주문자에게 제공할 때 주문자상표생산(OEM, Original Equipment Manufacturing)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이러한 형태를 현재까지 많이 취해 왔다.
반면 요구사항을 스스로 도출해 설계 개발에 들어가는 경우는 컴퓨터 사업을 독자적으로 하는 경우인데, 이 경우는 시장조사를 시작해 시장의 분류와 성장지수, 그리고 회사가 목표로 하는 시장점유율을 기반으로 요구사항을 만든다. 이때 잘못된 요구사항은 결국 상품성 및 마케팅의 실패로 나타나므로 올바른 요구사항이 매우 중요하다. 시장요구사항(사용자 요구사항이 내포)이 정립되면 개발 생산 상품성 등을 감안한 설계에 들어가는 것은 주문적 경우와 같다.
우리나라에서 자체 설계개발한 중형컴퓨터 타이컴은 외형적으로는 행정 전산망용이므로 정부에서 요구한 주문적 성격을 띠고 있으나 이러한 요구사항을 정확히 사용자 입장에서 정립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므로 개발자가 요구사항을 도출해 해외의 중형컴퓨터와 수준이 같은 시스템을 설계한 절충형 요구사항 형태가 되었다.
머나먼 상품화의 길
얼마전까지만 해도 과학 기술 및 설계 개발 상품화 과정이 모두 별개의 고유 기술사항으로 상당한 시간이 걸려야 전과정을 거칠 수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국제적 경쟁이 심화됨에 따라 이와같은 개발 주기는 점차 짧아지게 되었다. 특히 컴퓨터의 경우는 예전에 5~6년이던 제품주기가 최근에는 2~3년도 길다고 하는 형편이다. 그러므로 설계 개념도 상당히 바뀌어, 전에는 개발자 생산자가 설계도를 받아 그때의 상황에 맞추어 변경하던 것을 이제는 아예 최초 설계시 모든 사항을 미리 반영해야 하는 형편에 이르렀다. 미국 IBM의 경우 반도체 기술이 일본에 뒤지자 설계와 생산을 예전에 별도로 하던 것에서 그 중간단계인 제조연구(MR, Manufacturing Research) 조직을 별도로 두어 제품 주기를 조정함으로써 경쟁력을 유도하고 있다.
특히 컴퓨터 설계시 하드웨어의 경우 개발과정에서 시험과정을 반영한다거나 생산시설을 고려한 물리적 제한 조건의 반영 등 많은 부분을 미리 감안해야 하는데, 이러한 부분은 전 과정을 개발 제조해본 경험이 없이는 아주 어려운 사항이다.
또한 설계는 요구사항이나 개발과정 등에서 변경해달라는 요구가 자주 일어난다. 또는 설계시 아직 완벽한 기술이 축적되지 않아 오류설계도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사항은 부분적 설계 변경이나 중간에 설계 변경등을 요구하는데 우리나라와 같이 설계경험이나 기술 인력 등이 부족한 상황에서는, 미리 잘 정리된 것을 가정한 외국의 경영 기법보다는, 여러 상황에 잘 대처할 수 있는 기동인력(task force) 등을 적절히 이용해 과도기적 상황을 극복해야 할 것이다.
설계기술의 정착은 과학 기술의 꽃이라 할 수 있다. 이 부분의 정착없이는 선진국으로 진입을 바라볼 수 없다. 상대적으로 취약한 컴퓨터 설계기술의 확보는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설계기술도 결국 상품으로 성공을 할 수 있어야 존재가치가 유지될 수 있으므로 종합적으로 고려되어야 하겠다. 미국의 유수한 컴퓨터 회사인 휴렛팩커드(HP)의 경우 연구소에서 시작이 이미 응용연구이고 여기서 개발 단계로 넘어가는 과제가 30%, 또 개발에서 상품화로 넘어가는 것이 80%라 한다. 이 상품이 성공하느냐는 또 별도의 차원이므로 첨단 제품의 개발 및 상품 성공이 얼마나 어렵고 많은 투자 및 긴 시간, 그리고 위험도가 따르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 및 투자없이는 결코 설계기술 등이 정착할 수가 없고 산업의 경쟁력 확보가 이루어질 수 없음을 감안할 때 지금부터라도 안이한 사고를 탈피해 좀더 본질적인 내용이 정착될 수 있도록 방향을 전환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