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직으로 솟은 마천루의 숲은 사람들에게 첨단기계문명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화려한 도시경관을 보여주지만, 그에 따르는 교통 환경 주거 등의 문제도 만만치 않다.
게리 쿠퍼 주연의 '마천루'(摩天樓)와 폴 뉴먼 주연의 '타워링'에서 고층건물의 모습을 나름대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벨탑을 세우려 했던 때부터 사람들은 누구나 돈과 힘만 없으면 더 크고 더 높은 건물을 지어서 자기 이름을 빛내고 싶어했다. 건축가는 전문기술을 밑천으로, 건축주는 돈을 밑천으로, 정치인들은 허가권을 밑천으로, 제각기 자기욕망을 건축에 그려보고 싶을 것이다.
요새와 같은 민주사회에서는 고층건축물의 도시환경 충격과 독점을 견제하기 위해 시민투표(미국의 시애틀이나 샌프란시스코처럼)를 시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 '마천루'에서는 건축가가 저작권 침해를 건물폭파로서 고발한 후 법정 항변과정에서 쿠퍼의 인상적인 음성과 멋진 제스처가 낭만적으로 극화돼 큰 감동을 주고 있다.
그러나 고층대형건물들이 여기저기 들어서 주변환경에 미치는 영향들, 예컨대 하늘과 햇빛을 가리고 경관을 방해하고 소음과 교통체증을 일으키고 도심지 서민주택과 중소상인을 쫓아내고 주택값을 올리고 상하수도 쓰레기 등 도시 기반시설에 부담을 가중시키는 것을 생각한다면 소유권 저작권의 사회적 정당성과 동의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정 규모 이상의 대형건물 허가과정에 교통영향같은 환경영향평가 환경조각설치 도시설계 미관심의 등 제도적 장치와 민원처리 주민동의 등을 물어 공공환경 피해를 줄이는 방법을 구하고 있다. 앞으로 지방자치가 발전되면서 이러한 도시환경개발의 사회적 책임을 묻는 사람들의 인식이 더 세련되고 참여의 범위도 다양하게 확대되기 바란다.
갇힌 환경
영화 '타워링'은 타이타닉호의 침몰처럼 기술문명이 자랑하는 자연극복의 기계문화가 얼마나 불확실하고 불안한가를 암시한다. 기계기술의 대형화와 자동화된 프로그램에 의해 만들어지는 환경이 많은 사람들의 자기 환경 선택권을 박탈하고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갇힌 환경, 즉 소머 교수(캘리포니아대학 데이비스 캠퍼스, 심리학)의 이른바 '감옥건축'이 될 수 있음도 시사한다. 영화 원명은 'Towering Inferno', 즉 '고층지옥'인데 지옥이란 많은 사람들이 불안하게 갇혀있는 집단환경이다. 수용소가 그렇고 교통지옥 입시지옥 병원지옥이란 말이 그러하다.
우리는 병원이나 고층복합건물같은 대형건물에서 많은 사람들이 복잡한 공간 미로에 갇혀 자기 갈 곳을 제대로 또 빨리 찾지못해 헤매는 경우를 가끔 경험한다. 건축계획에서 점차 관심을 갖는 길찾기(wayfinding) 환경디자인은 사람들이 도시환경을 어떻게 읽고 어떤 형태의 환경모습 혹은 디자인을 쉽게 읽고 기억하게 되는지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이는 린치(전MIT 교수, 작고)가 강조한 '읽을 수 있는(legible) 도시이미지 개념의 건축적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뉴욕과 시카고를 보지 않고 고층건축을 논할 수 없을 만큼 마천루는 미국적 상업주의의 상징이다. 우선 고층건축을 가능하게 한 획기적인 기술개발이 모두 미국의 특허물이다. 1855년 뉴욕박람회장서 엘리샤 그레이브스 오피스가 유압안전 엘리베이터를 직접 시운전한 이후 1889년 전기엘리베이터, 1894년엔 버튼 장치, 1948년엔 전자조정 장치, 1950년엔 자동문 등으로 발전됐다. 1885년 공병장교 출신 월리엄 제니가 12층짜리 빌딩에서 선보인 철골 골조구조라는 새로운 건축기술이 붐을 이룸으로써 마천루 건축이 본격화된다. 지금은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애틀란타시에서 제일 높은 2백57m 높이의 고층건물이 금년에 들어설 만큼 골조구조기술이 발전했다.
