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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中華)적 세계관이 우르르 마테오 리치 충격파

1602년의 곤여만국전도는 서양 세계지도를 한문으로 옮겨 놓은 단순한 번역판이 아니었다.

곤여만국전도^1602년 마테오 리치가 제작한 이 지도에는 유럽 리미아 남북아메리카 메가라니카 등 5대륙이 그려져 있었다. 이 지도가 조선에 들어오면서 조선학자들의 중국중심 세계관이 크게 흔들렸다.


1603년 조선에는 새로운 세계지도가 전래됐다.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이광정(李光庭)과 권희(權憘)가 1602년 제작된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를 가져온 것이다. 그것은 조선학자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타원형으로 그려진 세계의 서쪽에는 거대한 유럽대륙이 자리잡고 있었다. 동쪽에는 남북 아메리카대륙이, 그리고 남쪽에도 대륙이 있었다. 특히 거대한 유럽의 존재는 커다란 놀라움이었다. 1402년 조선 세계지도로 알고 있었던 그런 유럽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수광(李晬光)이 그의 저서 '지봉유설'(芝峯類說)에 이 1602년의 마테오 리치 세계지도를 구라파국 여지도(歐羅巴國 輿地圖)라고 쓴 것도 무리가 아니다.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 즉 지구상에 있는 모든 나라의 지도라는 이 지도의 제호에도 불구하고 이수광의 눈에 들어온 것은 구라파(유럽)가 전부였던 것이다. 중국 이름으로 이마두라 불린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는 서양의 천문학과 수학 지리학에 정통한 그의 학문적 배경을 십분 활용, 1584년과 1602년에 두종의 세계지도를 제작 간행했다. '산해여지전도'(山海輿地全圖)와 '곤여만국전도'가 그것이다.
이 세계지도들은 서양 근대 지리학의 성과를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서양 세계지도를 한문으로 옮겨 놓은 단순한 번역판이 아니다. 가능한 한 중국은 중앙부에 놓고 부분적이나마 중국 지리학의 전통을 밑에 깔아 중국인이 쉽게 수용할 수 있게 배려한 것이다.

실학자들에게 자극을 주고

이 지도를 통해 중국인들은, 대지(大地)는 구체(球體)이고 세계는 유럽 리미아(아프리카) 아시아 남북아메리카 메가라니카(남방 대륙)의 5대륙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처음 인식하게 되었다. 또 기후는 위도에 따라 5지대로 나뉘어져 있다는 사실을 더욱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이 곤여만국전도가 북경에서 새로 간행된지 1년이 채 되기전에 조선에 들어온 것이다.

무엇보다도 커다란 충격은 중국이 세계의 중심일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조선학자들의 중화적(中華的) 세계관은 이 1602년의 마테오 리치 세계지도에 의해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실제로 조선 중기 실학자들의 서양에 대한 지적 호기심과 새로운 문물 도입에의 정열은 이 지도를 보면서 시작되었다. 중국에 와서 활동하던 예수회사(會士)에 대한 조선 학자들의 시각도 새로워졌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은 이러한 사실을 선명하게 그려놓고 있다. 조선학자들의 눈이 세계를 향해 그 시야를 넓히게 된 것이다. 실학자들이 그 선구자들이었다.
 

지구의^조선의 지리학자들은 지구의를 동아시아 최초로 제작했는데 여기에는 곤여만국전도를 비롯해 당시 세계최고 수준의 지도가 그려져 있다.


서양인을 해귀로 표현해

'지봉유설' 권2는 지리부(地理部)와 제국부(諸國部)로 이루어져 있다. 그 외국항에는 여러 나라에 대한 수많은 지식을 기술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몇 부분을 그가 쓴대로 인용해 보자.

