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DC를 뛰쳐나온 세이모 크레이는 크레이리서치사를 설립하여 슈퍼컴퓨터시장의 왕좌에 군림하게 되는데…
서울-부산을 자주 다녀야 하는 사람에게 다섯시간 이상을 기차나 자동차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게다가 철로수리 구간이 자주 있거나 고속도로가 막힐 때 우리는 인내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를 시험해보는 기회를 추여받게 된다. 보다 빨리 서울-부산을 다닐 수가 없을까. 누구나 이런 문제를 한번 정도 생각해보았을 것이다.
먼저 더 빠른 교통수단을 선택하면 된다. 완행열차보다 급행열차를 타면 된다. 또는 더 빠른 스포츠카를 선택해서 도로를 질주하면 될 것이다. 그것도 부족하면 비행기를 타야 한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가진 교통수단의 능력을 더 확장할 수가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렇다면 이번에는 도로를 손봐야 할 것이다. 철로를 복선, 복복선으로 여러 가닥 넉넉히 깔아둔다. 고속도로를 넉넉하게 20차선으로 마구(?) 넓힌다. 게다가 모든 도로를 직선화시켜 눈이 좋은 사람이라면 부산의 고속도로 입구에서 서울의 진입로 톨게이트가 아련히 보이게 한다. 지리적 조건을 일단 무시하고 모든 도로를 직선화시키면 현재의 교통시간보다 20%이상 절약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이런 작업을 하기에는 엄청난 돈이 들겠지만.
그리고 마지막 수단으로 교통기관 자체의 근본적인 개선을 꾀하는 수가 있다. 예를 들면 기존의 자동차가 아니라 공기부력을 이용해서 비행접시같이 지표위를 떠서 달리는 자동차라든지, 자기부상열차, 로켓정도의 속력을 내는 비행기가 이런 방향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
배선길이를 줄여라
보다 빠른 컴퓨터를 만들기 위한 노력도 이와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컴퓨터 개발초기에는 컴퓨터의 속도를 빠르게 하기 위해 보다 빠른 부품(스위칭 소자)을 개발하는데 모든 연구가 집중됐다. 진공관에서 트랜지스터, 그리고 집적회로와 초고밀도집적회로를 거쳐 현재는 조셉슨회로의 시대에까지 왔다. 그러나 부품의 개발에 관한 연구는 지금도 꾸준히 계속되고 있지만, 부품자체가 지니는 물리적 한계때문에 그 속도의 증가가 무한히 계속되지는 않을 것 같다. 스위칭소자를 연결하는 배선길이를 줄이는 것도 전체 계산시스템의 속도를 증가시킨다. 예를 들어 시스템내에 아주 기다란 배선이 하나 있다면, 그 시스템에서 내부 명령어가 다음 단계로 진행되는 시간지연은 바로 배선의 시간지연만큼이나 길어지게 된다. 따라서 보다 조밀한 지역내에서 모든 소자들간의 연결이 완성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집적회로가 고밀도화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회로를 평면에 죽 늘어서 배치하는 것보다 오동통한 구(sphere) 안에서 짧게 연결하는 것이 배선길이의 최소화라는 차원에서 유리하다.
보다 근본적으로 속도를 증가시키는 방법으로는 전통적인 컴퓨터 구조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컴퓨터의 전통적인 구조는 1950년대 폰 노이만이 제시한 모델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프로그램을 자료와 같이 기억장소에 저장하여 순서대로 수행시키는 것이 폰 노이만형 컴퓨터구조의 근간이다.
슈퍼 컴퓨터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위에서 제시한 세가지 방향의 개선책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요약한다면 △더 빠른 부품 △짧은 배선에 의한 고집적화 △근본적인 구조 개선 등이다.
파이프라인 방식
CDC를 뛰쳐나온 크레이는 자신의 이름을 따서 크레이리서치사(Cray Research)를 설립하였다. CDC로서는 뛰어난 엔지니어의 배신에 섭섭했지만, 크레이도 CDC에 할말이 많았다.
CDC의 기본적인 전략은 다음과 같았다. '현재 개발된 CDC7600의 속도는 충분히 빠르다. 따라서 현재 CDC7600의 속도를 능가할 과학기술용 컴퓨터는 없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고객서비스와 대형과학기술용 소프트웨어개발에 주력한다.
그래서 CDC 경영진은 크레이가 제안한 더 빠른 슈퍼컴퓨터를 위한 연구개발비를 크게 삭감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CDC7600의 속도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던 크레이는 자신을 위해 따로 지어준 연구소도 마다하고 새로운 작품을 위해 CDC를 뛰쳐나왔다.