1906년 윌리스 하빌랜드 캐리어 박사는 브루클린 인쇄소에서 온도와 습도 조절문제에 고심하다 습도 정화 환기가 가능한 에어컨의 특허를 내고 캐리어 회사를 설립했다. 1933년에 많은 공간을 냉각시킬 수 있는 원심력 냉동기계를 개발하고 1938년에 고층건물에 배관한 전천후 시스템의 공기조화기를 선보였다.
현대 정보통신사회에서는 기술이전 기술모방이 신속해지고 이러한 고층건축 기술의 노하우가 우리에게도 꽤 익숙해져 국산 승강기를 외국에 수출까지 하기에 이르렀으며 국산 에어컨도 많이 일반화 되었지만 1960년대만 해도 오티스와 캐리어 제품의 권위가 지배적이었다. 일본도 그 당시 고층건물의 이론지식은 있어도 감을 못잡아 기술방문단이 미국에 가서 노하우를 익혀 오고서야 지금 정도의 고층을 세울 수 있었다.
집은 지어봐야 안다는 말처럼 건축은 돈과 위험부담이 많은 경험기술의 사회예술, 즉 삶의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건축기술은 빨리 습득한다 해도 건축예술은 모방이 쉽지 않으며 오랜 삶의 시간을 요한다. 대형 고층건물을 지을 수 있느냐 없느냐 보다는 이러한 건축 환경의 삶을 우리가 얼마나 경험하고 이해하고 있는가, 또 바라고 있는가라는 사회전반의 인식 변화가 중요하다.
마천루에서 도시경관 즐겨
1913년 개스 길버트가 설계한 60층짜리 뉴욕 울워스건물 준공식 현장의 화려한 축제분위기는 아마도 타이타닉호 출범때와 타워링 영화에서의 화려한 파티장면과도 같았을 것으로 상상된다. 27층 연회장에 몰려든 9백여명의 정계 재계 예술과학계 인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월슨 대통령의 점화로 8만여개의 전구가 고덕양식의 고층건물에 일시에 빛을 발하자 마치 어두운 저녁 하늘에 우뚝 솟은 '불타는 칼'과도 같았다. 회중의 환호소리와 함께 연회장에 나타난 캄덴 목사는 그 특유의 수사학적 어투로 "상업의 대성당(Cathedral of Commerce)이여!"라고 외쳤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세계 최고의 마천루 타이틀을 46년간 누려왔다. 1945년 78층과 79충에 B-25의 충돌에도 견딜만큼 구조적 탄력성이 인정됐고 시속 1백80km의 강풍과 20분간 낙뢰를 아홉번씩 얻어맞고도 견딤으로써 건축기술에 신뢰와 영광을 안겨주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높은 자리를 좋아하며 높은 데서 자기주위 환경의 넓은 경관을 한 눈에 바라보기를 원한다. 아테네도 시가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아크로폴리스 언덕이 있고 몽블랑 언덕에서 사람들이 파리시를 훤히 내려다보는 즐거움 때문에 사람들은 활기가 있다.
뉴욕에서 사람들은 산 대신 마천루를 오르내리며 도시경관을 즐긴다. 뿐만아니라 50년대의 마천루는 모더니즘의 딱딱한 상자형태를 탈피,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양한 디자인 형태와 개성으로 뉴욕 스카이라인에 시각적 활기를 더해주고 있다. 적절한 위치에 놓인 개성있는 모양의 고층건물은 사람들에게 복잡한 도시공간을 쉽게 읽을 수 있게 한다.
서울은 주위에 남산 북악산 등 산이 둘러 있어서 산에 올라 시내를 내려다 보는 장소가 자연스럽다. 최근 시당국은 전망이 좋은 산언덕에 대형건물 고층건물이 들어서는 것을 적극 규제해 서울의 자연스런 경관 보호에 신경을 쓰는 것 같다. 산중턱 언덕지역의 불량주택 재개발사업으로 높고 큰 덩치의 아파트가 들어서면 좀 초라하지만 그래도 아기자기하고 다양한 서민 달동네의 인간적이고 자연적인 환경모습이 파괴된다.
