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커의 역사는 50년대 MIT를 중심으로 대형시스템에 침투한 제1세대 해커, 70년대 퍼스널컴퓨터를 탄생시킨 제2세대 해커, 80년대 게임프로그램을 개발해 해커사업체를 발전시킨 제3세대 해커 등으로 구분된다.
컴퓨터의 일부 분야에서 '해커'(hacker)라는 말이 엉터리 프로그래머, 컴퓨터광 등의 조소적인 의미로 심지어는 컴퓨터 범죄자로까지 인식되고 있지만 컴퓨터의 발전과정을 들추어보면 이들 해커야말로 오늘날의 컴퓨터 혁명을 실질적으로 가능하게 한 숨겨진 영웅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컴퓨터에 대한 광적인 몰두, 일반인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행적과 무수한 일화가 이들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괴팍한 외관의 이면을 들추어보면 모험가이자 공상가이며 행동주의자이자 예술가인 그들의 숨겨진 본성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들은 '왜 컴퓨터가 진정 가히 혁명적인 도구인가'를 누구보다 분명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또한 IBM과 같은 거대기업이나 관료주의와 권위주의에 대항해 컴퓨터를 모든 사람들의 손에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준 혁명가들이기도 했다.
숨겨진 영웅들
미국의 유명한 해커 사학자 스티븐 레비(Steven Levy)는 그의 저서 '해커스'(Hackers)에서 컴퓨터 혁명을 가능하게 만든 실질적인 원동력인 해커의 역사를 세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제1세대 해커는 해커의 원조라 할 수 있으며, 1950년대 MIT의 철도모형클럽 인공지능연구소가 이들 해커의 발상지였다. 이들은 당시 일괄처리방식을 채택 하고 있던 IBM 704 등의 괴물 컴퓨터에 대항해 TX-0 PDP-1 등의 대화식 컴퓨터로 '우주전쟁' 게임을 비롯한 전설적인 프로그램들을 만들어내었고 해커의 윤리라는 새로운 컴퓨터 문화를 창출했다.
제2세대 해커는 캘리포니아를 중심무대로 활동한 하드웨어 해커들로 1세대의 해커들이 MIT라는 상아탑에 매몰되고 컴퓨터라는 마술 자체에 침잠해 컴퓨터를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임무를 게을리했다고 비판한다. 그들은 홈브루 컴퓨터클럽 등을 중심으로 컴퓨터를 상아탑이나 거대 기업의 전산실에서 해방시켜 컴퓨터의 마술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것을 지상의 과제로 삼았다. 결국 그들은 '알테어 8800' '애플 II'와 같은 최초의 퍼스널 컴퓨터를 만들어냈고 사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둔다.
80년대, 즉 제3세대의 게임 해커들은 앞선 선배들과는 달리 교외에 위치한 자택 침실에서 안락하게 컴퓨터를 마스터한 디지털(digital) 모험가들이다. 이들은 선배 해커들이 이룩해낸 성과를 토대로 '신비의 집' '공주와 마술사' 등의 컴퓨터 게임을 만들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게임왕국 시에라온라인사 등 본격적인 해커 사업체를 만들어간다.
