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대 컴퓨터 개발계획은 일본이 컴퓨터분야의 기술대국으로 도약하는 디딤돌이 됐지만 5세대컴퓨터 자체를 개발하는데는 실패했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일본 신세대컴퓨터기술개발기구(ICOT)는 최근 인간과 비슷한 사고능력을 지닌 '제5세대 컴퓨터'의 신제품을 개발 하는데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이 시스템은 지식을 토대로 문제를 해결하는 인공지능(AI)컴퓨터 32대를 병렬접속해 기존 AI컴퓨터보다 처리속도를 10배이상 향상시 킨 것이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특히 대규모집적회로(LSI)의 배선 설계를 비롯, 모의실험(시뮬레이션) 바둑대국 법률판단 등의 용도로 개발된 것이어서 제5세대 컴퓨터의 본격적인 응용이라는데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반도체분야의 기술우위를 발판으로 인공지능 슈퍼컴퓨터 등에서도 미국을 바싹 추격하고 있는 일본은 이번 5세대 컴퓨터의 성공을 계기로 '차세대컴퓨터 개발의 선두주자'자리를 놓고 미국과 더욱 치열한 경합을 벌일 전망이다.
일본이 80년대 내내 '타도 미국'의 기치를 걸고 혼신의 힘을 쏟은 제5세대 컴퓨터개발계획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두뇌에 접근한다
지난 82년에 시작된 제5세대컴퓨터개발 계획은 단지 제5세대컴퓨터라는 특정 상품을 개발하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 일본의 컴퓨터기술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려놓기 위한 거대 프로젝트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컴퓨터의 역사는 1945년 등장한 최초의 컴퓨터 에니악과 같은 진공관식을 제1세대로 출발했다. 그후 1950년대 후반 트랜지스터가 진공관을 대신하면서 제너럴일렉트릭 등에서 제2세대 컴퓨터들을 내놓았다.
1964년 IBM은 집적회로(1C)를 사용해 한 장의 기판위에 트랜지스터 저항 컨덴서 등을 집약시킨 IBM360 시스템을 개발,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로써 컴퓨터분야에서 IBM은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독보적인 위치를 굳혔고 컴퓨터의 소형 경량화는 더욱 가속화된다. 집적회로를 이용한 컴퓨터를 제3세대로 불렀다.
일단 집적회로가 컴퓨터에 이용되기 시작하자 그 집적도는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이미 70년대에 1천~10만 게이트(gate) 정도의 대규모집적회로(LSI)가 등장했고 80년대들어 10만소자가 넘는 초대 규모집적회로(VLSI) 극초대규모집 적회로(ULSI)가 잇따라 출현했다. 이러한 소자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에 힘입어 70년대말 퍼스널 컴퓨터가 등장, 컴퓨터대중화 시대를 열었고 이 시기를 통틀어 제4세대 컴퓨터라고 부른다.
80년대 들어 컴퓨터과학자들은 IC의 집적도를 높여 컴퓨터 고속화 경량화하는 것과 병행해 '컴퓨터가 인간과 비슷한 사고능력을 가질 수는 없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컴퓨터는 순차적으로 명령을 수행하는 폰노이만방식을 택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두뇌구조는 수십 만개의 뇌세포들이 동시에 병렬적으로 사고하는 분산처리방식을 갖고 있다. 컴퓨터의 구조를 이러한 인간의 사고패턴에 접근시킬 수는 없을까. 이러한 노력의 결과 '생각하는 컴퓨터'라고 불리는 '제5세대 컴퓨터' 개발계획이 시작 된 것이다.
「모방 왕국」을 벗어나려고
일본은 90년대에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컴퓨터는 산업 경제 문화 예술 교육 등에 널리 쓰일 수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정보처리시스템은 국가간의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고 일본의 자원부족과 노령화 등의 사회문제를 일거에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 됐다.
당시 일본은 경제적으로는 강국의 지위에 올랐지만 기술적으로는 선진국을 모방하고 따라가는 시대였다.
일본은 기술의 모방에서 벗어나 기술의 선두주자가 되기 위해 세계적인 연구개발과제를 추진하기로 결심했다. 제5세대 컴퓨터개발계획의 추진으로 일본은 이 분야에서 뿐만아니라 다른분야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칠 것으로 판단했다.
