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테크기술에 관한한 세계 정상을 구가하고 있는 일본. 최근에는 원자력 항공우주분야에서까지 선두를 넘보고 있다.
미국 대 소련은 16대 4. 미국 대 나토(NATO)는 13대 7. 미국 대 일본은 12대 8.
무슨 핸드볼 스코어가 아니다. 미국 나토 그리고 일본의 중요 군사기술 수준에 대한 판정결과다. 지난 해 초 미국 국방부는 미국 일본 나토의 스무가지 군사기술력(핵은 제외)을 비교해 그 결과를 발표했다. 대체로 아직까지는 미국의 우위를 확인할 수 있었지만 몇몇 분야에서는 다른 나라의 추월을 허용하기도 한다.
소련이 미국보다 앞선 기술은 스무가지중 네가지였는데, 그중 발사체의 추진기술은 확실히 한두 수 위였다. 그러나 정작 미국방부 관계자들을 긴장시킨 것은 일본이 비교우위에 있다고 판정된 여덟가지 기술이었다.
그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일본은 시뮬레이션(모의실험)과 모델링, 고밀도 재료, 복합재료 부문에서 미국보다 반발정도 앞서 있다. 상대적으로 더 큰 미일격차를 보이고 있는(일본이 앞서 있는) 기술은 반도체와 미세전자회로, 기계와 로봇, 광(光)관련기술, 초전도체, 생물공학 재료 등 다섯가지 부문. 국방부 보고서는 아직은 미국이 비교우위에 있는 기술이 양적으로 더 많지만 일본의 기술은 이미 미국이 자랑하는 군사기술 분야에서조차 필적할 만한 수준에 도달했다고 결론 지으면서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노골적으로 내비쳤다.
임기응변력이 뛰어나
사실상 현재 세계의 과학기술 경쟁은 미일 간의 경쟁으로 압축되고 있다. 미국과 오래도록 경쟁관계에 있던 소련이나 서유럽 국가들도 일본에게 도전자의 자리를 넘겨준지 오래다. 이제는 미국도 일본을 가장 강력한 라이벌로 바라보고 있으며 일본 역시 미국을 유일한 상대로 지목하고 있다.
그렇다면 두 강타자의 한판은 누구의 손을 들어주고 막을 내릴까. 물론 세계과학기술계의 현 챔피언은 미국이다. 2차대전 이래 줄기차게 롱런가도를 달리고 있는 미국은 기초체력(기초과학)이 뛰어나고 늘 공격무기(군사목적기술)를 다듬는데 주력하고 있다. 게다가 과학기술발전의 쌍포라 할 수 있는 연구비와 연구원수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만큼 파이트머니(기술수출액)도 많이 챙기고 전적(논문수)도 화려하다. 또 이 덩치 큰 '친구'는 관중수(수요)와 무관한 새로운 기술개발에도 여념이 없다.
이에 비해 도전자인 일본은 비록 기초체력은 달리지만 링에서의 임기응변력(응용기술)은 월등하다. 최근에는 기초체력도 갈고 닦아 챔피온과의 실력차를 현저히 줄였다. 재빠른 동작이 요구되는 '어퍼컷'(하이테크제품 기술)은 오히려 미국보다 날카로운 맛이 있다. 상대의 틈을 예리하게 파고드는 게 특기인 이 까다로운 도전자는 최근 항공우주 원자력 등 챔피언급 기술까지 익히고 있어 기량이 날로 향상되고 있는 상태다. 게다가 이 도전자는 늘 관중의 수를 세고 있고 관중에게 크게 어필할 만한 기술을 선보여 '독불 장군'인 챔피언에게는 상당한 부담이 되고 있다.
도전자 일본은 첨단기술만은 당장 내년부터라도 미국을 추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실제로 일본 통산성이 지난 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그동안 미국에게 뒤져온 마이크로프로세서, 고성능 신복합재료, 생명공학제품 분야에서도 92년부터는 미국을 앞질러 세계 첨단기술의 정상에 서게 되리라고 한다. 통산성은 모두 41개 부문에 걸쳐 장래의 미일기술비교를 한 결과, 92년 이후에도 미국우위로 남아 있을 부문은 항공기엔진 컴퓨터 데이터베이스 등 세개 품목뿐이라는 결론에 이르고 있다.
