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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온변화가 세계사를 뒤바꾼다

공룡과 몽고제국 멸망의 배경

기온이 더워지느냐, 차가워지느냐에 따라 한 국가의 흥망이 결정되고 한 종(種)의 명멸이 갈린다.

기후의 변화가 생물에 깊은 영향을 끼쳐온 것은 사실이다. 중생대의 쥐라기에는 육상에 거대한 공룡들이 번성했으나 백악기 말에는 지구전체가 추워져서 이들 동물이 절멸하고 말았다.

1억3천5백만년 동안 지구상에서 가장 우세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공룡이 갑자기 사라진 이유는 아직도 만족스럽게 설명되지 못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공룡의 전멸은 기후의 악화에 기인하는 것으로 가상하고 있다.

당시에는 지잘학적 변화가 도처에서 심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곳곳에서 육지가 융기해 큰 산맥이 형성됐는데, 로키산맥도 그때 형성된 것이다. 조산작용은 평지의 물을 감소시킬 뿐만 아니라 동물이 살고 있던 습지를 없앴다. 또한 기후도 서늘해져서 식물의 생산량도 줄어들게 되었다.

공룡중에서 초식성인 뇌룡(Brontosaurus)은 가장 거대한 놈이었다. 길이가 자그마치 80피트(24m), 몸무게는 50t이나 나갔다. 이 공룡이 하루에 먹는 물의 양은 5t 이상이었다고 한다. 먹는 물의 절대 부족으로 뇌룡이 사라지게 되자, 그들을 잡아먹고 살던 육식성인 검룡(Stegnosaurus) 등도 함께 사라지게 되었다. 이러한 연쇄작용은 그 집단을 지구상에서 쓸어버렸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의 덩치도 작아지게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종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부 학자들은 오늘날까지 겨우 살아남은 한 무리가 몸이 작은 악어로 진화했다고 보고있다.

그런데 근래 동물학자 스웨인(Swain, 1977년)은 공룡절멸의 주원인을 기후의 악화때문으로 보지 않고 독초(毒草)의 피치 못한 섭취때문이라고 주장, 세계적으로 주목을 끌고 있다.

공룡은 일반인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뱀과 같은 냉혈동물이 아니고 백악기 말의 추운 기후상태에도 적응할 수 있는 온혈동물에 속한다고 스웨인은 믿고 있다. 그러므로 기후의 악화는 그들의 절멸원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중생대 후반에 지구 위에서는 굉장한 변화가 육상식물을 중심으로 일어났는데 특히 꽃피는 식물의 진화가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그와 더불어 막대한 양의 알칼로이드(alkaloid)가 생산됐다. 바로 이 알칼로이드의 독소(毒素)가 공룡을 절멸시켰다고 스웨인은 주장하고 있다. 이를테면 지금부터 7천만년 전인 백악기 말에 대형의 공룡을 소멸시키는데 알칼로이드가 크게 기여했다는것이다.

대형 공룡은 다량의 풀을 소비하지 않으면 안되는 슈퍼소비자다. 5t의 공룡이 줄잡아서 하루에 2백kg(4백50파운드)의 풀을 먹어 치운다면 그들은 아마도 이것저것 가려서 먹을 처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알칼로이드를 생산하는 많은 식물에 중독돼 공룡들이 쓰러졌을 것이라고 스웨인은 추정하고 있다.

요즘의 소나 말도 알칼로이드를 품고 있는 미나리아제비(논뚝이나 습지에서 노란 꽃을 피우는 잡초)를 날 것으로 한근을 먹으면 그자리에서 죽는다.

이집트의 통일을 유도해

기후의 변화가 민족사에 끼친 영향은 자못 흥미를 끄는 바가 있어 많은 학자들이 주목하고 있다.

나일강의 선상지대(線狀地帶), 즉 계곡은 문명이 발상되기에 적절한 곳이었다. 플라이스토세(홍적세)의 마지막 빙하기인 비름(Wiirm)빙하기 (B.C.5000년)가 물러가고 기온이 서서히 상승하면서 비로소 소박한 문화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어서 한랭기의 중기에 해당하는 B.C.3500년 경에는 나일강주변의 인구가 증가, 고제국(古帝國)의 기초가 형성됐다. 나일강의 주변은 현재도 사막이 펼쳐져 있는데 날씨가 추운 계절(寒期)에는 물의 증발량이 줄고, 수량이 많아진다. 따라서 사막은 축소된다.