"만력(萬曆) 계묘년(癸卯年, 1603년)에 내가 부제학의 자리에 있을 때, 중국 수도에 갔다가 돌아온 사신 이광정 권희가 구라파국의 여지도(與地圖) 1건(件) 6폭을 본관(本館)에 보내왔다. 아마 경사(京師)에서 구득한 지도일 것이다. 그 지도를 보니 매우 정교하게 그려져 있었다. 특히 서역(西域)에 대해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중국의 지방과, 우리나라의 팔도와, 일본의 60주(州)의 지리에 이르기까지 멀고 가까운 곳, 크고 작은 곳을 모두 기재해 빠뜨린데가 없었다. 이른바 구라파국은 서역에서 가장 동떨어진 먼 곳에 있었는데, 그 거리가 중국에서 8만리나 되었다. 구라파는 오랫동안 중국과 통하지 않다가, 명나라 때에 이르러 비로소 두번 입공(入貢)했다.

구라파 땅의 경계는 남쪽은 지중해에 이르고, 북은 빙해(氷海)에 이르며, 동쪽은 대내하(大乃河)에 이르고, 서쪽은 대서양(大西洋)에 이른다. 지중해라는 바다는 그것이 바로 천지(天地)의 한가운데라고 해서 그렇게 이름붙인 것이라고 한다."

이수광이 영국에 대해 쓴 부분은 이렇다.

"영결리국(永結利國)은 육지에서 서쪽 끝으로 멀리 떨어진 바다에 있다. 낮이 굉장히 길고 밤은 짧아서 겨우 2경(更)이면 곧 날이 밝는다. 그들은 오직 보리가루를 먹으며, 가죽으로 된 갖옷을 입고, 배를 집으로 삼는다. 배는 4중(重)으로 만들어서 쇳조각으로 안팎을 둘러쌌으며, 배위에 수십개의 돛대를 세우고 선미(船尾)에 바람을 내는 기계를 설치했다. 그들은 쇠사슬 수백개를 꼬아 닻줄로 사용했다. 쇠사슬을 하나로 모아서 닻줄을 만들었기 때문에 풍랑을 만나도 파선되지 않는다."

서양 사람을 이렇게 묘사한 부분도 있다.

"그 사람을 보니 눈썹이 속눈썹과 통해 하나가 되었고, 수염은 염소 수염과 같았다. 그가 거느린 사람은 얼굴이 옻칠한 것처럼 검어서 형상이 더욱 추하고 괴상했다. 아마 해귀(海鬼)와 등류(等類)일 것이다. 언어가 통하지 않으므로 왜인의 통역을 통해 물으니, 자신들의 나라는 바다 한 가운데에 있는데, 중국에서 8만리나 떨어진 곳이라고 했다. 왜인들은 그곳에 진기한 보물이 많기 때문에 왕래하면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일본 본토를 떠난지 8년 만에 비로소 그 나라에 도착한다고 했다. 아마도 무척 떨어진 외딴 나라인 모양이다."

'곤여만국전도'는 1602년 마테오 리치가 명(明)의 학자 이지조(李之藻)와 함께 만들어서 목판으로 찍어 펴낸, 6폭의 커다란 타원형 세계지도다. 이지조는 마테오 리치를 도와 많은 서양 과학기술서를 중국어로 번역한 사람이다.

이 지도는 그 당시 유럽에서 유행했던 아피아누스도법(Apian projection)을 따르고 있다. 그것은 오르텔리우스(Ortelius)의 1570년판 지도첩(帖)과, 메르카토르(Mercator)의 1595년판 지도첩들과 플란시우스(Plancius)의 1592년판 세계지도를 참고해 제작되었다고 한다. 이를테면 16세기 말 유럽의 최신 지도학의 성과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보통 유럽의 세계지도에서는 중앙부에 그리는 일이 없는 중국대륙을 굳이 중앙부에 놓은 것이 이 지도가 갖는 색다른 착상이다. 중화사상에 젖은 중국인에게 수용될 수 있는 세계지도를 만들려는 노력의 흔적이 보인다. 또 중국과 조선 및 일본 등은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서 얻은 자료를 사용했기 때문에 서양에서 만든 세계지도보다 훨씬 정확하다.