80년대까지 일반적으로 로봇 메카트로닉스 집적회로(IC) 광통신 분야에서는 일본우세, 컴퓨터 원자력 생명공학 항공 우주개발은 미국우세로 알려져 왔다.
일본의 우위가 뚜렷이 나타나고 있는 로봇 메카트로닉스 반도체 분야에서의 양국간의 격차는 시간이 흐를수록 커지고 있다. 특히 그 중요성때문에 철과 함께 '산업의 쌀'이라고 일컬어지는 반도체의 경우 일본은 D램(RAM) S램 광전자 바이폴라 등 4개부문에서 앞서고 있다. 아직도 미국기술이 한수 위인 부문은 마이크로프로세서와 논리소자 등 2개부문 뿐이고 롬(ROM)부문은 양국의 기술수준이 비슷하다는 게 일본 노무라연구소의 작년도 분석결과다.
실제로 세계반도체시장은 현재 일본의 독무대다.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메이드 인 USA'의 점유율이 60%를 넘었으나 중반이후 40%이하로 떨어졌다. 반면 일본은 86년에 미국과 자리바꿈을 한 이래 날로 정상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있다.
이렇게 몇몇 첨단기술분야에서 일본의 기술이 미국을 앞질러 세계의 정상을 구가하고 있지만 전체적인 과학기술 수준을 놓고 보면 여전히 미국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견해도 있다.
노벨상에 관한한 할 말 없어
일본의 통상백서에 따르면 아직도 미일기술력의 차이는 '현저하다'고 자인한다. 최근 10년간 미국은 일본보다 기초연구비를 3.2 배나 더 투자했고, 연구원수는 1.6배, 학술논문 발표건수 2.8배, 연구자 1인당 특허취득 건수 1.8배, 자연과학분야 노벨상 수상자를 17.5배나 더 배출했다.
기술무역액에서도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바와는 다르게 아직도 일본은 기술수출보다 수입이 많은 나라다. 최근에도 기술수입액은 수출액의 3배나 된다. 그 수입기술의 90%는 미국에서 들여오고 있는데 세계에서 기술수출을 가장 많이 하는 나라인 미국은 기술수출액이 일본의 7배나 된다.
기초과학이 상대적으로 뒤진 일본에서는 과학분야에서 그동안 5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을 뿐이다. 따라서 노벨상 얘기만 나오면 쥐구멍이라도 찾고싶은 것이 일본 과학기술계의 현실이다. 알프스의 소국 스위스(과학분아에서만 13명)보다도 노벨상 수상자가 휠씬 적으니 그럴 만도 하다.
일본의 과학분야 노벨상 수상자는 중간자의 존재를 밝혀낸 유카와 히데키(湯川秀樹, 49년 물리)를 비롯해 도모나가 신이치로(朝永振ᅳ郎, 65년 물리) 에자키 레오나(江崎玲於奈) 후쿠이 켄이치(福井謙一, 81년 화학) 도네가와 스스무(利根川進, 88년 생리의학) 등이다. 그런데 이들중 네명이 교토대학 출신이고 에자키 레오나만이 도쿄대 출신이다. 이를 두고 교토대의 자유로운 학풍이 노벨상을 낳았고, 일본의 간판인 도쿄대학의 권위적이고 경직된 분위기가 창의적인 연구활동을 가로막아 노벨상에의 접근을 어렵게 했다는 분석도 있다.
실제로 에자키도 소니와 IBM등에서 연구한 경력으로 노벨상을 받았으므로 도쿄대는 세계적인 명성과는 걸맞지 않게 노벨상과는 인연이 잘 닿지 않는 셈이다.
노벨상 수상자인 후쿠이 켄이치는 일렬횡대식 집단주의 풍토가 일본인을 기초연구보다는 응용연구에 적합하도록 키웠다고 지적한다.
일본은 오래도록 '돈이 되지 않는 기술'을 애써 외면해 왔으나 요즘에는 기초과학에 대한 관심을 적극적으로 내보이고 있다.