이런 까닭으로 그 주변에 관개사업을 수행하기가 수월해져 농산물과 인구가 증대되고 고도의 문명이 발달하게 되었다. 나일강의 물은 녹지대를 항상 적셔서 파피루스(Papyrus, 왕골 같은 것으로 종이의 원료로 쓰였다. 영어의 '페이퍼'(paper)라는 단어도 여기서 비롯됐다고 한다)와 연(蓮)같은 식물이 자라기에 적합했다. 또 영양도 풍부했을 뿐더러 물을 먹으러 모여드는 동물을 쉽게 잡을 수도 있었다.

이집트의 통일은 B.C.3000년의 한기(寒期)와 일치한다. 북위 25°의 아열대지역인 나일계곡에는 그 무렵 찬바람이 불어 닥쳤다. 이를테면 자연이 고제국에 커다란 축복을 보낸 것이다. 당시에 범세계적으로 나타났던 찬 날씨는 고제국이 망할 때(B.C.2300년)까지 계속됐다. 따라서 지중해 해수의 증발량은 약간 줄어든 반면 나일강의 수량은 크게 증대돼 풍성한 수확물을 계속해서 주민들에게 제공했다.

고대 이집트의 문화는 쌀쌀한 기후하에서 급속히 발전했고 특히 미술공예품의 생산증가는 예상을 넘을 정도였다. 인간의 정착이 가능한 토지가 나일강 유역에 굉장히 넓게 퍼져 있었을 뿐더러 문명발전의 최고 조건인 인력(人力)이 집중돼 있었다. 게다가 나일강 하류의 삼각주 지역은 지중해에 돌출해 있었는데 날씨가 차가워졌을 때에는 해퇴(海退)현상에 의해 그 면적이 20% 이상 확대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중제국(中帝國)이 형성될 무렵인 B.C.200년 후부터 온도는 급속히 상승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경제는 급전직하로 쇠약해진다. 더구나 일부 계층의 극심한 낭비로 말미암아 더 악화된 경제는 증발 때문에 소실된 물을 보충할 수 없게 했다. 관개공사를 할 여력마저 갖추지 못하게 된 것이다. 더운 날씨와 과도한 농경량은 팽창하는 인구를 부양하기 힘들게 했다.

따라서 사람들은 먼저 동굴을 팠다. 그 속에 식수(食水)를 넣어두고 음료수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매일 열사(熱砂)의 길을 오가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이집트의 파라오도 기후변화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나일계곡에서 조금만 밖으로 나가면 아무도 살 수 없는 사막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지하수면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수천m 깊이의 우물을 팔 수 밖에 없었다. 모름지기 그 일에 매달리지 않으면 초목은 물론이고 동물의 생존도 바랄 수가 없었다.

B.C 403년~B.C 211년의 중국은 전국시대였다. 그 무렵 황하 서쪽의 고원에서 발달한 진(泰)나라의 기후는 그 전까지의 한랭에서 벗어나 온난으로 돌아섰다. 따라서 사람이 살기가 좋아졌고, 식량도 넉넉하져 인구가 증가했다. 반면 화남(華南)의 초(楚)나라는 그 남쪽지역이 무더워서 살기가 어려웠다. 국력이 커진 진나라는 초나라의 북변을 침공했고 이어서 동쪽에 위치해 있던 위(魏)조(趙)주(周) 등 황하의 동쪽을 쳐 나갔다. 초나라의 정복욕은 연(燕)과 제(齋)에까지 미쳐서 중국 각지에 전란이 그칠 새가 없었다.
 

미국 애리조나 사막에 떨어진 운석의 흔적. 운석이 공룡을 멸망하게 했는가를 놓고 현재 논란이 한창 진행중이다.


진시황의 흥망에도 관여

당시 중국의 북쪽에 있던 흉노(凶奴)는 세력을 확장, 가끔 황하지역을 습격한 일이 있는데 시황제는 장군 몽염에게 30만명의 대군을 주어서 흉노를 황하의 북쪽으로 쫓아버리고 중국을 통일했다. 북쪽으로 쫓겨난 흉노의 남하를 막기 위해 시황제는 기존의 성들을 연결, 유명한 만리장성을 완성했다. 그러나 기온이 점점 따뜻해지자 동호(東胡)와 흉노 등 북방 이민족들은 만리장성의 공격을 단념하고 북방 및 고원지대로 이동하고 말았다. 이 장성은 그 후에도 중국의 방어에 긴요하게 쓰였다. 특히 한(漢)나라가 흉노의 침입을 막을 때 크게 공헌했다.

