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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덕시대 개막으로 재웅비 꿈꾸는 스무살 KAIST 고뇌와 도전

정부지원이라는 온실에서 벗어나 '홀로서기'를 준비하고 있는 KAIST인들의 복안은 무엇인가?

무르익은 가을햇살이 한껏 쏟아지던 지난 10월의 두번째 토요일(12일), 대덕연구단지안의 한국과학기술원 (이하 KAIST) 캠퍼스에서는 조촐하지만 뜻깊은 잔치가 열렸다. 올해는 KAIST가 한국과학원(KAIS)이란 이름으로 개원한지 꼭 20년이 되는 해. 이날의 잔치는 바로 모교의 성년(成年)을 축하하기위해 KAIST를 졸업한 동문들이 특별히 마련한 것이었다.

이번 행사의 주제인 '창조 조화 그리고 도약'을 상징한 기념조형물의 기공식도 갖고 후배들이 공부하고 생활하는 학교 구석구석을 둘러보기도 했던 이날의 졸업생 모교방문 행사에 대해 동창회 부회장인 신성철교수(물리학과·학생부처장)는 "안으로는 단합의 장을, 밖으로는 성년의 모습을 알리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한 자리였다"고 설명한다.

"석박사과정으로만 운영되던 KAIST가 과학기술대학(KIT)과 합치며 홍릉에서 대덕으로 내려온 지 3년째지만 그간 우리 내부에서 통합 분위기를 적극적으로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제 성년을 맞아 서로간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또 앞으로의 우리 역할을 함께 생각해보는 자리였다"는 것이 신교수의 얘기다.
 

KAIST대덕캠퍼스 정경^부지가 약30만평으로 홍릉캠퍼스의 10배이다.


'위로부터의 통합'에 홍역치러

80년대 중반 몇년간을 밀고 당기고 한 끝에 결정된 구 KAIST의 학사부 분리와 대덕 이전, 과기대와의 통합. 이 적잖은 변화의 과정에서 당사자였던 정부 관계부처나 구(舊) KAIST 학사부, 과학기술대의 교수 학생들은 조금씩 어긋나는 입장을 제시하며 때로는 반목으로 치닫기도 했다. 스스로를 'KAIST 사람'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공통적으로 가졌던 가장 큰 우려는 "KAIST가 대덕으로 옮겨가면 '홍릉시대의 영광'을 아주 잃는게 아닐까'로 집약될 수 있다.

1971년 2월16일 창경원 옆 지금의 서울과학관 4층의 조그만 사무실에서 채 열명도 안되는 젊은 과학자들이 현재 KAIST의 전신(前身)인 한국과학원(KAIS)을 창설한 이래 그동안 배출된 박사수만도 1천1백51명이고 석사는 줄잡아 6천3백여명을 헤아린다.

단위 이공계대학원으로서 짧은 기간에 이렇게 급격히 팽창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의 강력한 지원때문이었다. 과학원이 설립되던 시기는 박정희 대통령의 3공화국 정부가 중화학공업입국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내세우며 '경제제일주의'를 다그치던 때. 중화학공업의 육성을 위해서는 이를 펼쳐나갈 전문과학기술인력의 보급이 시급히 제기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여기서 정부는 기존의 이공계 대학원을 지원하는 방식이 아닌 전혀 다른 선택, 즉 국가가 운영하는 새로운 형태의 이공계대학원을 만들기로 결정한 것이다.

개원 당시 참여인사였던 전학제교수(화학과)는 3공정부의 이런 결정이 "개발도상국으로서 수백년의 발전과정을 거친 선진국들과 대등한 입장으로 겨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주장한다. 즉 한정된 재원을 수많은 대학원에 갈라붙이기식으로 투자하기보다는 한 곳을 집중육성해 효율을 높이자는 사고였다는 것이다.

정부의 지원은 재정조달에 그치지 않았다. 당시 문교부법령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새로 만든 과학원을 과학기술처산하기관으로 만들면서까지 원생들에게는 3년간의 군복무를 국가지정연구기관에서 근무하는 것으로 대체해 주었고 대기업사원 월급수준에 맞먹는 학자금까지 매달 지급했다.