그 한 예가 슈퍼박테리아 연구에 대한 무한정의 지원공세다. 바닷물보다 8배나 짠물에서 사는 박테리아의 유전자를 분리해 이용할 계획으로 추진되고 있는 이 연구는 당장 돈이 되는 연구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일본정부의 지원은 아낌이 없다.
기초과학에 대한 일본의 적극적인 투자는 응용기술의 한계를 체험했기 때문이라는 풀이도 있다. 하여튼 과학기술무임승차국이라는 오명도 벗고 기초와 응용 양대분야에서 명실상부한 세계 최정상에 서려는 일본의 야심이 숨어 있다.
특허분쟁으로 비화되기도
미일간의 기술경쟁은 간혹 기술마찰로 비화되기도 한다. 주로 미국이 제소를 걸어 오는데, 그 속에는 일본이 미국의 기술을 이용해 경제적 성과라는 열매를 독식하는데 대한 불만이 누적돼 있다.
"과거에는 미일 기술분업체제를 이뤄왔으나 최근에는 첨단기술부문의 미일격차가 급속하게 축소됨에 따라 미일간의 기술 상호의존성이 높아졌고 따라서 양국간의 기술마찰이 증가되고 있다"고 산업연구원 사공 묵 연구원은 지적한다.
IBM에 대한 히다치 미쓰비시사의 산업스파이사건(1982년)으로 대표되는 미일간의 기술마찰은 간혹 특허분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특허분쟁시 미국의 표적이 되는 것은 반도체 분야. 한때 세계 반도체시장을 주름잡았고 지금도 미국 최대의 반도체메이커인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I)사가 자신들의 D램 특허를 침해했다는 이유로 일본의 8개사를 상대로 제소한 사건이 특허분쟁의 한 예, 이 제소로 일본의 반도체 업체들은 어쩔 수 없이 막대한 로열티를 지불하고 있다.
HDTV는 일본방송공사(NHK)에 의해 처음 개발됐는데 1985년 쓰쿠바박람회에서 일반에 공개되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흔히 하이비전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 첨단 TV는 수평주사선이 일반TV(5백25선)보다 2배가 많아(1천1백25선) 매우 선명한 화면을 제공해 준다. 그런데 이 HDTV는 장래의 미일 하이테크 분쟁거리 제1후보로 꼽힌다. 대규모 집적회로(LSI) 1백개가 들어가야 물건이 되는 HDTV는 세계 반도체시장 뿐 아니라 가전제품시장판도를 완전히 뒤바꿀 것으로 예상된다.
뒤늦게 개발에 착수한 미국은 한발 앞선 일본방식이나 유럽방식을 활용할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되면 일제 HDTV의 쇄도를 막아낼 방법이 없어진다. 그래서 미국은 3년 동안 3천만달러의 연구비를 쏟아부어 독자방식을 개발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아무튼 이 HDTV는 미일 과학기술자의 자존심을 건 최대의 격전장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렇게 일본에 대한 미국의 공세가 거세지자 일본정부와 기업도 나름대로 대책을 세워 나갔다. 그 첫째 대응은 R&D 활동을 강화하고 국제 공동연구를 추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위해 연구비와 연구인력을 대폭 확충하는 한편 연구교류촉진법을 제정하고 산학공동연구센터를 설치하는 등 주변의 여건도 활성화하고 있다. 둘째로 특허관리를 철저히 하고 해외특허 취득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그 결과 1989년 미국에서 특허등록된 신규특허중 21.1%를 일본이 취득했다.
H시리즈의 성공으로
그렇다면 현재 일본이 주력하고 있는 연구분야는 무엇일까. 거의 전분야의 과학기술 발전을 꾀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중점을 두는 것은 원자력을 비롯해 항공우주 해양 생명과학 초전도체 자기부상열차 광통신 HDTV 제5세대 컴퓨터 등이다.
현재 원자력 연구분야에서는 1981년 일본의 자체기술로 처음 만들어낸 실험용 원자로를 활용, 무방사능 연료와 물질을 제조하는 시험이 진행되고 있다. 또 내년에는 원형 원자로도 등장할 예정이어서 미국과 프랑스가 주도하는 현재의 원자로 시장에 곧 일본이 가담할 것으로 보인다.