MIT의 1세대 해커들
IBM의 일괄처리식 컴퓨터와는 달리 대화식 방식을 채택한 TX-0가 설치되어 있던 MIT의 26호 빌딩에는 밤마다 몇명의 학생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이 학교의 철도모형클럽(TMRC)이 라는 서클 회원인 피터 샘슨, 앨런 코톡, 밥 사운더스였다. 원래 이들은 철도모형클럽에서 모형 기차의 철로 밑에 배치된 선로의 복잡한 전기배선과 기계장치에 매료되었다가 컴퓨터에 심취하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컴퓨터는 매우 소중한 기계여서 하루 24시간 가동이 일반적이었다. 공식 사용자가 아닌 이들 컴퓨터광들이 컴퓨터를 사용하려면 어쩔 수 없이 새벽 2, 3시나 돼야 그 차례가 올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배정되는 짧은 시간으로는 양이 차지 않아 혹시 시간 예약을 해놓고 나타나지 않는 사람이 없을까 하는 요행을 바라면서 밤새도록 컴퓨터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이들이 바로 최초의 해커였다. 이들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 컴퓨터에 매달리는 것은 아니었다. '해크'(hack)라는 용어는 아주 오래전부터 MIT에서 흘러다니던 은어였다. 이 말은 MIT 학생들이 무슨 법칙이라도 되듯이 주기적으로 만들어내 던 대학 내의 고약한 농담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용어가 TMRC 회원들에 의해 사용되었을 때 거기에는 새로운 의미가 함축됐다. 그들은 작업과정 그 자체에서 느껴지는 순수한 즐거움 이외에 어떠한 목표도 갖지 않는 프로젝트나 그에 따른 결과물을 해크라 불렀다
그렇다면 해커들은 어떤 이유로 그런 프로그램들을 만들었는가. 때때로 그들로서는 자신들이 어떤 용도로 프로그램을 만드는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가령 피터 샘슨은 밤을 꼬박 새워 아라비아 숫자를 순식간에 로마자로 변환시킬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잭 데니스라는 MIT 교수는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어낸 샘슨의 놀라운 재주를 칭찬한 다음 "맙소사! 하지만 뭣 때문에 이런 걸 만들었지"라고 말했다. 샘슨은 종이 테이프를 컴퓨터에 공급시킨 후 깜박거리는 불빛과 스위치들을 검사하면서, 이전에는 그저 평범한 칠판 위에 쓰여져 있던 아라비아 숫자가 무슨 요술처럼 로마 숫자로 바뀌는 모습을 보는 순간 뿌듯한 심정과 무언가 힘이 솟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들이 벌인 해킹 중에서 가장 전설적인 것이 바로 '우주전쟁'(Spacewar)이라는 최초의 본격적인 컴퓨터 게임이었다. 달팽이라는 별명을 가진 스티브 러셀은 당시 인공지능을 연구하던 매커시 교수의 조수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항상 화면을 통한 디스플레이 해커야말로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 해킹이라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비디오 게임이야말로 컴퓨터가 가진 마술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던 차에 마빈 민스키 교수가 멋진 디스플레이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이것은 몇개의 원과 나선 알고리즘을 사용해 화면에 환상적이고 소용돌이치는 듯한 여러가지 무늬를 만들어내는 프로그램이었다. 러셀은 민스키트론이라 불리는 이 프로그램에 심취해서 몇달 동안이나 그 무늬들의 다양한 변화를 지켜보았다. 마침내 그는 마빈 민스키의 프로그램이 내는 무늬들은 너무 수학적일 뿐 아니라 추상적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보다 멋진 해크를 계획하게 됐다.
그는 동료 해커들과 토론을 벌여 당시 그들 모두가 심취하고 있었던 E. E. 스미스의 SF(공상과학소설)에 등장하는 멋진 우주 활극을 모델로 하는 게임 프로그램을 만들기로 합의했다. 이 방대한 작업에는 많은 해커들이 동원됐는데 초기 멤버인 앨런 코톡은 이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필수적인 사인-코사인 루틴을 DEC사에서 얻어 오기도 했다. 그들의 작업은 12월초에 시작돼 1962년도로 넘어갈 때까지도 계속됐다. 마침내 러셀은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한 점을 스크린 상에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2월의 어느날 러셀은 기본 게임을 공개했다. 거기에는 각각 31발의 미사일을 적재한 두대의 우주선이 마련되어 있었다. 또한 천공의 전장(戰場)을 장식하는 반짝이는 별들이 스크린 상에 몇개의 점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누구나 PDP-1 컴퓨터에 붙어있는 네개의 스위치를 조작해서 우주선을 움직 일 수 있었다. 네개의 스위치는 각각 시계방향 회전, 시계 반대방향 회전, 가속, 그리고 미사일 발사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러셀은 완성되지 않은 거친 게임의 버전을 공개했다. 그 프로그램이 담긴 종이 테이프를 컴퓨터의 시스템 프로그램과 함께 상자 속에 넣어두면 누군가가 자발적으로 그 프로그램을 개선시킬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가장 먼저 피터 샘슨이 프로그램을 업그레이드(upgrade)시켰다. 그는 우주 공간에 별을 나타내는 점들이 임의적으로 배열되어 있는 것에 만족할 수 없었다. 실제의 우주에서는 별들이 제각기 고유한 위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진짜 우주를 보게 될거야." 샘슨은 이렇게 맹세했다. 그는 자세한 성도(星圖)를 구해서 적도 상에서 밤하늘을 바라보는 모습과 똑같은 실제적인 별자리를 생성할 수 있도록 데이터를 입력시켰다. 여기에는 15등급 이상의 광도를 가진 모든 별이 표시됐다. 더군다나 그는 게임의 진행에 따라 하늘이 장엄하게 이동하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시각적 효과 뿐 아니라 미사일 발사자가 정확한 조준을 하는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도 했다.