병역특례와 학자금지원 게다가 해외에서 유치돼온 젊고 유능한 교수 밑에서 연구에 전념할 수 있다는 사실은 당시 이공계대학생들에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조건이었다. 결국 기존의 이공계대학원을 모두 고사(枯死)시킨다는 맹렬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과학원은 우수한 이공계대학생들의 '제1지망'으로서 명실상부한 '전국 대학의 대학원'의 지위를 굳혀갔다.

그러나 '독재정치의 산물'이라는 비난을 얻을만큼 철저히 정치권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과학원은 '위로부터의 통제'에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81년 5공화국 정부가 들어서면서 66년부터 국책연구소로 성장해온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와 과학원을 하루아침에 한국과학기술원, 즉 KAIST로 통합해버린 것이 그 결정적인 예.

'KAIS의 학생이 KIST연구원이 돼 일찌감치 현장을 경험하고 KIST의 박사들이 KAIS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가 된다'. 행정가들이 머리 속으로 그렸던 산학협동의 결정체 KAIST란 그림은 그러나 실현되지 못했다. 오히려 기술개발로 연결될 아이디어를 창출해 내야할 연구소와 과학기술전문 인력을 만들어내야 할 대학원이 서로 자기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교수대 학생비 1:17. 상대적으로 적은 학생을 지도하기때문에 문답식 강의 등 실험적인 방법으로 수헙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거세어진 밖으로부터의 도전

한편 KAIST의 학사부, 즉 옛날의 과학원이 이렇게 혼미를 거듭하고 있을동안 타 이공계대학원은 서서히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77년부터 문교부의 학술연구조성비가 대폭 증가했고 과학재단이 설립되면서 대학의 기초연구지원이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늘어나게 된 것이다.

특히 과학원의 독점이다시피했던 병역특례혜택에 준해 일반대학원에도 석사학위를 마친 사람은 국가시험에만 통과하면 6개월의 훈련만으로 군복무를 대신할 수 있는 '석사장교'제도가 도입되면서 80년대초부터 각 대학 이공계대학원생의 숫자가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어느정도의 인력과 재원이 확보되자 서울대학등 이른바 명문대학에서는 기업체의 프로젝트를 의뢰받아 연구활성화를 꾀할 수 있었다.

KAIST외부의 여건변화는 곧 KAIST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예전처럼 '부르지 않아도 우등생들이 몰려든다'고 한가하게 버틸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우수한 학생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KAIST도 타 대학처럼 학부생을 받아들여야한다는 위기의식이 싹텄고 이 무렵인 86년 정부는 대덕연구단지 안에 새로이 과학기술대학을 만들었다.

그러나 과학기술대학과의 통합은 KAIST 안에서나 과기대에서나 그리 환영받지 못했다. 과기대는 KAIST와의 통합 이외에 자체 대학원 과정 개설을 염두에 두고 있었고, KAIST학사부로서는 과거의 대학원기능을 회복해 나가는 것이 희망사항이었지만 명령체계에 의해 KIST와 하루아침에 통합됐듯이 자신들이 만들지도 않은 과학기술대를 다시 인위적으로 접목한다는데 거부감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홍릉 캠퍼스의 수용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대덕이전이 지시사항이 됐지만 모든 과학문화 정보가 경인지역을 중심으로 유통되는 현실에 비추어볼 때 서울을 떠나 과기대와 합치는 것은 곧 KAIST가 '지방의 한 명문대'로 된다는 의미가 아니냐는 극단적인 우려까지 생겨났다.

여러가지 반대에도 불구하고 89년 KAIST 학사부는 KIST와 분리됐고, 과기대와 하나로 묶여 신(新) KAIST 시대를 열었다. 92년에는 구 과기대출신학생들이 최초로 박사과정에 진입하게된다. 난항 속에 전개된 대덕시대에 대한 자체 평가는 어떠한가.

