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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데스산맥을 끼고 발달한 잉카문명의 백미는 도로망과 교통조직 그리고 관개시설이다.

1492년 콜룸부스의 활약으로 스페인은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하게 된다. 그후 1830년대까지 약 3백50년 동안 방대한 현대의 중남미를 지배한다.

수많은 부족들의 다신교문화(주로 태양신 숭배)를 기독교문화로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스페인 사람들이 신대륙을 발견하고 정복할 당시, 그곳에는 실로 다양한 문화가 발달하고 있었다. 그들 문화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은 멕시코와 과테말라에서 발달했던 마야문화 그리고 페루와 볼리비아를 무대로 펼쳐진 잉카문화였다.
 

파삭(Pisac)^쿠스코에서 37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요새. 잉카족들은 자연석(石)을 실어다 연마한 뒤 정교하게 이어 맞추어 요새를 지었다. 그들의 건축술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안데스산맥을 중심으로

잉카문화가 맹위를 떨치기 전에도 차빈모치카 나스카 티아우아나쿠문명 등이 남미대륙에서 명멸했다. 이들은 잉카문명의 모태가 되었기 때문에 총칭해서 잉카이전문명이라고 한다.

남미 특히 안데스산맥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이들 고대문명은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를 많이 간직하고 있다. 후기잉카문명에 이를 때까지 문자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고학자들의 활동으로 그 문화적 유산을 찾아내는 일 외에 그 역사나 생활양식 등을 알아내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상태다. 실제로 잉카제국에 관한 기록은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다. 대개가 정복자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남겨진 기록들이다. 주로 잉카제국의 유지와 주민들 뿐인데, 귀동냥한 당시의 생활상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1400년대 이후의 사실(史實)은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돼 있다.
현재까지 전해진 기록과 고고학적 자료에 따르면 잉카부족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시기는 A.D.1000년 전후라고 한다. 그후 1200년 경에 제국의 기초를 확고히 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황금지팡이를 던진 곳에서

잉카제국의 기원을 둘러싼 전설은 수없이 많다. 그중 한가지를 보면 잉카족의 조상 망코 카팍(Manco Capac)과 그의 여자형제들은 현재 볼리비아와 페루사이에 위치한 티티카카(Titicaca,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은 호수로 꼽히고 있다) 호수의 태양섬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곳에서 태양신에 의해 최초의 인간으로 창조됐다는 것이다. 그들은 태양신의 명령을 받아 북방으로 이동했는데 쿠스코(잉카제국의 수도)계곡에 이르러서는 들고 다니던 황금지팡이를 던졌다고 한다. 망코 카팍일행은 지팡이를 던진 곳에 도읍을 정하고 그곳 주민들에게 농업과 직물을 가르치면서 나라를 일으켰다.

망코 카팍은 누이동생과 결혼해 2대황제를 낳았다. 대대로 왕족의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남매간에 결혼하는 관습이 전해지고 있었으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신화속의 인물인 망코 카팍 이후 13인의 황제가 즉위했다. 9대 잉카 파차쿠티(Inca Pachacuti) 황제에 이르러 잉카제국은 전성기를 맞는다. 멕시코 등지에서 발전했던 부족국가들을 왕족이라고 부른데 반해 잉카만은 제국이었다. 그 이유는 당시 모든 국가와 사회조직 등이 유럽의 제국과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차쿠티황제는 잉카제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위업을 이룩한 황제로 알려져 있다. 그는 주변국들과의 전쟁으로 황폐해진 수도 쿠스코를 훌륭히 재건했고 망코 카팍이 최초로 궁전을 세웠던 장소에 태양신전을 건립했다. 그곳에 선왕들의 미이라를 안치했다고 한다. 또 도시를 확장하기 위해 쿠스코중심부에 사는 농민들을 외곽으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각종 토목공사를 실시, 수도의 변모를 일신했다.
 

거대한 돌 도시인 마추픽추에 오르는 길이 지그재그 형식으로 보인다. 마이크로 버스를 타고 이 길을 30분 올라가야 마추픽추가 나온다.


80여년 걸려 건축한 삭사우아만요새

파차쿠티황제는 잉카제국 건립 후 처음으로 사방 30㎞ 이상 국토를 확장했다. 나중에는 영토를 약 1천배까지 넓힌 대단한 정복자였다. 파차쿠티의 재임시 잉카는 치무(Chimú)와 나스카(Nazca)국을 정복하고 키토(Quito)를 점령, 지금의 에쿠아도르(Ecuador)까지 잉카제국의 판도를 확장시켰다. 그는 1438년부터 1471년까지 재임하고 아들인 토파 잉카(Topa Inca)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된다.

10대왕인 토파 잉카는 1471년부터 1493년까지 왕위에 머물게 된다. 그는 잉카의 역대왕들 중에서 가장 용맹스러운 황제였는데 황태자시절부터 대군을 이끌고 수많은 전쟁을 치렀다. 에쿠아도르를 점령한 것도 사실상 토파 잉카의 공이었다. 즉위후 지금의 볼리비아 일대와 칠레 북방부를 포함한 안데스산맥지대 대부분을 정복했다. 뿐만 아니라 쿠스코의 방어를 위해 삭사우아만(Sacsahuaman)요새를 완성하기도 했다. 잉카의 건조물중 가장 훌륭한 것으로 평가되는 이 요새는 총 공사기간이 80여년이나 걸렸다.