댄 에드워드라는 프로그래머도 게임이 단순한 운전 기술의 차원에 불과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여기에 중력 요인을 첨가하기로 했다.
그는 화면 중앙에 중심별, 즉 태양을 프로그램했다. 이제 사용자는 우주선이 태양 주위를 돌 때 태양의 중력을 이용해서 우주선을 가속시킬 수 있게 됐다. 조금만 부주의해서 태양 가까이로 다가서면 우주선은 태양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또한 샤그가레츠는 스미스의 소설에서 우주공간에 '초(超)공간 튜브'를 사용해서 한 은하계에서 다른 은하계로 순식간에 이동하는 것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는 초공간능력을 게임에 적용시켜 게임자가 급박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비상 단추를 누르면 초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사용자는 한 게임에서 세번 초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핸드온 명령
이렇게 해서 무려 수십만 달러 짜리 오락기가 탄생했다. 왜냐하면 당시 컴퓨터 가격이 그 만큼 비쌌으므로 해커들은 자기네가 만든 어셈블러 프로그램이나 음악 프로그램과 마찬가지로 우주전쟁 역시 돈을 받고 팔지 않았다. 우주전쟁은 아무나 가져다가 수정을 가할 수 있었다. 조금씩 프로그램을 개정해 나갔던 이 집단 작업은 해커의 윤리를 분명히 입증하고 있다. 사물의 작동 원리 내부로 깊숙이 들어가서 그것을 개선하고자 하는 욕구야말로 발전의 근원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엄청난 재미가 수반된다는 것은 물론이다. 이 소식은 MIT 밖으로까지 널리 퍼져 나갔고 우주전쟁을 담고 있는 종이 테이프는 누구에게나 자유롭게 나누어졌다. 이들에게 '소유권'이란 개념은 통할 수 없었다. 소유권이야말로 동일한 프로그램을 위해 반복작업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근원이었고 좀 더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있는 많은 시간을 낭비시키는 악의 근원이었던 것이다.
개방성의 원칙과 함께 그들이 해커의 윤리라 불렀던 중요한 원칙은 핸드온 명령(hands-on imperative)이었다. 핸드온이란 컴퓨터 시스템에 대한 실제적인 사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컴퓨터에 대한 접근은 여하한 이유로도 방해받아서는 안되며 완전히 보장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해커들의 접근을 금했던 IBM컴퓨터와 그 직원들은 그들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적이었고, 컴퓨터에 대한 접근을 가로막는 모든 관료체계와 그 관리자들은 해커들의 도전을 받을 수 밖게 없었다.