지난 9월30일자 과기대학보는 이와 관련해 흥미있는 설문조사결과를 싣고있다. 석박사과정 40명 학사과정 50명을 대상으로 한 '과기원인의 의식조사'에서 "과기원의 통합이 전 과기원에 미친 영향은?"이라는 설문에 대해 석박사과정의 39.4%, 학사과정의 36%가 과학기술원 발전에 지장이 있다고 답하는 등 각 과정 모두 70% 가량이 부정적인 대답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과기대출신 석사 2학년생 오세창군(경영과학과)은 "홍릉서 온 선배들이나 비(非)과기대출신동료들은 KAIST가 과기대의 대학원이 되서는 안되고 앞으로도 전국대학의 대학원으로 남아야 한다고 주장해 과기대출신들과 의견이 엇갈 린다"고 밝힌 뒤 "과기대출신들이 KAIST 석박사과정 입학에 어떤 기득권을 가지겠다는 것이 아니라 과기대 수준이 뛰어나므로 우리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보는 것"이라며 자신감을 나타냈다.

실제로 91학년도 대학원 입학비율을 보면 석사과정 입학생 6백29명 중 과기대출신이 2백27명으로 전체 36%, 일반대학출신이 4백2명으로 전체 64%를 차지하고 있다. 과기대 졸업생들만을 놓고 보면 절대다수가 KAIST 석박사과정으로 진입하지만 전체 석사 입학생비율로 보아서는 아직 과학원이 과기대-과학원 석박사과정으로 이어지는 닫힌 구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과기대교수로 새 KAIST에 편제된 문희정 교수(화학과)는 "서로다른 배경을 가진 학생들이 섞여있으면 서로에게서 배울 수 있어 훨씬 바람직한 것 같다. 앞으로도 일반대와 과기대 출신이 반반씩 섞이면 좋지않을까"라는 의견을 제시한다. 학생부처장 신성철 교수는 여기에 더해 스탠퍼드대 출신이 하버드의 교수로 발탁되고 하버드의 교수가 스탠퍼드의 강단에도 서는 미국의 예를 들며 "지나치게 동문관계를 앞세워 능력 보다는 우리학교사람만을 고집하는 폐쇄적인 풍토가 고쳐져야한다. KAIST의 위상도 10년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안다. 우수이공계 대학들이 우선은 학생들부터 나중에는 교수들까지 서로 교류하며 각자 특성과를 발전시켜 나가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제시한다.
 

개원 초기에는 국내최고의 시설을 자랑하는 KAIST였지만 최근에는 타 대학의 발전으로 상당부분 평준화된 상태다.


과학기술인재 키우는 실험교육 왕성

통합의 여파와는 별개로 대덕시대의 KAIST가 건재한가는 역시 KAIST가 개원이래 줄곧 고수해온 '연구중심의 교육'을 통해 '현장적응력 높은 전문인'을 키워내고 있는가로 평가해야할 것이다.

개원 초기인 70년대에는 대부분의 이공계 대학이 대학의 3대기능인 '교육 연구 사회봉사' 중 연구의 기능은 수행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KAIS는 미국의 대학을 본따 교수와 학생이 자신의 연구 주제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데 일의적 목표를 두었다.

교수들의 경우 학부과정생이 없어 학사과정 지도에 뺏길 시간을 연구에 돌릴 수 있었고 원생들도 기숙사생활을 한다는 이점을 이용해 24시간 실험실습실을 개방해 연구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런 연구풍토는 대덕에도 그대로 전수되고 있어 혹 결강이 생기면 다른 수업시간을 피해 밤 10시에라도 강의를 하는 일이 예사로 받아들여 진다.

KAIST의 교수들은 곧잘 자신들의 연구 경향을 벡터 리서치(vector, research)라고 부른다. 방향성 있는 연구, 즉 현장지향의 연구라는 것인데 한예로 KAIST의 경우 물리학과 같은 기초학문분야에서도 광학 반도체 물리학 등 응용분야가 일찌감치 강조됐고 과의 명칭도 응용물리학과로 붙였다. 이러한 현장지향성은 졸업생들의 취업경향에도 두드러진다.

한편 KAIST의 독특한 운영체제로 연구 연가제도와 박사학위를 받고자 하는 사람은 필히 국제수준의 저명학술잡지에 자신의 논문을 발표해야만 한다는 의무조항을 달았던 것도 한번쯤 짚어볼만한 내용이다.