CDC7600이 상업적으로 성공하기 시작한 시기부터 벌써 슈퍼컴퓨터 개발경쟁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I)사는 일찍이 ASC(Advanced Scientific Computer)라는 과학기술용 고속컴퓨터를 개발했다. 그리고 CDC에서도 슈퍼컴퓨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크레이가 떠난 뒤 해체된 팀을 다시 수습하여 고속컴퓨터 개발을 계속했다. 그 결과 스타100이라는 제품을 만들어 냈다. 또 초창기 컴퓨터개발의 선두주자였던 일리노이대학에서는 할아버지격인 일리악(ILLIAC)의 뒤를 이어 일리악 Ⅳ라는 고속컴퓨터를 생산했다. 스타 100이나 ASC 일리악Ⅳ 등은 모두 전통적인 컴퓨터구조를 과감하게 버리고 병렬계산 구조라는 혁신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혁신적인 방법은 파이프라인과 벡터처리기라는 두가지 방식으로 집약된다. 파이프라인방식은 공장에서 제품이 컨베이어벨트를 통해 각 단계를 순차적으로 거쳐 완성 되듯이, 컴퓨터내의 명령어들도 공장의 상품과 같이 처리되도록 하는 것이다. 즉 계속해서 명령어들이 파이프라인에 들어감으로써 시간당 보다 많은 명령어들이 처리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벡터처리방식은 서로 독립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것은 독립된 처리기로 각각 계산하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X←a+b+c+d라는 계산을 순차적으로 한다. a에다 b를 더하고, 그 결과에서 다시 c를 더하고, d를 더한다. 즉 모두 세번의 순차적인 덧셈이 필요하게 된다. 이러한 방식을 보통 스칼라(scalar)방식이라 부른다. 스칼라는 라틴어로 계단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a+b는 p라는 처리기에서, c+d는 g라는 처리기에서 동시에 수행한 뒤 그 결과를 합하면, 모두 두번의 순차적인 덧셈만 필요하므로 스칼라방식보다 빠르다.
슈퍼컴퓨터의 원리를 우리 생활 속에서 비유하면 이렇다. 이발소에서 한 손님이 이발하고 면도하고 머리감을때까지 그 뒤에 온 손님이 소파에서 한가로이 신문만 보지 않는다. 한 손님의 이발이 끝나면 그 사람은 면도를 하게 하고 뒷 손님을 이발의자에 앉힌다. 그리고 면도를 마친 사람은 머리를 감게되므로, 한 사람이 이발-면도-머리감기를 하는 동안 뒷사람도 연이어 어떤 서비스를 받게 된다. 모든 손님이 줄줄이 이발-면도-머리감기 단계를 거쳐가므로 보다 빠르고, 이발소의 관점에서는 쉬는 사람없이 일하므로 보다 효율적이 된다. 이것이 파이프라인방식의 기본원리다. 이에 비해 벡터처리는 아예 이발의자와 세면대를 몇개 더 준비하고, 이발사를 몇명 더 고용해 동시에 몇사람의 이발사가 각각 독립적인 의자에서 여러 손님의 이발을 병렬적으로 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추가분의 기자재와 사람이 필요하다는 흠이 있지만 처리 속도면에서 보면 가장 효율적이다.
선구자는 항상 외롭고 고독한 길을 가게 마련인지, 컴퓨터구조에서 혁신적인 개념으로 무장한 선구자격인 ASC 일리악Ⅳ 스타 100은 상업적으로 참패를 맛보았다.
ASC는 무려 7천5백만달러를 잡아먹고 탄생했지만 겨우 세대가 팔려나갔다. 파이프라인방식을 주된 기술로 한 ASC 역시 1년 동안 겨우 세대 팔렸다. 그나마 지주 고장이 나서 사용자로부터 불평이 터져나왔다. 64개의 벡터처리기로 중무장한 일리악Ⅳ의 속도는 그당시 챔피언인 CDC7600보다 5배나 빨랐지만 가격이 무려 4천만 달러나 나갔다. 누가 이렇게 힘좋은 공룡을 들여다 키울 것인가. 게다가 벡터처리기를 갖춘 컴퓨터를 사용하기 위한 프로그램의 작성이 너무 까다로워 기존의 스칼라방식에 익숙한 프로그래머들은 완전히 두 손을 들고 말았다.
도깨비에게 얻어온 요술방망이가 있어 주문을 외기만하면 무엇이든지 뚝딱 만들어 준다. 그런데 그 '주문'이란 것이 1백만자나 되는 고대 이집트 말이고, 게다가 주문을 외울 때 한자라도 틀리면 도깨비 방망이가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면 그 방망이는 차라리 지게작대기보다 실용성이 없을 것이다. 벡터처리용 초기프로그램들은 이런 도깨비주문과 비슷했다.