1975년 3월 5일 밤, 실리콘밸리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고든 프렌치라는 한 해커의 주차장에 30여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프렌치가 여기저기에 붙여 놓은 포스터를 보고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프리랜서 기술자, 전자부품상점 주인, 전자공학을 연구하는 공학자 등등 모여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드웨어에 대한 열렬한 팬이었다. 이들의 꿈은 자신의 집에 컴퓨터를 갖는 것이었다. 그리고 값싸고 성능 좋은 컴퓨터를 모든 사람들에게 보급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이들은 승용차 두대가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의 딱딱한 시멘트 바닥에 걸터앉아 당시 인텔이 막 개발했던 8008칩에 대한 논쟁을 벌였고, MITS라는 작은 회사에서 만들어 내 공전의 인기를 불러 일으켰던 '알테어 8800' 이라는 3백97달러 짜리 개인용 컴퓨터를 화제로 이야기 꽃을 피웠다. 이것이 이후 해커의 꿈을 한 층 더 발전시켰던 '홈브루컴퓨터 클럽'의 탄생이었다. '홈브루'(home brew)라는 말은 원래 집에서 담은 술을 의미하는 말로 하드웨어 해커들은 스스로 제작한 컴퓨터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제1세대의 해커들이 MIT의 인공지능연구소라는 울타리 속에서 현실 세계로부터 스스로를 차단시키고 컴퓨터의 마법에 몰두한 반면, 제2세대 해커들은 핸드온명령을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지키면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컴퓨터를 보급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애플신화와 워즈니액
애플 컴퓨터를 통해 세상을 놀라게 한 스테판 워즈니액 역시 이 클럽에 참석했다. 그는 휴렛팩커드(HP) 사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항상 자신이 쓸 컴퓨터를 제작하는 꿈을 꾸어왔다. 워즈니액은 홈브루클럽에 자신처럼 컴퓨터의 제작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들이 30명이나 있었다는 사실에 매우 큰 감동을 받았다. 워즈니액은 마티 스퍼겔(전자부품 상인)이 나누어 준 8008칩을 집으로 가져 가 연구해 보고 알테어처럼 하나의 칩을 중심으로 한 컴퓨터를 제작할 수 있다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그는 우편 주문까지 해서 마이크로프로세서에 관한 전문 서적을 구해 탐독하면서, 온갖 유형의 입출력 장비와 칩을 모아, 마침내 컴퓨터 회로제작에 착수했다. 스테판 워즈니액은 홈브루클럽의 분위기에 아주 만족했다. 그 곳에서 그는 자신에게 공기와 음식만큼이나 중요한 전자공학 개발과 실험에 모든 활동과 열정을 기울일 수 있었다. 게다가 사교성이 극히 부족한 사람조차도 쉽게 친구를 사귈 수 있었다.
그 무렵 그는 어느 컴퓨터 전시회에서 신형 마이크로프로세서 초기 모델인 6502 칩을 겨우 20 달러에 판매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6502칩으로 설계중이던 컴퓨터의 심장부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고 여러개를 구입했다. 당시 워즈니액은 컴퓨터를 만들어서 팔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저 친구들에게 자랑하려는 생각으로 컴퓨터를 만들었을 뿐이었다. 워즈니액은 빠짐없이 홈브루에 참석해 새로 개발된 제품을 보고 들었고, 정보가 자유롭게 전달되는 분위기 속에서 모든 세세한 기술의 진보를 쉽사리 파악할 수 있었다. 거기에서 본 제품중에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자기가 개발하는 제품에도 적용시키고자 했는데, 예를 들어(마이크로 컴퓨터의 영상출력을 컬러 TV로 출력시키는 장치)를 보고 컬러그래픽에 대한 착상을 얻는 식이었다. 워즈니액이 만든 컴퓨터는 미완성품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성품이라고 볼 수도 없는, 여러 칩과 회로 소자가 적재된 하나의 회로기판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그 회로기판만 가지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전원장치와 키보드 모니터 카세트테이프플레이어 등을 연결하면 영상출력기와 대용량 기억장치, 입출력기를 갖춘 실용적인 컴뷰터가 됐다. 또한 자신이 작성한 베이식 프로그램을 적재하면 프로그램을 제작할 수도 있었다.
워즈니액은 회로기판과 거기에 연결해서 쓸 하드웨어 부품들을 가지고 홈브루 클럽에 왔다. 그는 클럽 전체 회원들 앞에서 그 회로 기판을 공중에 들어 보이면서 회원들이 퍼붓는 수많은 질문에 일일이 응답했다. 회원들의 질문은 어떻게 그것을 만들었으며, 이러저러한 부품을 부착할 것이냐 아니냐 등 무궁무진했는데 그중에는 좋은 제안들도 많았다. 워즈니액은 집회가 있을 때마다 기계를 들고와서 전기 콘센트가 있는 강당 뒷좌석에 앉아 여러가지 제안을 귀담아 들으며 자신의 컴퓨터를 개선해 나갔다.
