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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공부 다시 출발점에 서서

계산문제의 답을 외워서야 중·고등학교 수학교육현장에서는 공식 위주의 학습이 이루어져 수학의 답은 하나뿐이라는 「미신」이 통하고 있다.

'${a}^{2}$-${b}^{2}$을 인수분해 하라'고 하면, 대부분의 중학생들은 대뜸 ${a}^{2}$-${b}^{2}$=(a+b)(a-b)이라고 대답할 수가 있다. 왜 그렇게 되느냐고 물으면,

${a}^{2}$-${b}^{2}$=${a}^{2}$+ab-ab-${b}^{2}$
=a(a+b)-b(a+b)
=(a+b)(a-b)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할 줄 아는 '수학적 머리가 있는' 학생도 꽤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해를 구하는 학생은 몇이나 될까.

a를 변수로 생각하고 2차방정식 ${a}^{2}$-${b}^{2}$=0을 풀면, a=±b. 따라서 a-b와 a+b가 인수다.
∴${a}^{2}$-${b}^{2}$=(a+b)(a-b)

등차급수의 합의 공식 1+2+3+…+(n-1)+n=n(n+1)/2을 잊어먹은 고등학생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답을 구하는 과정에 대해서도 중간 수준 이상의 학생들은 거의가 알고 있을 것이다.

1+2+3+…(n-1)+n+{n+(n-1)+(n-2)+…2+1}
=n+1+n+1+n+1…n+1+n+1=n(n+1)
∴1+2+3+…+n(n+1)/2

이것은 가우스라는 유명한 수학자가 국민학교에 다니는 어린 시절에, 1부터 10까지 더해보라는 선생님의 숙제를 단번에 푼 유명한 방법이다. 그러나 어린 꼬마가 어떻게 이러한 풀이를 생각했을까. 이것까지 곰곰히 따지려 드는 학생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그런 시간이 있으면 문제 하나라도 더 풀겠지).

만일 그런 한가한(?) 시간이 있는 학생이라면, 나도 한번 멋있는 방법을 생각해봐야 겠다고 다짐했을 것이고, 그 결과 그럴듯한 방법을 생각해낼 수도 있다.

도형의 이미지를 살린 풀이의 예

큰 3각형의 면적은 10x10÷2=50. 빗금이 있는 작은 삼각형은 1/2이고, 갯수는 10개, 따라서 그 면적은 1/2x10=5
그러므로 전체의 넓이는 50+5=55
 

도형의 면적구하기


가우스가 그런 멋진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천재였기 때문이라기 보다 수학문제를 푸는 요령을 터득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아울러 수학이란 그저 열심히 교과서나 참고서와 씨름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요령있게 해를 구하는 것, 더 나아가서 그렇게 하는 일에 맛과 멋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터득하게 되면 이 학생의 앞날은 그야말로 양양하다.

공식대로 풀기만을 강요당해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지금의 중고등학생들은 이런 체험을 전혀 갖지 못하도록 길들여져 있는 것 같다. 한국인들이 특히 수학적 사고에 뒤처진다는 얘기는 아니다. 본래의 수학적 사고능력은 오히려 다른 민족보다 앞설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 '공식대로' 문제를 풀도록 강요당하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은 성적을 얻는데 유리하기 때문에 학생 스스로 쓸데없는 잡념(?)을 아예 막아버리고 있는 것이다.

수학교육의 현장에서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교사가 학생들에게 해답을 가르치면 학생들이 곧이곧대로 그것을 외워 담는 태도다. 정해(正解)는 많이 있는데도 그 중의 어느 하나만을 알면 그것만을 고집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자세는 대학까지 이어져서 수학 강의시간에도 교수가 칠판에 판서하자 마자 학생들은 일제히 노트를 하기 시작한다. 이런 사람들은 '피타고라스 정리'의 해(증명)가 1백개를 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도 2천년 이상이나 되는 오랜 세월에 걸쳐서 말이다(뭐, 할일이 없었던 모양이지 하면서).

'보다 좋은 선택', 이것이 주어진 문제에 대한 유일한 '답'인 것이다. '유일한 정답을 찾는다'는 자세는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다. 하나의 해답이 구해지면, 다른 해(別解)는 없을까, 더 멋있는 방법이 없는가 하고 계속 생각하는 것이 수학하는 자세인 것이다.

그러나 학교에서의 수학교육의 현실은 이것과는 반대방향의 마음가짐만을 갖도록 요구하고 있다. 오직 입시의 난관을 돌파하기 위해서라는 명분 아래. 이 점에 대해서는 교사도 학부모도, 아니 학생 자신도 인정하고 있다.

얼마전 국민학교에 '집합'을 중심으로 한 '새수학' 바람이 불어, 이 때문에 엄청난 시행착오를 겪었던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 '새수학'을 일선교사에게 이해시키느라고 문교부는 막대한 재정과 시간을 들여 강습회 등을 여는 등 야단법석을 떨었지만 결과는 참담한 것이 되고 말았다.

그 이유는 한마디로 '집합'이라는 턱없이 높은 고급의 수학개념을 어린이들에게 심어 주려는 시도 자체가 무리였기 때문이다. 이것을 지도해야할 교사 자신의 수학적 소양에도 문제가 있었다. 더 솔직히 말한다면 바로 교사가 이 '새수학'의 걸림돌이 된 것이다.