고온핵융합에 대한 연구도 착실히 진행되고 있는데 그 상징적인 장치는 JT-60이다. 1985년에 첫 선을 보인 JT-60은 한때 세계 최대의 에너지동위상태를 얻어냄으로써 주가를 높이기도 했다. 아무튼 이 장치는 미국의 토카막(Tokamak)이나 유럽의 토러스(Torus)에 손색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작년 7월 현재 일본에서는 총 38기의 상업용 원자력발전소가 가동돼 3천38만kw의 발전용량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일본의 실제 발전량의 25.5%에 해당하는 양이다. 게다가 2000년까지는 발전량을 5천3백만kw로 높일 계획이어서 에너지의 원자력 의존도가 더욱 심화되는 추세다. 따라서 연구의 초점을 안전성을 보다 확보하고 핵연료를 완벽하게 재순환시키는데 두고 있다.
일본은 에너지가 늘 부족한 나라인만큼 대체에너지의 개발에도 힘쓰고 있다. 태양 지열 풍력 조력에너지에 꾸준한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석탄의 액화와 가스화기술은, 석탄을 이용한 수소제조기술은 독일과 함께 세계 최고수준이다. 특히 태양전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 광전환율이 가장 높은 태양전지를 내놓고 있는데 태양자동차 경주에도 상시 출전해 그들의 태양열 이용기술을 뽐내기도 한다.
우주개발에 쏟는 일본의 열정은 늦게 배운 도둑이 날새는 줄 모르는 격이다. 이미 기상 예보 통신 방송 지구관측용 인공위성을 다수 우주로 발사했는데, 오랫동안 이 인공위성을 하늘나라로 이끈 안내자는 미국의 델타로켓의 기술을 들여와 만든 미국식 로켓들이었다. 그러나 지난 86년 8월 일본의 독자적인 기술로 개발한 관성유도로켓인 H-1(국산화율 80%)의 시험발사에 성공하면서부터 미국의존도를 크게 탈피하게 되었다.
또 내년에는 H-1을 개량한 H-2가 우주를 향해 날게 돼 있어 이제는 일본도 본격적으로 로켓장사에 동참할 것으로 보인다. 각종 인공위성을 손님으로 모시는 로켓장사는 부가가치가 무척 큰데 그동안 미국 소련 유럽(ESA) 등이 이 사업을 독점하고 있었다.
미국의 맥도널 더글러스사의 기술지원을 받아 제작된 H-1 로켓은 성능면에서 유럽우주기관(ESA)의 아리안Ⅳ로켓이나 미국의 우주왕복선보다 한 수 떨어진다. 아리안Ⅳ는 1.5t, 우주왕복선은 2.5t까지의 정지위성을 쏘아 올릴 수 있으나 H-1은 5백50kg이 한계.
그런데도 세계 최대의 상업용 인공위성 발사기관인 ESA가 "이제 아리안 로켓이 흰빵을 먹을 수 있는 시대는 끝났다"고 자탄하는 이유는 일본의 기술저력을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ESA의 두려움을 현실화시킬지도 모르는 로켓이 H-2다. 국산화율 100%를 이룩할 H-2는 높이가48m, 무게가 2백60t에 이르는 '골리앗'인데 2.2t의 정지위성을 우주에 거뜬히 올려놓을 계획이다.
항공우주학자 채연석박사는 "아리안Ⅳ보다 H-2의 용량이 크다"고 전제한 뒤 "이런 추세라면 90년대 후반에는 일본이 세계 우주 시장마저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일본은 이미 유인우주선 개발계획까지 추진하고 있으며 96년에는 일본판 우주왕복선 호프(Hope)를 발사할 계획이다. 아무튼 1955년 길이 23cm, 무게 1백90kg짜리 연필 로켓을 발사하면서 시작된 일본의 우주계획은 H시리즈의 성공을 발판으로 세계최고를 향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벌써부터 달 표면 기지건설에 대한 구체적 시안을 마련하고 있는가 하면 우주에 관광호텔을 지어 우주관광시대를 열어가겠다는 포부를 펼쳐 보이고 있다. 또 여러 기술분야의 결합에 능숙한 그들의 소질을 십분 발휘, 우주에서 태양전지를 이용해 발전을 하고 이를 지상에 보낸다는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만약 일본의 의도대로 된다면 지상에서 발전하는 것보다 10배의 효율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항공기술도 이제는 국제무대에서 독자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 상징적인 항공기가 YS-11기. 하지만 정상수준과는 꽤 떨어져 있어 주로 국제공동연구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예컨대 보잉 767과 1백50인승 민간 항공기 YXX기의 국제공동개발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고, 서독 이탈리아 영국 미국과 함께 첨단제트엔진인 V2500을 개발중이다.