그리고 일본내에서도 이러한 큰 연구개발계획을 추진함으로써 첨단연구개발에 자극제가 되리라고 믿었다.
일본정부는 1966년부터 정보기술 분야의 대규모국책 과제를 추진해 왔다.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제5세대컴퓨터개발 계획은 여덟번 째로 추진한 국책과제로서 컴퓨터 기술의 혁명을 목표로 하고 있다.
초기에 정립한 개발목표는 혁신적인 이론과 기술을 이용해 지식정보처리를 잘하는 컴퓨터를 개발함으로써 기존의 컴퓨터가 가지고 있는 기술적인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제5세대 컴퓨터의 주요 기능은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에 대한 기술과 요구사항 이해 기능 △문제해결절차를 종합처리하는 기능 △머신시스템(machine system)과 프로세싱 절차 사이의 최적화기능 △머신시스템의 결과를 기반으로 회답을 종합하는 기능 △말과 그림, 화상 등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용자인터페이스 기능 등이다. 중요한 점은 목표를 세울때 기존의 컴퓨터에서 진보된 어떤 컴퓨터를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컴퓨터를 개발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목표자체가 어쩌면 달성하기 불가능한 것이었지만 일단 이 계획이 발표되자 전세계인이 부러움을 샀고 관심의 초점이 됐다. 이것은 일본을 기술적인 선진국으로 선전하기 위한 중요한 캐치프레이즈가 되었던 것 같다.
프롤로그를 기반언어로
이 계획을 시작할 당시 ICOT가 통산성과 8개의 전자회사를 지원하기 위해 조직 되었다. 초기에 회사에서 파견된 40여명의 연구원이 학교 및 연구기관의 도움으로 다음 세 분야의 연구를 수행할 수 있도록 조직되었다.
△문제해결 및 추론기계(problem-solving and inference machines)
△지식베이스 관리시스템(know-ledge base management system)
△지능적인 사용자 인터페이스(intelligent man-machine interface)
5세대 컴퓨터 개발계획은 크게 다음과 같이 3단계로 나누어 진행되고 있다.
△초기단계(1982~1984) : 컴퓨터 기본기술 개발단계
△중기단계(1985~1988) : 소규모지원시스템의 실험시제품 개발단계
△최종단계(1989~1991) : 단일시스템 실험시제품 개발단계.
중간 연구결과를 보면 초기단계에 5세대컴퓨터개발에 필요한 기본 기술을 개발했다. 주요한 내용은 추론지원시스템과 지식베이스 관리시스템 등의 기본기능을 정의하고 시뮬레이션을 통하여 검증했다. 그리고 기본소프트웨어는 커널언어(kernel language)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고 문제해결법 및 지식표현 방식해 대해 연구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결과로서 소프트웨어(SIMPOS)와 하드웨어(PSZ/CHZ) 등에 대한 모델을 제시했다. 중간단계에서 중요한 연구결과를 살펴 보면 병렬추론기계에 대한 연구성과이다. 주로 프롤로그를 기반언어로 하여 병렬화하는 기술을 연구했다.
중간단계는 세분야로 나누어 주로 병렬추론기계(parallel inference machine)를 개발했다.
최종단계는 기가(giga) LIPS급 병렬추론기계를 개발하는 것이 목표다.
기술선진국의 발판구축
제5세대 컴퓨터개발 계획이 최종 단계에 들어선 지금, 이 계획이 성공이냐 실패냐 하는 점이 일본내에서도 큰 논란이 되고 있다. 단적으로 얘기하면 원래 목표가 분명치 않았으나 초기에 의도했던 일본의 컴퓨터기술 선진국진입이라는 목표는 완벽히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5세대 컴퓨터 자체를 개발하는데는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이 계획이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는 요인들은 다음과 같다.
현재 일본이 컴퓨터 관련 산업에서 선진국으로 됐다는 점은 자타가 공인하고 있다. 특히 이 계획의 여파로 미국의 MCC, 영국의 앨비(Alvey) 구주공동체의 에스프리(ESPRIT) 등과 같은 프로젝트가 시작되어 세계 컴퓨터 관련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특히 이 역할을 일본이 했다는 점이 중요한 성공요인으로 꼽힌다.