워즈니액의 친구인 스티브 좁스는 그 회로기판을 보고 감탄하면서, 그 회로기판을 대량 생산해서 판매하자고 주장했다. 당시 좁스는 아타리사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프로그래머로서 보다는 사업가로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이윽고 워즈니액이 만든 컴퓨터에는 '애플'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애플이라는 이름은 한때 과수원에서 일한 적이 있는 스티브 좁스가 고안해 낸 것이었다. 두사람은 아직 정식 출범하지도 않은 애플회사의 주소를 한 우체통으로 정하고, 주차장을 작업실로 꾸며 열심히 작업했다. 필요한 자금확보를 위해 좁스는 폭스바겐 승용차를 팔았고 워즈니액은 HP사 제품으로 프로그램이 가능한 계산기를 팔았다. 좁스는 호사가들이 보는 여러 잡지에 광고를 게재하면서 6백66달러 66센트에 애플 컴퓨터를 팔기 시작했다. 홈브루회원이라면 누구에게나 제작 도면을 주었고, 컴퓨터를 카세트 레코더에 연결시키는 장비 한벌만 구입해도 워즈니액이 작성한 베이식을 무료로 끼워줬다. 게다가 워즈니액은 컴퓨터 잡지에 자기가 만든 6502 모니터를 위한 루틴을 싣기도 했다. 애플 광고문에는 '우리가 만든 기계들에 필요한 소프트웨어를 무료 혹은 최소한의 비용으로 공급하자는 것이 우리 철학입니다'라고 쓰여 있을 정도였다.
당시 이 신형 컴퓨터가 역사상 가장 중요한 컴퓨터가 될 것임을 눈치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컴퓨터가 나올 수 있었던 모태가 홈브루클럽의 창조적 분위기였던 것은 분명하다. 정보 교환, 중요한 기술 지식의 습득, 용솟음치는 창조력, 멋진 제품과 프로그램을 만들어 모든 사람의 감탄을 자아 낼 기회… 이 모든 것들이 스테판 워즈니액이라는 해커를 통해 위대한 결실로 맺어지게 됐던 것이었다.
뒷날 새로운 게임의 해커로 등장했던 윌리엄스와 로베르타는, 애플에는 인격과 삶을 사랑하는 정신, 순박함이 있다고 말한다. "애플이라는 명칭 자체가 아주 훌륭했어요 72497이나 9R이란 괴상한 이름에 비하면 얼마나 인간적입니까 컴퓨터가 마치 '여보세요, 나는 단순한 기계 덩어리가 아니에요. 나에게서 아주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하고 말하는 것 같아요." 워즈니액은 뒷날 자신의 애플컴퓨터 개발과정을 설명하면서 "삶을 사랑하는 정신을 컴퓨터 안에 집어 넣었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로베르타와 「신비의 집」
컴퓨터 자체를 해킹한 제1세대와 연구소에서 컴퓨터를 해방 시킨 제2세대의 하드웨어 해커에 이어 80년대에 등장한 제3세대는 컴퓨터에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이들은 더 이상 컴퓨터를 사용하기 위해 연구실에 몰래 잠입하거나 자신의 손으로 자작 컴퓨터를 만들 필요도 없었다. 컴퓨터를 직접 구입하거나 친구의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었다. 물론 컴퓨터는 연구소에 있는 것만큼 강력하지 않았고 그럴듯한 해커모임도 없었지만 그러한 사정은 제3세대에게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자기 침실에 컴퓨터를 설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무엇을 해킹하고 어떠한 해커 윤리를 선택하는가' 하는 문제는 해킹 그 자체를 통해 풍부해지는 내용에 의해 결정될 수 밖에 없었다.