계속해서 우아이나 카팍(Huayna Capac) 우아스카르(Huáscar) 아타우알파(Atahualpa)가 왕위를 계승했다. 제국의 판도가 최대치에 달했을 때의 면적은 약 1백만㎢였다. 남북간의 거리는 4천㎞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타우알파왕은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cisco Pizarro)가 이끄는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해 최후를 맞는다. 툼베스(Tumbes)항구에 상륙한 피사로의 군대는 카하마르카(Cajamarca)에서 잉카의 황제를 체포한다. 1553년 8월 29일 잉카의 마지막 황제 아타우알파가 처형됨으로써 마침내 잉카제국은 역사의 뒷전으로 사라지게 된다.

페루의 국민주로 이어져

잉카족은 농업 목축업 수렵 어업 가축업 가내공업 도자기업 금속가공업 등에 주로 종사했다. 특기할만한 것으로는 농기구의 발달과 훌륭한 관개시설을 들수 있다. 특수농작물로는 옥수수 감자 후추 고추 과일 담배 면화 코카 등을 꼽을 수 있다. 목축 및 가축동물로는 야마 알파카 개 꾸이(원주민들이 즐겨먹는 토끼모양의 작은 동물) 양 거위 오리 등을 길렀다.

식생활수준도 대단히 높은 편이었다. 특히 옥수수로 만든 탁주는 그 시대의 대표적인 알코올음료로 각광을 받았다. 요즘도 이 술은 페루전체의 국민주로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술은 옥수수를 씹어서 옹기에 넣은 뒤 발효시켜서 만들었다. 농부들은 아침에 일어나기 전에 이 술을 한잔 마시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마치 우리나라의 해장술과 비슷하다.

잉카사람들은 옥수수를 고추가루와 향내나는 풀과 함께 쪄서 식탁에 올렸다. 또 옥수수가루로 스프(죽)를 만들고 빵을 제조해 먹었다. 빵은 뜨거운 잿더미 속에서 구웠다. 또 감자를 냉동시킨 다음 말려서 저장하기도 했다. 야마고기를 태양볕으로 말려 저장하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최고급 음식은 말린 감자와 말린 야마고기를 함께 넣어서 만든 스프였다.

접착제없이 건물을 세워

잉카제국은 수도인 쿠스코를 포함하는 모든 도시의 건설에 일정한 원칙을 했다. 절대 도시를 마구잡이식으로 건설하지 않고 계획성있게 세워 나갔다. 모든 도시는 중앙광장을 둘러싸고 궁전, 태양의 신전, 수녀원(태양의 처녀를 위한 승려원), 식량창고 등의 건물이 서도록 설계됐다. 도시의 뒷면에 있는 산에는 방벽을 쌓아 요새로 활용했다.

건축자재로는 돌과 햇볕에 말린 진흙벽돌을 사용했다. 특히 큰 석조건축물을 지을때는 돌과 돌 사이를 밀착시켜 정교하게 쌓아올렸다. 접착제를 일체 사용하지 않았으나 일말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어찌나 정교하고 튼튼했던지 스페인 정복자들이 바로 그 건물위에 새 건물을 지을 정도였다.

잉카의 대표적인 석조건물은 쿠스코의 코리칸차(Coricancha)다. 일명 황금의 울타리 또는 태양의 신전이라 일컬어지는 건물이다. 그리고 쿠스코시에서 기차로 약 4시간을 달려가면 마추 픽추(Machu-Picchu)라는 요새와 같은 산상도시가 나온다. 이곳의 모든 민가와 공공건축물은 석조로 돼 있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높은 지역에 위치한 이 도시의 사람들은 오랫동안 농사를 지으면서 자급자족을 해 왔다. 농토는 대개 계단식이었다. 그토록 높은 지역까지 어떻게 그 거대한 돌을 운반해 건물을 지었을까.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키푸스를 이용해 기록 남겨

잉카문명중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아마도 도로망과 교통조직일 것이다. 도로망은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고원도로다. 놀랍게도 그들은 지금의 콜롬비아 남부에서 칠레에 이르는 5천6백㎞짜리 도로를 닦았다. 다른 하나는 해안도로다. 북쪽의 툼베스 항구에서 출발, 페루의 전(全)해안을 통과한뒤 칠레에 도착하는 총연장 4천㎞의 도로가 잉카인들의 힘으로 건설된 것이다.

또한 안데스고원지대의 문명은 관개기술의 발달로 이룩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특히 잉카제국의 관개기술은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그들은 산의 능선과 등고선을 이용, 높은 지대까지 급수가 가능하게 했다. 개중에는 총연장이 수백㎞에 달하는 것도 있었다.

잉카인들이 이룩한 도로행정기술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를 감탄하게 하고 있다. 공용도로에는 빠짐없이 숙박장을 건설했고, 도로의 정확한 거리를 측정했다. 연락수단으로 연락병을 활용했는데 이들은 특수주법 훈련을 받아 군사 및 중요통신의 전달을 도맡았다.

그들은 문자가 없었으나 대신 키푸스(Quipus)를 이용, 숫자 역사적 사실 연대법률 등을 기록했다.

스페인이 신대륙을 발견할 당시 현재의 북미대륙에는 이렇다 할 문화가 발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세계 3대문명이라고 일컬어지는 마야문명이 멕시코와 과테말라 지역에서 꽃을 피우고 있었다. 또 안데스산맥문화인 잉카문명이 현재의 페루와 볼리비아에서 그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불가사의한 잉카문명의 유적들을 되돌아보면서 필자는 잉카사람들의 지혜에 깊은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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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우덕룡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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