소파겸용 슈퍼컴「크레이Ⅰ」
크레이는 ASC 스타100 일리악Ⅳ가 겪는 비참한 운명을 잘 지켜보았다. 그리곤 보다 안전하고 확실한 실용적인 길을 선택했다. 그가 항상 신념으로 삼는 것은 다음의 경구였다. '개척자는 싫다. 바로 그 다음이 좋아. 그 다음은 개척자의 실수를 한눈에 볼 수 있으며 거기서 중대한 교훈을 얻을수 있기 때문이다.' 크레이는 항상 최첨단 기술보다는 조금 뒤떨어지지만, 안전하고 확실한 기술을 선호했다. 그는 CDC7600을 만들때 트랜지스터의 신뢰성을 믿을 수 없다며 그동안 사용해온 진공관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확실하고 현실적인 기반 위에서 일구어낸 그의 창의성이 집약되어 세계 최초의 상업적으로 성공한 슈퍼컴퓨터가 1976년에 완성되었다.
크레이Ⅰ이라고 명명된 이 기계는 기존의 기계에 비해 약간 색다른 모양을 하고 있었다. 기존의 대형컴퓨터들은 거대한 캐비닛이 길게 늘어선 모양이었다면 크레이Ⅰ은 파인애플의 심지를 파낸 원기둥 모양이었다. 원기둥안에는 1.3m가량의 지름을 가진 빈 공간이 있었으며 전체 높이는 2m정도였다. 기존의 컴퓨터가 컨테이너 운반차라면 크레이Ⅰ은 반질반질하게 잘 닦여진 스포츠카 정도의 크기였다. 크레이의 설계원칙은 두가지였다. 첫째 벡터처리방식을 도입하되 매우 단순한 형태가 되게한다. 둘째 각 부품을 연결해주는 배선의 길이를 최소화한다.
이런 이유때문에 부품들은 일렬로 늘어선 형태가 아니라, 서로가 최소한의 거리로 연결되기 위해 원통형으로 모아졌다. 모든 배선의 길이는 1.2m가 넘지 않도록 꾸며졌고, 배선을 위해서 조그마한 몸집의 조립여공이 원통속에서 작업을 했다. 게다가 복잡한 배선을 감추기 위해 원통의 본체 둘레는 가죽소파로 만들었다. 그 푹신한 소파에 앉아있으면 엉덩이 밑을 지나가는 수많은 전선들이 내는 열로 인해 기분좋을 정도로 뜨듯했다고 한다. 소파겸용의 슈퍼컴퓨터라고나 할까.
크레이의 설명이 걸작이었다. "컴퓨터를 구경하기 위해서 무거운 소파를 끌고다닐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냥 컴퓨터에 앉기만 하면 되니까요." 하여간 세계에서 가장 비싼 컴퓨터겸용 소파가 탄생했다. 가격은 8백80만달러.
크레이Ⅰ은 벡터처리기가 붙어있긴 했지만 무엇보다도 빠른 스칼라처리기가 주된 특징이었다. 사용자들이 제대로 쓸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벡터처리기는 전체 시스템의 속도를 떨어뜨리기 때문이었다. 괴테가 일찍이 '간단한것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했지만 크레이는 '간단한 것이 빠른 것'이라는 진리를 만들어 냈다. 이런 진리는 최근에도 RISC(명령어 축소컴퓨터)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크레이Ⅰ의 속도는 스칼라처리시 16메가플롭스(1초당 실수계산을 1천6백만회 수행)였으며, 벡터 처리기가 최고로 사용될 때에는 1백60메가플롭스까지 성능을 내었다. 이것은 CDC7600보다 4배나 빠른 속도였으며, 당시 최고 속도를 자랑했다.
적당한 가격(?)과 빠른 속도로 인해 크레이Ⅰ은 1981년까지 40여대 팔려나갔고, 크레이리서치사는 단단한 재정자립을 이룩했다. "크레이Ⅰ이 컴퓨터발달에 어떤 획기적인 기여를 했느냐"고 묻는다면 "아무 것도 없다"고 대답할 수 밖에 없다. 새로운 것이라고는 본체를 냉각시키는 냉각장치뿐이었는데 이것은 기존의 방식과는 판이했다.