연구연가제도란 말 그대로 교수들이 연구를 위해 4년마다 1년씩 해외에 나가 공부를 하고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3, 40대의 젊은 교수들이 과학기술 선진국에서 재충전해온 지식을 다시 학생들에게 돌려주게되는 이 제도의 장점은 타 이공계대학에도 많이 받아들여졌다.

박사학위 수여에 국제수준의 잡지 게재여부를 조건으로 단 것은 연구논문의 객관적인 평가를 위해서였다고 이 제도의 도입자들은 말한다. 일부에서는 이 제도에 대해 스스로 해야할 논문심사를 남의 나라 과학자에 떠넘긴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하지만, 그간 KAIST박사들이 해외유명과학지에 제출한 논문수가 약2천8백편으로 한국인 전체 발표 논문의 50%에 이르고 질에서도 인정을 받고 있다. 이렇게 다수의 논문을 발표한 것이 국제과학계에서 KAIST의 지명도를 높인 것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며 내부에서는 KAIST 가 쌓은 무형의 자산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새로 통합된 학사과정의 경우 구 과기대의 실험적인 제도들이 대부분 그대로 존속되고 있다.

KAIST학사과정에서 특히 다른 대학에서는 볼 수 없는 실험적인 시도로 '개별연구'와 '무학년무학과제도'를 꼽을 수 있다. KAIST 학사과정에 입학하는 사람들은 어떤 과가 있는가만을 확인하고 입학 후 적성에 따라 학과선택을 자유로이 할 수 있는데 (산업디자인학과는 일부 제한) 이 영향 때문인지 KAIST의 학생들은 '전과'(轉科)를 그리 두려워하지 않으며 절차도 복잡하지 않다. 이 제도는 특히 최근처럼 '학제 간(interdisciplinary) 연구'를 중시하는 풍토에서는 어린 학생들에게 좋은 경험을 제공하는 기회가 되고 있다.

'개별연구'는 연구중심의 대학(원)이라는 KAIST의 캐치프레이즈를 십분 반영하는 것이다. 학부 3학년이 되면 누구나 석사과정에서 다루는 분야를 자신의 연구과제로 삼아 그 분야의 석박사과정생은 물론 교수와 직접 접촉하며 무엇을 연구하는가를 미리 살펴볼 수 있다. 4학년1학기까지의 개별연구가 끝나면 곧 2학기에는 졸업연구에 들어가는데 학사에서 석박사로의 무시험진학이 많기 때문에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상대적인 여유가 많다.

일찌감치 스스로 실험하고 스스로 연구해 나가는 자세를 익혀서인지 KAIST학생들은 자신들의 실험실습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크고 미지의 문제에 대한 도전욕이 강해보인다. 최근 삼성전자 주최의 대학생컴퓨터프로그램 경진대회에서 상을 받았다는 전산학과 4학년 송종철군은 "그간 우리과 학생들이 나처럼 컴퓨터대회에 입상해 받아온 부상만 해도 1억5천만원은 될 것"이라며 "어떤 대회가 있으면 같은 과(科)학생들이 대거 함께 출전해 실력을 가늠해보는 게 당연한 일로 돼 있다"고 설명했다.

재정자립도 7%에 그쳐

KIST와의 분리, 대덕이전, 과기대와의 접목이라는 어려운 과제를 이제 어느정도 마무리지어가는 KAIST는 그러나 요즘 보다 더 어렵고 본질적인 과제 앞에 맞닥뜨려 있다. 이는 다름아닌 '홀로서기'에의 요구다.

지난 9월25일에 있었던 국회경제과학위원회의 KAIST 국정감사에서 민자당의 신영국 의원은 답변에 나선 천성순원장(56·금속공학)에게 "민주화시대를 맞아 타대학과의 형평을 고려해야한다. KAIST도 정부 재정 지원일변도에서 벗어나 홀로서기를 해야할 때라고 생각하는데 구체적인 재정자립방안을 강구하고 있는가"라는 요지의 질문을 던졌다.