이 계획을 통해 일본은 기술을 모방하는 니라라는 이미지를 탈피 했다. 초기에만 해도 컴퓨터 프로세서와 소프트웨어를 주로 미국에서 모방해 사용한다는 시비가 있었으나 현재는 프로세서기술이나 메모리칩 등과 같은 반도체 및 하드웨어 기술은 오히려 미국을 능가하게 되었고 소프트웨어 기술도 곧 대등한 관계로 발전해 가는 상황이다.
한편 이 계획의 목표는 90년대 컴퓨터 관련 새로운 기술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 측면에서만 본다면 병렬처리기술이나 자연어번역, 프로세서 설계기술 등 중요한 기술을 이미 확보한 셈이다. 물론 지능적인 사용자인터페이스 분야는 기대만큼 달성하지 못했지만 지식정보관련 기술은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이러한 기술들이 각 업체로 파급되어 업체가 기술 주도 장기프로젝트에 투자하는 환경을 조성하였다.
응용분야가 너무 제한적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은 대부분 ICOT의 목표보다 외부의 5세대컴퓨터에 대한 기대가 컸기 때문이었다. ICOT의 주장은 현재 목표대로 잘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단지 변화된 것은 외부의 환경이 변하여 80년대 초기에는 이 계획이 유일하게 대규모 프로그램이었으나 지금은 이와 비슷한 규모의 프로그램이 여러개 수행되고 있기 때문에 비교적 진행이 잘 안되고 있는것 처럼 비쳐질 뿐이라는 것이다.
부정적인 견해의 대부분은 제5세대 컴퓨터 자체가 개발되지 않았다는 기술적인 시각에서 출발한다.
기술적으로 새로운 개념의 컴퓨터는 응용분야에서 요구를 받아 개념이 정립되고 구현되어야 하는데 이 계획은 기본 언어를 프롤로그계열로 정의하고 그것을 위한 하드웨어개발에만 치중 했다는 비판이다. 극단적으로 이 계획에서 개발된 소프트웨어는 아무것도 없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실제 응용분야가 사회적인 요구를 만족시키기에는 너무나 제한적이었다. 그래서 프롤로그를 잘 수행시킬 수 있는 병렬처리시스템이 개발된다고 하더라도 해결할 수 있는 응용분야가 너무나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80년대초에 너무 큰 목표를 설정 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단적으로 응용분야의 자연어번역만 하더라도 이와 맞먹는 큰 사업규모라는 점이다. 이것은 10년이내에 달성하기 힘든 인간적인 특징을 컴퓨터에 구현할려고 목표했다가 제6세대로 밀려난 점에서도 분명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방대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추론지원시스템이나 지식베이스관리시스템 등과 같이 여러개의 자원시스템으로 분리 추진하여 각각은 성공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궁극적인 목표인 단일시스템으로 통합하기는 불가능 하다는 비판이다.
원래 목표로 했던 기술수준이 혁신적인것이 아니라 현재 존재하는 기술의 연장이라는 비판도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 현재 개발된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 제품중 어느것도 혁신적이라고 할만한 것은 없다는 비판이다. 그리고 병렬 처리기술이나 자연어처리기술을 확보했지만 그것은 성능이 매우 낮다는 지적이다.
세계인의 관심을 집중시켰던 제5세대 컴퓨터 개발계획은 이제 최종단계에 들어섰다. 그동안 추진 배경에서 내세운 사회적, 국가적인 요구는 성공적으로 이미 달성되었다고 본다. 이제는 실제 5세대컴퓨터의 실체를 보여주는 작업만 남아 있다. 기술적인 논쟁은 차치하고 이미 제5세대 컴퓨터는 실험실을 떠나서 산업계에 여러가지 형태로 구현되고 있다. 어쩌면 지금에와서 제5세대컴퓨터 개발계획에 신경쓰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이 계획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연구 개발 과제로서 마무리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계획의 자손들이 다시 태어나서 시그마(SIGMA)프로젝트, 트론(TRON)프로젝트, 자연어 처리를 위한 ATR, 미국의 '생각하는 기계'(Thinking Machine) 등과 같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초기에 구상됐던 5세대 컴퓨터의 모양과는 다를지 모르지만 조만간에 5세대 컴퓨터가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 밖에 없다고 보여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