진시황은 만리장성을 넘어서 북쪽으로 더 추격해 올라갈 생각이었으나 화남 월족(越族)의 정벌에 지나치게 힘을 쏟은 탓으로 여행도중에 50세의 생애를 끝마쳤다.

유교를 탄압하고 의약서적과 복술서(卜術書)만을 남기고 다른 모든 책을 불사른 진나라는 내우외환이 겹쳐서 통일 후 겨우 15년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획일적 중앙집권체제는 그후 2천년 동안 중국 국가체제의 기초가 되었다.

제2한기가 물러나면서

과연 어떻게 해서 몽고민족이 불과 70년만에 질풍과 같이 중국전토 중앙아시아 유럽의 대부분을 정복할 수 있었느냐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몽고의 전성기였던 13세기는 제2한기가 완전히 물러간 시기였다. 이는 미국의 학자들이 알래스카의 유콘(Yukon)지역 만년설의 성장과 융해를 조사한 후에 일반에게 알려졌다. 다시 말해 만년설 속에 존재하는 탄화물의 연대를 방사성탄소(${C}^{14}$)측정법으로 면밀히 측정한 결과다.

미국학자들에 따르면 만년설의 얼음은 B.C. 3800년부터 B.C. 2400년까지 약 1천4백년 간 성장했으며 이 시기에 범세계적으로 기온이 내려갔다고 한다. 흔히 이 시기를 제1한기라 한다. 제2한기는 B.C.1300년부터 B.C.100년까지 1천2백년 간에 걸쳐 있었다. 그후 A.D. 1500년부터 1900년까지 다시 추운 시기로 접어드는데 이 시기를 가리켜 제3한기라고 한다.

제2한기를 마감한 뒤 알타이산백의 눈이 녹아 물이 풍성해지자 몽고인의 생활은 아연 활기를 띠게 되었다. 따라서 인구도 급격히 증가했는데 그들은 말을 타고 수렵을 하고 가축의 식량을 구하러 다녔다. 그 결과 몽고의 영토는 북으로 계속 확대됐다. 당시 중국을 지배했던 금나라의 통제력이 약해져서 멀리 북방까지 금나라의 힘이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금나라의 탄압은 국경 근처의 타타르(Tartar)에 집중돼 있었으므로 몽고는 금나라와 협력, 타타르를 정복했다. 그 싸움에서 이긴 몽고의 전부족은 칭기즈칸을 왕으로 추대했는데 그는 카라코름의 오논강변에서 즉위했다. 그때가 1216년이었다.

이 시대의 기후를 살펴보자. A.D.900년부터 1200년까지 라프랜드와 알래스카의 빙하가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범세계적으로 한동안 따뜻한 기후가 형성돼 아시아 초원의 인구가 급증했다.

유럽에서도 기후가 호전돼 프랑크왕국 신성로마제국 폴란드 영국 헝가리왕국 비잔틴제국 오스만투르크가 번영했다. 그 무렵 오스칸투르크가 기독교의 예루살렘 성지를 침범, 유럽연합군인 십자군이 파견됐다. 비잔틴제국도 구원군을 보냈다. 하지만 전쟁은 어물어물 결말을 보고 말았는데, 그 이유는 당시 유럽에 기사도가 성행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런데 1200년부터 북반구의 온난은 갑자기 끝이 나고, 대신 한파가 몰려왔다. 황막한 초원을 무대로 삼고 있던 민족은 어떻게 해서라도 남하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런 기대를 등에 엎은 칭기즈칸은 호라즈므제국을 치기 위해 대원정을 나섰다. 그는 일거에 호라즈므를 멸망시켰다. 여기서 큰 의미를 갖는 한 사건이 벌어졌다. 1229년에 몽고제국은 카라코름(수도)으로부터 호라즈므까지 위도로 약 10°나 남하했다. 그 사이에 몽고의 초원은 추워지고 물이 마르고, 광활했던 풀밭이 줄어 들었다. 푸른 풀밭이 한 없이 펼쳐져 있는 중앙아시아를 사랑해 죽을때까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은 칭기즈칸은 몽고초원의 기후악화를 직감으로 알았던 것 같다.