우리나라처럼 산이 많은 환경조건에서는 고층대형건물의 규모 위치 모양 등이 자연경관 배경과 조화되고 좋은 시야를 가리지 않도록 하는 법규제와 건축가의 설계수준, 특히 허가관청 건축심의위원들의 건축과 도시의 환경디자인을 보는 안목이 더 세련되어야 할 것 같다. 또한 초고층 아파트의 환경문제는 살아본 사람들의 평가를 정직하게 수렴하는 과정을 요하는 것이다.
자동차와 승강기의 경쟁
최근 신문보도를 보면 방콕에서도 동양최고의 85층 마천루를 건축한다고 한다. 또 그동안 부와 기술을 착실히 축적해 경제대국이 된 일본은 근래 다케나카(竹中)회사를 중심으로 고층아파트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으며 그 회사 환경시스템 연구소에서는 높이 1천m의 스카이시티 1000 프로젝트를 내놓고 있다.
이러 한 초대형구조(megastructure) 아이디어는 1950년대와 60년대 초반까지 일본, 유럽에 꽤 유행했다. 그후 60년대말 사회문제, 70년대 환경문제와 경제의 어려움때문에 비현실적인 환상으로 사라진 것인데 과연 일본이 이러한 인공도시의 초대형 구조물을 얼마나 현실로 옮길지 궁금하다.
1970년대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슈마허의 말이 인기가 있었는데 역시 사람들은 돈이 좀 생기면 크게 놀고 싶은 생각이 드는 모양이다. 물론 일본은 좁은 땅에 더 많은 인구를 효과적으로 수용하기 위한 경제적이고 현실적인 상업주의 원칙에 철저하기 때문에 자동차 처럼 잘 만들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초고층 초대형 건축의 새로운 도시환경을 사람들이 정말 얼마나 좋아하고 필요로 할 것인가 이다. 그렇지 못할때 바벨탑 건축의 폐기 붕괴로 인한 엄청난 사회비용까지 감수해야 할 것이다.
일찍이 발명왕 에디슨은 1926년 '리터러리 다이제스트'와의 회견에서 고층건축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만일 뉴욕이 한 건물에 소도시 인구만큼을 수용하는 고층건물들을 계속 허용한다면 큰 재난이 엄습할 것이다. 만일 그 고층건물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다 길에 쏟아져 나온다든가 아니면 반시간 혹은 한시간 이내에 모두가 일보러 그 고층건물 현관에 몰리면 그러한 건물들 주변은 길이 꽉 막혀 버릴 것이 틀림없다." 과연 천재다운 예언이다.
1927년 토마스 하스팅도 '무시무시한 높이의 도시'란 글에서 "그것(고층)은 예술의 문제라기 보다 정의와 위생 그리고 순환교통의 문제다. 우리가 하늘높이 올라가지 않고 옆으로 분산해야 하는 이유는 주변의 조그만 대지소유자들의 소유권리를 보호하고 햇빛과 공기를 독점하지 않으며 고층건물의 신축으로 인해 주변지역 땅값이 뛰지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1956년 시카고에 1마일(1.6km) 높이의 마천루를 제안했던 미국 현대건축의 거장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미래는 자동차와 승강기의 경쟁이 될 것인데 지혜로운 자는 자동차에 돈을 걸 것"이라고 예언했다.
과연 그의 예언대로 자동차산업의 발전과 교외발전에 따르는 도시확산은 20세기의 가장 두드러진 현상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이에 못지 않게 대도시 중심부는(확산도시로 유명한 로스앤젤레스마저도) 어디서나 대형고층건물로 채워지고 있음을 볼 때 자동차와 승강기의 승부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사람의 도시'가 '자동차의 도시'나 '마천루의 도시'로 되어가는 느낌일 것이다. 자동차와 마천루는 모두 사방(수평)으로 하늘(수직)로 뻗어가는 현대도시의 '길'을 뜻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 길의 이미지는 사람을 위한 만남의 이미지 보다는 바쁘게 스쳐가는 자동차와 승강기와 같은 기계적 공급라인의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블루멘 펠드(독일출신 캐나다 도시계획가)가 말했던 인간 이외의 스케일(extra humans scale)의 쌍벽인 자동차와 마천루를 '사람의 환경'으로 어떻게 길들일 수 있을지가 우리의 큰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