1980년 1월 켄 윌리엄스는 '주머니 속의 땡전 한 닢까지' 긁어모아 애플 II 컴퓨터를 구입 했다. 하지만 그 컴퓨터가 얼마나 뛰어난 성능을 가지고 있는가를 파악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윌리엄스는 애플을 사는 사람은 자신처럼 기술자이거나 엔지니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이 사람들이 컴퓨터를 실행하기 위해 강력한 기계어를 필요로 할 것이라고 추측했다. 윌리엄스는 해커답게 컴퓨터에 사용할 근사한 언어를 개발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만 해도 윌리엄스는 해커 이외의 일반인들이 애플을 위시한 퍼스널 컴퓨터를 가지고 오락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
윌리엄스가 애플용 포트란 언어를 작성하기로 결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보다 더욱 중요한 컴퓨터 혁명은 바로 그의 집안에서 일어났다. 그의 아내 로베르타 윌리엄스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그녀는 환상을 좋아했다. 사실 로베르타는 어렸을 때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상상의 세계에서 보냈다. 신비의 세계에 빠진 자신의 모습을 동화처럼 그려 나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 윌리엄스가 컴퓨터프로그램을 집에 가지고와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그것은 돈 우드라는 해커가 스탠퍼드 인공지능연구소에서 작성한 어드벤처(모험) 게임으로서, 수많은 사람들을 컴퓨터 마술세계로 빠지게 만든 프로그램이었다. 로베르타는 그 게임에 완전히 빠지게 됐다. 갖가지 장애물을 넘거나 뱀을 피해 가는 방법을 찾아내기 위한 생각 이외는 다른 어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로베르타는 열심히 지도를 그리고 장면이 바뀔 때마다 무엇이 나올까 추측하면서 논리정연하게 그 게임을 풀어나갔다. 로베르타는 장난꾸러기 난장이들과 도끼, 안개가 자욱한 동굴, 거대한 건물 등에 대해 한달 동안 밤낮으로 매달린 결과 마침내 그 모험 게임을 다풀 수 있었다.
로베르타는 애플에서 실행할 수 있는 모험 게임이 몇개 더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노스리지 마을에 있는 컴퓨터전문점에 가서 그 게임들을 구입했다. 하지만 그 게임들은 너무나 쉬웠다. 그녀는 첫 번째 게임처럼 온갖 어려움을 다 겪으며 자신의 상상력을 살려 나가고 싶었다. 그녀는 스스로 모험게임을 구상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신비의 집'(Mystery House)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신비스러운 일에 대한 이야기를 작성 해가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는 애거사 크리스티가 쓴 소설 '조그만 인디언 10명'과 줄거리가 비슷했다. 이 게임에서는 모험게임처럼 보물만 찾는 것이 아니라 탐정역할도 해야 했다. 로베르타는 이야기를 쓰면서 지도를 그려갔다. 게다가 중간중간에 수수께끼와 놀이사건 지도 등을 삽입했다. 그녀는 2주일 동안 만든 지도와 어려운 문제, 비비꼬인 음모 등을 종이에 적어서 윌리엄스에게 던져 주며 "내가 만든 것 좀 봐요!" 하고 소리쳤다.