칭기즈칸은 9명의 아들 가운데 7명이 집에서 임종을 맞지 못하고 전쟁터의 이슬로 사라졌다. 몽고인은 중국으로 남하하는 것을 잠시 늦췄다가 1210년부터 다시 남하하기 시작했다. 1210년경 그들은 대동(大同)에서 두파로 나뉜다. 그중 한 파는 만리장성을 넘어서 태원(太原)에 이르고, 다른 파는 만리장성의 북쪽을 돌아서 대도(大都)에 이르렀다. 나중에 칭기즈칸이 죽은 뒤에도 몽고인은 남하를 계속해 남쪽의 경중(慶中)과 대리(大理)까지 쳐들어 갔다.

몽고군의 중국 침략전술은 협공 일색이었다. 즉 가장 가까운 나라를 먼저 침략하고 그 다음 나라를 곧바로 정복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대체로 한 나라를 건너 뛰고 그 다음 나라를 친 뒤 양쪽에서 협공하는 경우가 많았다.

몽고인은 오스만투르크의 유목민과 함께 북위 20°까지 남하했는데, 따지고 보면 결국 기후의 변화가 몽고인의 등을 떠민 셈이다.
 

우리는 지금 빙하기와 빙하기의 사이인 간빙기에 살고 있다. 흰색은 빙하분포를 나타낸다.


기온은 상승할까, 하강할까?

앞으로 기후는 추워질 것인가, 더워질 것인가.

소련에서는 밍크의 보존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해마다 밍크가 남하해 골칫거리라고 한다. 그들을 잡아서 북쪽으로 되돌려 놓고 있지만 어느새 다시 남하한다는 것이다. 밍크 뿐만 아니라 큰 사슴도 알래스카에서 남하하고 있다. 1974년 북미에서는 옥수수와 밀이 한해(寒害)를 입어서 큰 문제가 되기도했다.

열대지방인 이집트에서는 1974년 피라미드 위에 백설(百雪)이 쌓였다고 한다. 이 모든 현상들은 기후가 점점 추워진다는 학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와 반대로 앞으로 기후가 점차 더워진다는 견해를 갖고 있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근래에 추위가 가장 심했던 시기는 지금부터 1백년 전이었는데 그후로 기온이 차츰 상승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산업혁명의 여파로 수증기와 이산화탄소(${CO}_{2}$)가 대량으로 대기중에 배출됐기 때문에 기온이 올라간다고 보고 있다. 특히 1883년에 분출한 인도네시아 크라카토아 화산의 대폭발은 온 섬이 날아갈 정도로 대규모였다고 하는데, 그때 분출한 수증기 이산화탄소의 총량은 헤아릴수 없이 막대했다. 이 가스들은 고위도지방에서 강한 온실효과를 나타냈고 1920년~1940년 사이에는 지표의 평균온도가 0.4℃ 상승했다.

이러한 작은 상승에도 극지방에서는 큰 변동이 일어났다. 실제로 그린랜드에서는 빙하가 후퇴했다. 옛날에는 개썰매로 섬 사이를 왕래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배로 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약 1.5m의 극빙(極氷)이 녹았을 뿐 아니라 많은 고분과 농경지 유적이 드러나게 되었다.

빙산도 덩달아 북상했다. 대구의 수확량도 1946년에는 1천3백t에 이르렀다. 이는 1910년에 비해 2천5백배나 증가한 수치다. 노르웨이로부터의 석탄 반출량도 크게 늘었다. 아울러 채굴작업 시간도 두배 이상 연장됐다.

실제 관측상으로 지구가 더워지고 있다고 느껴진 것은 1930년까지다. 기온은 그 해에 최고치에 도달한 다음 조금씩 내려가기 시작했다. 최근의 기온하강은 중위도지방에서는 그리 뚜렷하지 않지만 극지방에서는 1930년이후 확실히 두드러진다. 게다가 요즘 태양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또 지구 곳곳에서 화산활동이 활발, 기온의 요동을 부채질하고있다.
 

바다에 떠 있는 빙산, 이 빙산들은 극지방에서 때로는 적도 부근까지 이동하면서 기후에 큰 영향을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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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09월 과학동아 정보

  • 김준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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