또 국토가 좁은 일본은 헬리콥터처럼 활주로를 조금 차지하는 비행기에 관심을 갖고 있는데, 이것이 단거리 이착륙기(STOL)다.
STOL의 일본 1호는 1985년에 처녀비행을 성공리에 마친 아스카(飛鳥)기. 앞뒤 길이가 29m, 날개쪽 길이가30.6m, 중량 38.7t인 이 미니비행기는 9백m 안팎의 활주로에서도 이착륙이 가능하도록 설계됐다. 일본의 기술자들은 이 아스카에도 그들의 장기인 개량을 거듭해 나갔다. 그 결과 87년에는 활주거리가 5백9m로 단축됐고 88년에는 4백 39m로 줄어들었다. 이같은 추세라면 멀지 않은 장래에 일본제 수직이착륙기(VTOL)도 등장할 것으로 보인다.
항공기의 기본 제작능력에 있어서 서구보다 열세라고 느낀 일본은 소음을 줄이거나 에너지를 절약하는 방향으로 초점을 모으고 있다.
동체의 무게를 줄여 열효율을 높임으로써 비행기 운항비의 30%를 차지하는 에너지를 절감시키는 것이 요즘 항공기 소재산업의 첫째 목표다. 물론 강도 안전성 내열성 경제성 등은 기본적으로 충족돼야 한다. 따라서 이런 까다로운 조건을 만족시켜야 하는 항공기 재료의 질은 그 나라의 재료공학 수준을 엿보게 하는 기준이 된다.
90년대에는 알루미늄합금과 탄소섬유 합성물질이 항공기재료의 왕좌를 놓고 경쟁을 벌일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로 미국 보잉사는 85~95년 사이에 제작되는 비행기의 재료중 65%를 탄소섬유 합성물질이 차지할 것으로 예측했다. 그런데 그 재료중 어떤 재료가 더 각광을 받든 간에 일본의 입장은 느긋하다. 알루미늄기술은 미국과 대등한 수준이며, 탄소섬유 합성물질 기술은 세계정상이기 때문이다. 탄소섬유 합성물질의 경우 일본은 전세계 생산량의 60% 이상을 점하고 있다.
섬나라인 일본이 해양개발 분야에서 앞서 가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이미 항공모함을 소유했을 정도로 조선공학은 그 기초가 단단한데 요즘에는 인류의 마지막 보고라고 불리는 바다 속을 샅샅이 탐사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그 주역은 81년에 건조된 신카이(深海)2000이라는 잠수함으로 이 배는 바다 밑 2천m까지 내려갈 수 있다. 또 티탄합금을 소재로 만든 신카이 6500이라는 잠수함도 있는데 이름대로 수심 6천5백m까지 짐수하는 이 배는 현재 프랑스와 미국에서 운행중인 그 어떤 잠수함보다도 깊이 내려갈 수 있다.
초전도체에 대한 연구도 무척 활발하다. 1986년 IBM의 두 연구원 뮐러와 베트노로츠(이들은 87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가 절대온도 30K에서 초전도성을 나타내는 물질을 발견했는데 이를 계기로 세계는 온통 초전도열풍에 휩싸였다. 일본도 예외는 아니었다. 87년에 도쿄대학의 다나카 쇼지교수팀이 IBM의 초전도성 물질을 재현한 이래 보다 높은 온도에서 초전도현상을 보이는 물질을 찾기에 부심하고 있다.