기업체에도 널리 쓰여
크레이Ⅰ은 이후 6년간 슈퍼컴퓨터시장을 독점했다. 그러나 슈퍼컴퓨터의 사용이 핵연구소 국방관련연구소와 같은 비영리연구소에서 일반기업체로 확대됨에 따라 슈퍼컴퓨터용 프로그램개발은 커다란 문제로 대두되었다. 말많은 호사가들은 크레이사를 향해 '쇳덩이만 팔아먹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했다.
어쨌거나 크레이Ⅰ은 과학계산 분야에 신기원을 이룩하였다. 탄두가 충돌시 어떤 모양으로 찌그러지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현재 개인용 컴퓨터로 가장 많이 쓰이는 AT기종을 이용하면 6년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게다가 그 사이 몇번 정전이라도 일어나서 데이터를 부분적으로 잃는다면 영영 해답을 보지못한채 우리는 일생을 마칠 수도 있다. 그 문제를 범용컴퓨터 VAX 11/780 수준으로 해결한다면 80여일이 걸리지만 크레이Ⅰ은 단 5시간만에 해답을 내준다. 지진학과 같이 엄청난 양의 데이터가 필요한 분야에서 슈퍼컴퓨터는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었다.
또 석유탐사와 같이 엄청난 돈이 투여되고 시추구멍하나 뚫는것이 도박에 비견될만한 일에서 크레이Ⅰ은 유감없이 그 진가를 드러내었다.
슈퍼컴퓨터 크레이Ⅰ을 석유탐사에 최초로 이용한 사람은 ARCO사의 탐사과학자들이었다. ARCO사는 해저층에 음파를 발사하고 되돌아오는 파형을 분석해서 어떤 지층 아래 석유가 숨어있는지 분석한다. 그러나 바닷속이라고 해서 잡음이 없지는 않다. 표층의 파도소리나 물고기들에 의한 소리 등등, 이러한 수많은 잡음을 반향파와 구별해내는 작업은 엄청난 수학적인 계산을 요구한다. 크레이Ⅰ은 이를 훌륭히 수행했다. 드디어 ARCO사는 알래스카에서 기존의 원유회수율을 10%나 높이는데 성공했다. 다른 석유회사도 질세라 크레이Ⅰ을 사들여서 1985년까지 무려 18대가 석유생산업체로 팔려나갔다.
항공기 제작회사에서도 크레이Ⅰ을 구입했으며 심지어는 할리우드에서도 특수효과나 만화영화제작을 위해 슈퍼컴퓨터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XMP의 등장과 일본의 도전
크레이Ⅰ의 발명자, 세이모 크레이는 거대해진 회사관리가 점차 부담스러워지자 연구고문직으로 물러났다. 당시 크레이사에는 데이비드 쿡이라는 당대 최고의 컴퓨터이론가에게서 배운 스티브 첸(Steve Chen)이라는 젊은 엔지니어가 있었다. 크레이가 경영일선에서 물러난지 몇달뒤 첸은 크레이XMP(Extended Multi-Processor)라는 새로운 슈퍼컴퓨터를 완성하여 세상에 공개했다. XMP의 기본전략은 크레이Ⅰ의 짧은 배선기술에 의하지 않고 보다 우수한 벡터처리기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XMP는 슈퍼컴퓨터 구조에 있어서 일보 전진을 의미했다. XMP의 성능은 약 4백20메가플롭스로서 크레이Ⅰ보다 3~4배 더 빨랐다. 드디어 세이모 크레이의 뒤를 잇는 엔지니어가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슈퍼컴퓨터 시장을 언제까지나 크레이사가 독점할 수는 없었다. 스타100으로 쓰라린 실패를 경험한 CDC는 그 경험을 바탕으로 사이버(Cyber)203이라는 고속컴퓨터를 만들어 미해군의 기상분석실, 해군수리해양학센터에 설치했다. 이후 사이버205를 발표하여 본격적으로 크레이사에 도전했다. 크레이사의 독점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CDC는 ETA라는 슈퍼컴퓨터를 전문제조하는 자회사를 설립해 본격적으로 슈퍼컴퓨터시장에 뛰어들었다. 세이모 크레이가 CDC를 나오면서 타격을 주었듯이, 이제는 CDC의 사이버205모델이 크레이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멀리 태평양 건너에서도 거대한 움직임의 시초가 보이기 시작했다. 일본의 3대 컴퓨터 제조회사인 후지쓰 히타치 NEC가 연합하여(게다가 정부의 막대한 자금지원까지 얻어가면서) 슈퍼컴퓨터 시장에 뛰어 들었다. 바야흐로 '슈퍼컴 전쟁'이 시작됐다.
실패는 누구나 한다. 그러나 실패를 분석하여 미래의 등불로 삼는 것은 아무나 하지 못한다는 것을 크레이는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