비록 당론으로 확정된 것이 아닐지라도 집권여당 국회의원의 이같은 질문은 KAIST에 대한 정부입장의 변화를 읽을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KAIST 교수들과 대화를 나눠보면 약속이나 한듯이 한결같이 거론하는 '민주화로 인한 하향평준화'라는 말은 87년 이후 우리 사회에 고조된 민주화분위기가 그간 KAIST의 바람막이 역할을 해주던 정부의 기능을 크게 축소시켰다는 의미임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타대학보다 비교우위에 설 수 있었던 병역특례 등의 조건들이 박탈돼 우수학생 유치에 고심하고 있는 KAIST 로서는 한해 4백여억원의 예산 규모에 재정 자립도가 겨우 7%인 현재의 상황에서 부하되는 '홀로서기'요구가 벅찰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KAIST인들은 이 요구가 부당하다고는 생각지 않는 분위기다. 오히려 '올 것이 왔다. 다만 그 시기와 방법에 융통성을 두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이들의 바람이다. 남수우교무처장(재료공학)은 "앞으로 10년만 더 참고 봐주면 우리도 자립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겨우 궤도에 들어섰는데 여기서 손을 땐다면 이도 저도 되지 않는다. 물론 우리만 지원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타대학도 함께 발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고 말한다.

당장 올해만 해도 사회적 요구를 감안해 전자재료 무기재료 생명과학 항공우주공학과를 신설, 개편했으나 예산상의 증액은 없었다. 결국 부지는 있어도 연구소나 필요한 실험시설, 부족한 교수요원채용 등은 뒷순서로 밀릴 수밖에 없게 된다.

천성순 원장은 재정자립문제와 관련해 "그간 KAIST가 많은 전문인력을 배출해 산업계에 공급한만큼 이제는 정부 아닌 기업이 KAIST육성의 주체로 나서줘야 할 때"라고 강조한다. 거대한 최신과학설비와 이를 운용 할 비용을 학생들 개개인의 등록금으로 충당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기업의 프로젝트는 이미 많이 하고있다. 그러나 학생들의 값싼 임금비용을 보고 들어 오는 단기성의 프로젝트가 아니라 학교발전을 위한 기금(fund)이 조성돼야할 것"이란게 천원장의 생각이다. 자구노력의 하나로 홍릉 분원에는 황학 분원장 (산업공학)이 책임자가 된 '발전위원회'가 만들어져 기금조성사업등을 추진하고 있으며 동창회에서도 이번 모교방문행사를 통해 3억여원의 동문 기금을 마련했다.

머리와 꼬리가 물리는 문제이긴 하지만 기업의 투자를 유발하기 위해서는 우수한 학생과 교수진으로 타 대학과의 경쟁에서 우위에 서야한다는 것이 자명한 사실이다. 이를 위해 원측은 타 이공계대학과는 다른 KAIST만의 독자성을 확보하려는 계획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그 핵심은 과학고 KAIST 학-석-박사 과정으로 연결되는 '과학기술영재교육'이다.

지난 9월에도 천성순원장은 전국 9개 과학고를 돌며 KAIST설명회를 가졌고, 또 '무시험 전형' 등 학생선발에 실험적인 방법을 동원해 '과학기술분야에 재능이 있는 학생들'은 걸러내려 한다.

2000년대까지는 MIT등에 버금가는 명문대로 발돋움하겠다는 포부를 세운 KAIST. 올해부터는 박사를 한해 2백명이상씩 배출해 2001년까지 우리나라가 G7수준에 진입하는데 필요한 고급과학기술인력 중 4천명이상을 배출할 계획인 KAIST에 새삼스레 요구되는 '홀로서기'는 커다란 난관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간 '위로부터의 통합'의 경험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정치권의 일방적인 통제에서 벗어나 KAIST운영의 자율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재정자립도는 꾸준히 높여나가야만한다. 또 많은 KAIST 교수들이 지적하듯 '병역특례나 학자금지원이 없더라도 KAIST의 어느 과, 어느 교수에게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지원 할 수 있도록 실력으로 대외경쟁력을 쌓아나 가는 일이 오늘의 젊은 KAIST인들에게 부여된 몫이다.

1991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정은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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