아무튼 초전도체의 상품화에도 일본이 한발 앞서 갈 것으로 보이는데, 이 또한 외국의 기초연구를 들여와 재빠르고 훌륭하게 상품화한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초전도체 연구의 가장 가시적인 성과는 자기부상열차. 1987년 일본국철이 민영화되면서 떨어져 나온 철도기술연구소는 국철이 착수해 놓았던 자기부상열차에 관한 연구를 이어 받았다. 이 연구소는 규슈에서 미야자키현에 이르는 시험용 철로에서 실험을 진행시키고 있는데 지난 89년 승객을 태우지 않은 시험주행에서는 시속 5백17km를 냈다. 그러나 승객을 태우면 시속 4백km로 떨어진다.
일본은 또 세계최초의 초전도전자추진선을 선보이기도 했다. 1985년에 착수돼 금년에 완성된 이 스크루 프로펠러가 없는 기이한 배의 이름은 '야마토-1'. 야마토(大和)란 일본의 딴 이름이다.
전장 30m, 폭 10m, 승선인원 10명인 이 유선형의 배는 초전도자석으로 발생시킨 자장에 전류를 흐르게 했을 때 발생하는 힘을 추진력으로 이용한다. 속도조절이 쉽고 진동이나 소음이 적은 초전도배가 앞으로 조선업계에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는 미지수나 그 첫 개발국이 일본이라는 사실에 세계각국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로봇에 관한한 일본의 기술을 따를 나라는 아직 없다. 현재 일본에서만 17만 5천대의 산업용 로봇이 작동하고 있는데 반해 나머지 전세계 국가를 통틀어도 6만여대에 지나지 않으므로 로봇왕국이라는 칭호가 제격이다. 특히 작년 말에는 세쌍둥이 로봇이 등장해 눈길을 끌었는데, 이들은 8년간 20억엔의 연구비를 들여 완성한 것들이다. 모든 것을 스스로 알아서 처리하는 이 세 로봇은 원자력 발전소 해저 화재현장 등 인간이 접근하기 어려운 곳에서 활약할 예정이다.
지능형 제3세대 로봇시대를 홀로 맞고 있는 일본은 그 축적된 기술력을 바탕으로 세계의 어느 국가도 감히 꿈꾸지 못했던 '로봇이민'을 추진하는 등 로봇의 해외진출에도 눈길을 돌리고 있다. 로봇이민이란 로봇으로 운영되는 무인공장을 아시아나 유럽에 건설해놓고 일본에서 원격조정장치로 가동시킨다는 것. 또 일본은 그들의 장기를 십분 발휘할 수 있는 마이크로 로봇에도 도전하고 있다. 어쩌면 SF영화의 걸작 '마이크로 특공대'에서 처럼 일본의 극미 로봇들이 우리의 혈관속에서 콜레스테롤을 제거하게 될지도 모른다.
「작은 것은 아름답다」
'작은 것은 아름답다.' 이것은 서구사회의 거대주의를 비판한 슈마허의 저서명이지만 일본기술 일본문화를 극명하게 대변하고 있다.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라는 이어령씨의 저서도 있지만 실제로 일본 제품들은 가볍고 작고 짧고 얇다.
그 경소단박(輕小短薄)의 원리를 잘 보여주는 전형적인 제품은 8mm짜리 비디오카메라 인 '핸디캠'. 한때 월 10만대가 팔릴 정도로 히트상품이었던 핸디캠은 여권 크기에 무게는 7백90g에 불과하다.
작은 것에 대한 추구가 집대성된 것이고 밀도집적회로(LSI). 일본의 LSI 기술수준은 0.5μ(${10}^{-6}$m) 수준인데 이로써 일본의 반도체 메모리능력은 2백56MD램까지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작게 만드는 것은 전자제품 뿐만이 아니다. 그들의 분재(盆栽)취미를 반영하듯 최근에는 초소형 장미를 재배하기도 했다. 지난 해 일본에서 열린 국제 꽃박람회에서 인기를 모은 키 5cm 직경 1cm짜리 꼬마 장미가 그것. 일본 기업들은 생물공학기법을 동원해 생산해낸 이 장미가 화훼산업의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처럼 작은 것에 대해 전통적으로 강한 일본의 기술은 극미의 세계에도 도전하고 있다. 현재 이 방면에서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것은 인공효소 인공광합성 인공혈액 등인데 생체모방기술 두뇌모방기술(뉴로컴퓨터) 감각기 모방기술(바이오센서) 초정밀 인공장기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다.