조선에서 새로 그려지기도

이 지도의 중요한 내용을 간결하게 요약해 보자. 여기에는 한자로 구라파(歐羅巴, 유럽) 리미아(利未亞, 아프리카) 남북아묵리가(南北亞墨利加, 남북 아메리카) 묵와랍니가(墨瓦蠟泥加, 메가라니카) 등의 5대주가 나타나 있다. 한자로 된 음을 우리 발음으로 읽으면 유럽이 구라파가 되고 아메리카가 아묵리가가 되지만 중국 발음으로 읽으면 원음에 훨씬 가깝다. 또 재미있는 것은, 신대륙과 프톨레마이오스지도 이래로 지도상에 표시했던 미지의 남방대륙(메가라니카라는 이름을 가진)이 나타나 있는 것이다. 메가라니카에는 이상한 동물들이 그려져 있어 그곳이 환상의 땅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8백50곳이 넘는 지명(地名)이 나타나 있고 또 각지의 민족과 물산(物産)에 대한 지지적(地誌的) 기술이 소개돼 있다. 또 타원형의 세계지도 바깥쪽에는 극투영(極投影)의 방위도법(方位圖法)에 의한 남북의 2반구도(半球圖)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천체구조론에 의한 구중천설(九重川說), 일식과 월식의 그림, 천지의도(天地儀圖) 등이 그려져 있다.

1602년의 목판본 세계지도는 다시 1608년에 그림과 채색을 넣은 필사본(筆寫本)으로도 제작됐다. 이 지도의 바다에는 배와 묘한 고기들을 그렸고, 땅에는 이상스런 짐승을 그려넣었다. 아주 아름다운 채색을 써서 마치 훌륭한 회화(繪畵)를 보는 듯한 그림지도다.

1602년의 세계지도는 처음 제작된지 2년 뒤인 1604년에 그 증보판이 새로 나왔다. '양의현람도'(兩儀玄覽圖)라는 이름의 세계지도가 그것이다. 이 지도는 나오자 마자 곧 조선에 전래됐다. 선조 37년(1604년)에 들어왔다고 전해지는 세계지도가 '양의현람도'를 말하는 것이다. 그 뒤에도 몇폭의 마테오 리치 세계지도가 조선에 소개됐으나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은 숭실대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양의현람도' 뿐이다. 그 지도는 중국 본토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희귀한 유물이다.

확인되지 않은 정보에 따르면 북경에도 하나가 남아있다고 한다. 아무튼 숭실대 박물관 소장본은 보존상태가 아주 좋은 훌륭한 지도로 매우 귀중한 것이다.

마테오 리치의 1602년 세계지도는 조선에서도 그려졌다. 숙종 34년(1708년)에 관상감에서 제작한 곤여도(坤與圖) 병풍은 그 대표적인 것중의 하나다. 기록에 따르면 이때 관상감에서는 건상도(乾象圖) 즉 천문도를 함께 제작했다고 한다. 하늘의 그림과 땅의 그림을 짝 맞춰 만든 셈이다.

전관상감정(前觀象監正) 이국화(李國華) 유우창(柳遇昌)과 화가 김진여(金振汝)가 함께 그린 이 지도는 1608~1610년에 중국에서 그린 동물과 선박의 그림을 넣은 곤여만국전도와 같은 것이다.

이것은 1402년에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그린 이후 조선에서 정부관서가 제작한 두번째 공식적인 세계지도다. 아울러 조선정부가 서양의 세계지도를 토대로 그린 첫 세계지도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서양의 세계지도가 정부차원에서 수용된 것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 세계지도의 제작솜씨는 매우 훌륭했고 중국의 지도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작품이었다고 한다.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그 지도는 1951년까지 경기도 관주 봉선사(奉先寺)에 보존돼 있었다. 봉선사는 1951년의 화재로 소실됐는데, 이 지도도 그때 천문도와 함께 불타 없어진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최근에 천문도가 일본에서 발견됐다. 그렇다면 이 지도도 어디엔가 남아있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정부에서 공식적으로 그린 곤여만국전도는 또 하나가 있다. 지금 서울대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곤여만국전도가 그것이다. 세로 1백70㎝, 가로 5백33㎝의 8폭 병풍으로 만들어진 이 세계지도는 제 8폭에 이 지도의 성립과 제작경위 등을 알려주는 최석정(崔錫鼎)의 발문이 적혀있다.