윌리엄스는 종이 다발을 들춰보더니, 아주 잘 만들었다고 하면서 좀 더 노력해서 완성해보라고 말했다. 그러나 실제로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때까지도 윌리엄스의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퍼스널 컴퓨터를 오락기로 사용 할 사람이 어디 있을라구. 엔지니어들이 회로판을 설계하거나 삼각함수 방정식을 풀기 위해 사용하는 컴퓨터를 가지고….' 그러나 로베르타는 남편에게 신비의 집에서 사람들이 한명씩 차례대로 살해되는 빅토리아풍의 이야기를 끈질기게 설명해 주었다. 게다가 어려운 문제들을 설명하고 해결하는 방법도 알려 주었다. 마침내 윌리엄스도 긍정적으로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다. "아주 재미있게 들리는군. 하지만 상품으로 내놓기 위해서는 좀 더 작업해야 할꺼야. 상황 설정이라든가, 뭐 좀 다른 거 말이야." 얼마후 로베르타는 만약 컴퓨터 스크린에 글자 대신 그림이 나온다면 얼마나 근사할까 하는 생각을 품게 됐다. 그렇게만 된다면 글씨를 보지 않아도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윌리엄스는 그 이야기를 듣고 한번 시도해볼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개방과 나눔의 철학
마침 그 즈음에 버사 라이터(Versa Writer)라는 도구가 개발 돼 나왔다. 그 도구는 타블렛으로 된 그래픽 입력장치였는데, 그 위에 그림을 그려서 애플컴퓨터 안으로 입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림이 선명하게 그려지지 않았을 뿐아니라 사용법도 까다로웠다. 게다가 가격이 2백달러나 되었다. 윌리엄스 부부는 도박하는 기분으로 그 도구를 샀다. 그리고 나서 윌리엄스는 이야기전체를 다시 프로그램해 로베르타가 정교하게 작업을 마무리짓도록 해주었다. 마침내 로베르타는 수십장의 흑백그림을 그려서 '신비의 집' 내부의 많은 방들을 완성했다. 그림의 수준은 사람이 막대기 형상보다 약간 나은 정도였다. 그러자 윌리엄스는 70장의 그림을 플로피디스크 한장에 압축시킬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 당시 조금이라도 애플컴퓨터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불하다고 생각한 작업이었다. 그림 전체를 입력시키지 않고 어셈블리 명령어를 사용해서 모든 그림에 나타난 각각의 선을 좌표로 저장시킨 것이 비법이었다. 윌리엄스는 전형적인 해커정신을 발휘해 부딪치는 모든 문제를 하나하나 풀어나갔다.
이 모든 일을 하는데 한달이 걸렸다. 윌리엄스는 이 게임을 애플사에 직접 팔 생각을 하고 샘플을 보냈지만 한달을 기다려도 반응이 없었다. 1년이 지나서야 게임구입 문제를 긍정적으로 고려해 보겠다고 애플사에서 답장을 보내왔다.
그래서 윌리엄스 부부는 '신비 의 집'을 들고 그 지역에 있는 컴퓨터 전문점을 몇군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전문점 주인들은 처음에 회의적이었다. 애플컴퓨터나 그밖의 컴퓨터에 도취한 새로운 유형의 해커들이 괴상한 프로그램을 들고 오는 일이 귀찮을 정도로 빈번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게임을 실행해 보니 다른 프로그램과는 달리 그림이 스크린 위로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는가. 전문점 주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어떻게 만들었냐고 궁금해 했다.
이들은 잡지에 제품 선전광고를 냈다. 게임을 한두개 더 만들어 팔면서 '진짜 회사처럼 사업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들은 '온라인 시스템'(On-Line System)이라는 회사명을 지었다.
'모험 시리즈 1번'이라고 이름 붙인 '신비의 집'은 24.95 달러에 판매됐다. 윌리엄스 부부는 근처에 있는 레인보 컴퓨터전문점에서 공디스켓이 1백장 들어 있는 박스를 한통 구입하고, 전단을 여러 컴퓨터 전문점에 보낸 후 '마이크로'라는 조그만 월간지 1980년 5월호에 2백 달러를 들여 광고까지 게재하고 나서 반응을 기다렸다. 5월 1일 전화가 처음 오고나서 잠시동안 뜸하다가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그때부터 전화벨은 끊이지않고 울려댔다. 성공한 것이다.
컴퓨터의 본고장 미국을 무대로 근 50년 동안 계속되어온 해커의 역사는 그 자체가 컴퓨터의 역사라 할 수 있을 정도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해커들도 많은 변화를 보이게 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의 공통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어찌보면 컴퓨터 자체의 우아하고 유려한 논리와 결합되어 있는듯한 공통된 철학이다. 그것은 개방성과 나눔 그리고 집중배제의 철학이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우리 모두가 컴퓨터를 다룰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으며 우리 모두가 컴퓨터를 개량하고 나아가 세계 전체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컴퓨터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까지도 충분한 가치를 갖는 그 무엇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