1982년에 설립된 일본의 신세대 컴퓨터기술연구소(ICOT)는 10년 계획으로 기존의 컴퓨터와는 그 근본원리가 완전히 다른 신세대 컴퓨터 개발작업을 착수했다. 이를테면 제5세대 컴퓨터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셈인데 그들의 목표는 인간의 눈 귀 입과 같은 기능을 가지고 인간과 비슷한 사고과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컴퓨터를 만드는데 있다.
컴퓨터분야에서도 일본의 기술은 IBM을 바짝 뒤쫓는 수준이며 슈퍼컴퓨터를 놓고는 미국의 크레이사와 한치의 양보없는 혈전을 벌이고 있다.
끝으로 한국과의 비교를 해 보자. 안타까운 얘기지만 우리와 일본의 기술격차는 너무도 현저해서 대부분의 첨단기술을 일본에서 들여오는 실정이다.
88년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우리의 연구개발비는 절대액에서 미일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국민총생산(GNP)대비 연구개발비도 일본(2.62%) 미국(2.59%)보다 크게 떨어진다(1.9%). 또 인구 1만명당 연구원수도 일본이 36명인데 비해 우리는 14명에 불과하다.
1988년 현재 매출액 대비 연구개발비의 비율을 봐도 큰 격차가 나는 것은 마찬가지다. 일본이 전산업 평균 2.61%, 제조업 평균 3.15%인데 반해 한국은 전산업평균 1.61%, 제조업평균1.88%가 고작이다.
일본이 우리의 기술수준을 어떻게 보느냐는 작년 니혼케이자이(日本經濟)신문의 한 기사에서 잘 나타난다.
"반도체 메모리분야는 일본기업과 개발경쟁을 벌이는 한국기업이지만 그외의 분야에서는 기술적으로 볼만한 것이 없다. 자사개발 엔진을 탑재하고 있는 자동차메이커는 전혀 없으며 항공기 메이커도 글라이더 하나 자체기술로 개발한 것이 없는 것이 그 간의 실적이다.
원래 선진국과의 기술격차가 있던 데다가 80년대 후반에는 선진국 기업의 연구개발 투자경쟁으로 인해 그 격차가 더 벌어졌다. 일본 등이 HDTV 관련분야 등에서 기술투자의 수확기를 맞고 있는데 비해 한국은 이제 파종이 시작된 단계에 있다.
한국 메이커의 하이테크 제품에 대한 도전은 선진국으로부터의 기술습득을 전제로 해 왔다. 일본 등이 국제분업의 파트너로서 한국을 중시하고 있는 동안은 기술이전도 '기브 앤드 테이크'의 관계로 진척됐으나 인건비 앙등 등으로 인한 한국내의 생산비 상승으로 말미암아 그 사이클이 순조롭게 회전되지 않고 있다. 전자업계에서만 외국에 지불하는 기술료가 연간 2천6백억원에 달하며, 이 부담도 아주 힘겨운 상태다."
이 기사는 친절하게도 한국이 취해야 할 길, 두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즉 다른 개도국보다 비교우위에 있는 기술을 적극 활용하거나 독자적으로 연구개발을 추진하라는 것이다.
확실히 일본의 기술은 우리보다 여러 수위다. 미국에 대해서도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일본이 되었으니 그들이 40여년간 추진한 기술패권주의가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걸프전쟁에서 선보인 고도로 정밀한 군사장비 속에도 일본의 기술이 숨어 있을 정도다.
일본이 어렵게 성취한 기술을 우리에게 고스란히 전달할 리는 없다. 아직도 한일간의 기술이전이 여러 분야에서 이뤄지고는 있지만 대부분이 한물간 기술이라는 지적도 있다. 혹자는 일본에서 첨단기술을 도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건 연목구어와 다를 바 없다고 단언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런 저런 눈치보지 않고 국가의 자존심을 지키려면 우리의 기술을 우리 스스로 개발하는 길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