혼천시계와도 인연을 맺어

김양선(金良善)씨는 숭실대 박물관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1961년에 마테오 리치의 세계지도와 그 조선본에 대해 긴 논문을 쓴 일이 있다. 그는 봉선사에 있었던 지도가 서울대의 지도보다 더 아름다웠다고 증언하고 있다. 김씨는 또 서울대의 지도가 봉선사의 지도보다 나중에 그려진 것으로 보고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서울대의 곤여만국전도는 1986년에 보물 849호로 지정됐다.

곤여만국전도는 1708년에 관상감에서 병풍으로 제작되기 전에 이미 지구의에 그려져 있었다. 1669년에 이민철과 송이영이 만든 혼천시계의 혼천의 부분에 연결시킨 지구의가 그것이다(과학동아 1989년 9월호 참조).

천문학 교수 이민철과 송이영은 혼천시계에 지구의를 가설했는데, 거기 그린 세계지도의 바탕 그림이 1602년의 마테오 리치세계지도였다. 지금 고려대 박물관에 보존돼 있는 송이영의 혼천시계에 들어있는 직경 8.9㎝의 지구의가 그 실증적인 유물이다. 이 지구의들은 비록 크기는 작고 혼천의에 연결된 것이긴 하지만, 동아시아에서 가장 정확한 지구의이면서 또한 최초로 제작된 것이다. 타원형의 평면에 그려진 세계지도를 정확한 위도와 경도의 선이 그어진 구(球)위에 완전히 옮겨 놓은 제도법은 매우 훌륭하다.

1602년의 마테오 리치 세계지도는 페르비스트(Ferdinand Verbiest, 중국명 南懷仁)에 의해 개정돼 1674년에 목판으로 간행됐다. 그것은 타원형으로 그렸던 마테오 리치의 지도를 두개의 원으로 분리, 동서(東西) 양반구도(兩半球圖)로 만든 것이다. 한국과 일본 중국을 포함하는 동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에 이르는 이른바 구대륙을 왼쪽 원에, 그리고 남북 아메리카의 신대륙을 오른편 원에 경위선과 함께 그려넣고 있다. 8폭으로 된 페르비스트의 세계지도는 곤여전도(坤與全圖)란 제호가 붙여졌는데 양쪽 끝의 한폭에는 지리적 사항이, 다른 한폭에는 천문학적 사항이 서술돼 있다.

페르비스트의 세계지도가 언제 조선에 들어왔는지에 관한 확실한 기록은 없다. 마테오 리치 세계지도의 충격은 이 개정판 세계지도에서는 되풀이되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지도보다 2년 전에 완성한 '곤여도설'(坤與圖說)이 1722년에 조선에 들어온 것으로 보아 같은 무렵에 전래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1602년의 세계지도가 출간되자마자 곧 전래된 것과 비교가 된다.

페르비스트의 세계지도는 1860년(철종 11년) 조선에서도 간행됐다. 그 목판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지금도 보존돼 있다. 그것은 1856년에 중국 광동(廣東)에서 중간(重刊)된 지도를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목판 제작솜씨는 중국판보다 더 당당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백72.3㎝x56.9㎝ 크기의 이 지도는 목판본으로는 조선에서 가장 큰 세계지도인데 채색을 넣어 무척 아름답다.

조선판 페르비스트 세계지도는 비교적 많이 인쇄돼 조선 선비들에게 보급, 그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조선판의 이 세계지도는 목판으로 인쇄된 그 당시의 세계지도 중에서 가장 크고 훌륭한 판본으로 세계지도 수집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 목판의 유물도 지금 서울대 박물관에 남아 있어, 조선시대 지도 판각(板刻) 기술의 높은 수준을 그대로 말해주는 귀중한 유물로 평가되고 있다.
 

곤여전도^1674년 페르비스트는 곤여만국지도를 개량, 곤여전도를 펴냈다. 타원형으로 그렸던 곤여만국전도를 두개의 원으로 분리, 동서양반구도로 바꾼 것이 이 지도의 특징. 구대륙은 왼쪽 원에 신대륙은 오른쪽 원에 경위선과 함께 그려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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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02월 과학동아 정보

  • 전상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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