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스피릿’(Sprit). 화성탐사로봇이다. 2003년 6월 10일 지구를 떠나 4억9100만km를 비행해 2004년 1월 3일 에어백에 싸여 화성의 ‘구세프 크레이터’(Gusev Crater)에 내려앉은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3년도 더 지난 일이다.
이곳에 혼자 온 건 아니다. 쌍둥이 동생 ‘오퍼튜니티’는 내가 있는 곳의 반대편인 ‘메리디아니평원’(Meridiani Planum)에서 열심히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당초 90일만 버티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우리 형제가 영하 140℃에서 영상 20℃를 오르내리는 극한의 화성에서 3년 넘게 임무를 계속하자 지구의 과학자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 형제가 지구에 보낸 사진만 해도 16만 장. 우리를 이곳에 보낸 NASA는 나와 내 동생 오퍼튜니티가 화성에 착륙한지 3년이 된 것을 축하하기 위해 지금까지 우리가 찍은 사진 중 최고를 뽑는 온라인 투표를 실시했다. 투표는 내가 화성에 착륙한 1월 3일 시작해 동생이 착륙한 1월 24일까지 진행됐다. 지구인들이 뽑은 최고의 사진을 보며 당시를 추억해 볼까.
해질녘 땅거미의 망중한
지구인들이 최고로 꼽은 사진이다. 때는 2005년 5월 19일 저녁 6시 7분. 화성에 온지 489일째 되는 날이었다. 당시 나는 ‘구세프 크레이터’ 가장자리에 있었다. 멀리 크레이터 언덕으로 해가 뉘엿뉘엿 지는 모습을 보며 잠시 감상에 빠졌다.
그리고 지긋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화성에서 보는 태양은 지구에서 보는 크기의 3분의 2정도다. 지구에서보다 태양이 덜 밝게 보이지만 해질녘 땅거미는 더 오래 지속된다. 대기 높은 곳까지 먼지와 얼음알갱이가 퍼져 빛을 산란하기 때문이다. 지구에서도 강력한 화산폭발이 일어나 대기에 먼지가 많아지면 비슷한 현상이 벌어진다.
모래 언덕에 발이 걸리다
2005년 4월 26일. 동생 오퍼튜니티가 높이 30cm 너비 2.5m의 작은 언덕에 발이 걸려 옴짝달싹 못하다가 극적으로 탈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동생은 계속해서 바퀴를 앞뒤로 움직이며 5주 동안이나 고생했다.
과학자들은 동생에게 모래언덕을 넘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 동생이 빠진 모래언덕과 똑같은 조건을 연구실에 만들어 1주일 이상 실험했다. 그 와중에 동생은 주변의 사진을 찍어 지구로 전송했다(01). 색깔을 입힌 사진(02)을 보면 동생의 발이 걸린 모래 언덕이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다. 색이 붉을수록 높은 지역이며 녹색을 띨수록 낮은 지역이다. 붉은 색과 녹색의 높이차는 약 70cm.
‘엔듀런스 크레이터’의 눈부신 모래 언덕
동생이 찍은 구불구불한 모래언덕 사진이 2위를 차지했다. 높이가 1m 이하인 이 모래언덕은 화성의 바람이 만든 작품이다. 사진을 찍은 때는 2004년 8월 6일. ‘ 엔듀런스 크레이터’(Endurance Crater)를 향해 가고 있었다. 동생은 이 언덕 아래로 내려가 크레이터의 특성을 더 파헤쳐 보려했다. 언덕을 내려가기 전 바닥이 얼마나 미끄러운지 또는 단단한지 알아야 한다. 바퀴가 모래 언덕에 빠져 갇힐 수 있기 때문이다.
‘홈플레이트’의 바위 연구
2006년 2월 26일 11시 48분. 나는 ‘홈플레이트’(Home Plate)라는 지역 정상에서 바위에 열심히 구멍을 뚫고 있었다. 반듯하게 뚫어 놓은 구멍에 과학자들은 ‘스타스’(Stars, 왼쪽)와 ‘크로포드’(Crawford, 오른쪽)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특히 구멍 2개와 바위의 모양이 사람 얼굴을 닮았다고 굉장히 좋아했다.
구멍을 뚫을 때 생긴 먼지와 돌 부스러기가 구멍 주위로 흩어져 있다. 과학자들은 이 흔적을 보고 당시 바람이 남동쪽으로 불었다고 추측했다. 나는 2006년 2월 22일에 왼쪽 구멍, 23일에는 오른쪽 구멍의 먼지를 철사솔로 깨끗이 털어냈다.
화성의 ‘블루베리 머핀’
2004년 2월 7일 화성에 착륙한지 14일째 되는 날, 동생이 메리디아니 평원에서 ‘현미경 사진기’(microscopic imager)로 ‘블루베리 머핀’(Blueberry Muffin)을 발견했다. 지름이 불과 5mm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이 적철광 알갱이에 과학자들은 흥분했다. 지층 속에 있는 물이 이 알갱이를 만드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추측했기 때문이다.
‘베르데 곶’의 오퍼튜니티
2006년 9월 28일 동생이 ‘덕베이’(Duck Bay) 북쪽에서 ‘빅토리아 크레이터’(Victoria Crataer)를 바라본 모습을 담은 사진이 3위다. 빅토리아 크레이터는 화성 적도 근처의 ‘메리디아니 평원’에 있는 지름 800m 가량의 충돌 크레이터다. 50m 앞에 약 6m 높이의 ‘베르데 곶’(Cape Verde)이 보인다.
그 뒤로 툭 튀어나온 곳은 100m 떨어져 있고, 그 너머 길게 늘어선 절벽은 400m 이상 떨어져 있다. 이 사진을 찍은 뒤 동생은 크레이터 안쪽 사진을 찍기 위해 베르데 곶의 끝부분으로 이동했다.
‘마자짤’ 바위에 남긴 데이지 꽃
2004년 4월 1일 화성에 온 지 82일째 되는 날, 의대생이 해부학 실습을 하기 전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듯, ‘마자짤’(Mazatzal)이라는 이름을 붙인 바위를 드릴로 뚫기 전 사진 한 장을 찍었다(01). 그리고 3일 동안 마자짤에 3.8mm 깊이의 구멍을 하나 뚫었다.
과학자들은 이 구멍에 ‘뉴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바위에 구멍을 뚫다가 화성에 액체가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증거를 발견했다.
바위는 여러 겹으로 이뤄졌는데, 바위 안쪽에서 액체가 바위 층을 뚫고 나온 듯한 균열을 발견한 것이다. 나는 바위 연구를 마친 뒤 마자짤에 데이지 꽃 모양의 흔적을 남겼다(02).
영원히 남을 발자국
2005년 4월 6일 동생이 ‘엔듀런스 크레이터’ 남쪽 2km 지점에서 자신이 온 길을 되돌아 봤다. 깊이 파인 바퀴 자국은 동생이 모래 언덕에 걸려 앞으로 나가기 어려웠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과학자들은 ‘루브 알 칼리’(Rub al Khali)라고 이름을 붙였다. 아랍어로 ‘텅 빈 곳’이라는 뜻이다.
이름처럼 바퀴 자국은 바람에 의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이곳에 올 인간은 이 발자국을 기억해 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