말할 나위도 없지만 고등학교까지의 수업은 지식자체를 직접 전달하는 직접교육이 아니라, 교사라는 인격체를 통한 간접교육이다. 교사가 가르칠 지식을 충분히 소화하고 있으면 아무리 어려운 내용이라도 학생들에게 이해시킬 수 있다는 것이 심리학자들의 주장이다. 바꿔 말하면, 교사가 이해 못하고 있는 내용을 학생들이 이해하리라고 기대한다는 것은 난센스라는 이야기다. '새수학' 재교육을 받던 교사들이 뜻도 모르고 새로운 수학용어며 정의를 무턱대고 외우느라고 밤잠을 안자고 쩔쩔매는 모습은 차라리 희극이었다. 하지만 이들 교사의 지시에 따라 '집합'을 외우는 고통을 겪어야 할 학생들의 처지는 비극적이다.

본래 '철학'을 뜻하는 그리스 원어는 '앎(知)의 사랑(기쁨)'이라는 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학생들에게 덮어놓고 외우게하는 우리의 교육현장은 기쁨은 커녕 고통을 안겨주고 있는 셈이다. 언젠가 중학교 입시 문제를 교과서 중심으로 출제한다는 문교부의 방침 때문에 학생들이 계산문제의 답을 외우는 웃지못할 난센스가 빚어진 적이 있었다. 학생들이 '응, 알았다'하고 힘있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자주 보기 위해 노력하는 교사가 얼마나 있을까 의심스럽다.

우리나라 못지 않게, 아니 어쩌면 더 심각한 대학입시 지옥을 겪는 나라는 이웃 일본이다. 교과서가 거의 획일화돼 있다는 점도 일본은 우리와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일본 수학교사들의 자세는 한국과는 판이하다.

필자가 몇해 전 일본에 체류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여름 겨울방학 기간에 실시되는 중고등학교 수학교사를 위한 강습회의 목적과 내용이 우리와는 너무도 동떨어진 것을 알고 놀란 적이 있다. 강습회의 목적은 자격이나 호봉에 반영되는 등의 어떤 현실적인 이익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고, 순전히 교사 자신의 수학적 소양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여비도 강습비도 각자가 부담하는 게 원칙이었다. 그러니 그야말로 자발적인 강습회가 될 수 있었다. 이 강습의 교육내용은 현장의 수학교육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각 강사가 자신의 재량대로 교재를 선택하고 있었다. 수학교사라면 이쯤의 수학상식을 가져야 한다는 판단 아래.

더욱 놀란 것은 내일 모레면 정년이 되는 노교사가 "낡아 빠진 머리나마 새롭게 기름칠을 해야겠다"는 새삼스러운 각오로 수백킬로 떨어진 먼 곳까지 찾아와서 구차한 자취방 생활을 하면서 열심히 강의를 듣는 모습이었다.

6공이 들어서면서 우리나라 중고등학교 교사들의 부담도 크게 덜어진 것이 사실이다. 잘 모르긴 하지만 교사들의 주당 평균 수업시간수가 18시간이라는 말도 들었다. 이 정도면 적어도 개인연구까지를 포함한 시간부담만으로 따진다면 대학교수에 비해 그야말로 '놀고 먹기'다(대학교수는 주당 12시간이 보통이지만, 전공이 세과목 이상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러면서도 수학교사끼리의 연구협의체가 있다는 말을 아직 들어본 적이 없다. 연구수업 등 실무적인 협의나 연수말고는 말이다.

'가르치는' 것은 '배우는' 것이다. 교사는 누구나 자신의 의도가 학생에게 전달되었는지 어쩐지를 나름대로 판단하는 기준을 가지고 있다. 이 판단기준은 학생 뿐만 아니라 교사도 함께 '알았다!'는 공감대가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 순간 교사도 학생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방금 전에 이야기한 일본의 노수학교사가 자비를 들여가면서 강습장에 출석한 이유도 그런 '공감'을 얻겠다는 절실한 소망이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대입제도의 개혁의 선행조건

한국은 통일신라시대 이후 조선조 말까지의 1천3백년동안 줄곧 수학을 담당하는 계산기술자 양성제도를 세계에서 유일하게 유지해 왔다. 그 긴 세월동안 계산술만을 일삼아 오다가 이제 겨우 증명 중심의 수학과 접목된 것이 오늘의 한국수학이다. 그러나 이 접목이 과연 성공적이었는지는 극히 의심스럽다.

수학은 다른 학문과 마찬가지로 인간사고의 산물인데, 사고는 하루 아침에 뒤바뀔 수 없으며 오랜 세월에 걸쳐서 서서히 다져지면서 변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사고는 옛부터 가꾸어온 전통의 산물이며, 따라서 수학도 전통을 저버릴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수학'이란 교과서 등을 통해서 받아들인 구체적인 수학지식이 아니라, 훨씬 넓은 뜻의 '수학', 이를테면 수학적 사고같은 것을 가리키고 있지만.

한국 사람들은 수학(셈?)을 잘 한다고 한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그렇게도 잘했던 수학을 졸업과 동시에 팽개치고 돌아보지도 않으며, 애써 익혔던 증명도 그 의의조차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만다. 물론 증명의 바탕이 되는 대화의 정신은 가꾸어지지 않은 채 말이다. 말하자면 수학은 학교에서만, 그것도 '마지 못해' 배우는 것이라는 인식이 일반사람의 마음에 뿌리깊게 심어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기에 한국인에게 수학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더 나아가 한국에서는 수학이라는 문화가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는지를 누구보다도 일선의 수학교사들이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만일 이 숙고없이 제도만 바꾼다면 또다시 아무도 책임지지 않은 채, 제도 '개악'이 일어날 것은 뻔하다. 그리고 그때마다 애잔은 학생들만 골탕먹고. 정말 그래도 좋은 것일까. 이 악순환에 대해서 교사들은 팔짱만 끼고 있어도 정말 되는 것일까.

1991년 02월 과학동아 정보

  • 김용국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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