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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증의 정신분석

「크리미날 로」의 진단서

한 편집증 환자를 통해 인간의 본능, 성장과정에서의 동일시, 강간 살인심리를 엿본다.

자신만만한 변호사인 주인공과 변호를 의뢰한 살인범과의 관계를 주제로 다룬 '크리미날 로'(criminal law, 형법)란 제목의 영화가 현재 상영중이다. 관객들은 대개 주인공 변호사의 법과 정의간의 갈등을 제일 먼저 생각하게 하는 영화라고 평하겠지만 살인범의 심리를 파악한다는 관점에서 살인범 중심으로 다시 이 영화를 재조명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는 일이다.
 
범인은 변호사와 그 애인을 살해하려하고, 변호사는 자신이 풀어준 범인의 정체를 알고 그 증거를 잡으려고 …

승리감에 도취하지만…

편의상 그 영화의 줄거리를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밤에 미국의 한 도시에서 아기 기저귀를 입에 물린 채 젊은 여자를 강간 살인한 사건이 발생한다. 이 광경을 본 목격자가 범인을 지목하지만 주인공인 변호사의 집요한 공격적 질문으로 목격자는 횡설수설하게 되고, 결국 연쇄살인 범인은 변호사의 도움으로 풀려난다. 이 사건을 지켜 본 주위 사람들은 변호사를 비난하지만 그는 마치 게임에서 승리한 사람처럼 자신의 승리에 도취된다.

며칠 후 범인과 변호사가 비오는 날 밤 공원에서 다시 약속을 하지만 범인은 안 나타나고 또 다른 강간 살인사건이 벌어진다. 이번에는 변호사 자신의 반대로 목격자가 되어 수사관 질문에 횡설수설하는 곤욕을 치른다. 그는 범인이 자기가 변호한 바로 그 사람이라는 점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도처에서 비난을 받지만 그는 다시 그 강간 살인사건의 변호의뢰를 맡는다. 전처럼 의뢰인을 무죄로 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의뢰인의 살인증거를 찾기 위해서다. 그는 의뢰인과 같이 살고 있는 어머니(산부인과 의사) 집을 방문, 의뢰인의 성장배경 가족배경에 관한 얘기도 듣고 의뢰인이 범행 알리바이를 위해 판 터널도 발견한다.

이 과정에서 의뢰인이 어릴 적에 어머니가 낙태수술을 하는 광경을 목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 의뢰인이 중절수술을 한 여자를 범행대상으로 한다는 점을 파악, 재범행을 막는다.

변호사-의뢰인간의 비밀스런 관계가 깨지자 어머니마저 죽인 범인은 변호사를 살해하려드는데 이 과정에서 그는 결국 여자 경찰관의 총탄에 맞아 죽는다는 줄거리다.

3대를 분석해야

살인범의 범죄동기 범죄심리 범죄행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범인의 과거 성장배경이나 가족관계 등을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 영화에서는 자세한 언급은 없으나 군데군데 중요한 사실들이 나열되어 있다. 이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범죄동기를 밝혀낼 수 있다.

한 인물을 알고자 할 때 적어도 인격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3대 직계가족(할아버지-아버지-당사자)의 인물성격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영화 속에서는 어머니만이 유일하게 등장하고 할아버지의 초상화가 잠시 보일 뿐이다. 그외의 주변인물에 관한 정보는 어머니 혹은 범인 자신이 회상하는 기억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할아버지는 범인 가문의 제1대로 해적질 또는 장사를 하여 재산을 많이 모은 강인한 인물로 설정되고 있다. "개를 때리는 하인을 보고 할아버지가 하인을 똑같은 식으로 때린다"라는 대사에서 엿볼 수 있듯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식으로 철저히 보복을 가하는 인물로 묘사돼 있다. 범인의 정신적 성장배경에 가장 많은 영향을 주었던 인물이 바로 할아버지였던 것이다. 범인이 자신의 철학을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인용하는 사람이 바로 할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실제 영화 속에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범인의 아버지는 법률가였는데 어머니와의 불화로 이혼하고 외딴 섬으로 도피해버린 인물이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나 범인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향은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마디로 자식에게 별 애정이 없는 무관심하고 패배주의적인 인물인 것 같다. 아버지에 대한 범인의 유일한 기억은 어머니와의 이혼문제가 거론될 즈음 "너는 원치 않았던 아이이고 따라서 어머니가 지우려(중절수술)했던 아이다"라는 아버지의 얘기 뿐이다. 사실 아버지의 이 얘기는 범인의 범죄심리에 있어서 가장 핵심되는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영화 속에서 범인의 어머니는 냉정한 여성으로 그려진다. 인상이 저렇게 차가운 어머니가 어떻게 자식에게 사랑을 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싸늘한 모습이다. 남편과 심한 갈등으로 이혼했고 자식에 대해서는 애정이 결여된 엄마가 결국 자식을 비정상적으로 만든 것이다.

범인의 과거 성장에 대해 짐작할 만한 영화장면은 별로 없지만 간간이 표현된 사실로부터 추측해 보면 그가 왜 그렇게 되었나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제대로 정을 받지 못하고 자랐고 유일하게 할아버지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은 듯 하다. 영화 속에서 범인은 언제나 혼자 요트에 있거나 바닷가에서 배 수리를 하는 등 딴 사람과의 인간관계가 전혀 없다.

성장하면서 그는 부모들이 부부싸움하는 것을 무수히 목격했을 것이다. 그때마다 그는 '나는 태어나지 말아야 할 아이다'라는 자책감과 동시에 '뱃속의 자신을 어머니가 지우려 했다'는 사실을 아버지에게서 듣고 어머니에 대한 복수심과 공포를 느껴 왔다.

이런 상황에서 14세 때 우연히 산부인과 의사인 어머니가 태아를 적출하는 광경을 목격하고 '어머니가 단 애들을 죽이는 것과 같이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라는 식의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이런 식의 생각의 연계는 어린 아이니까 또는 일시적인 피해망상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이런 생각이 지속적으로 성장 후에도 계속되어 한 사람의 사고를 지배하고 엄청난 살인사건을 저지를 정도로 된다면 정신병적인 망상(delusion)인 것이다.

범인이 이런 망상을 가지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은 낙태광경 목격이다. 하지만 실제로 더 중요한 것은 계속되어 왔던 냉정한 어머니와 자식간의 애정결여 관계가 망상형성에 더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어떤 하나의 사건보다 그 저변에 깔린 서로간의 감정이 더 중요한 것이다.

정화의 의미가 담겨

범인의 범행양상을 보면 내면심리가 더욱 확실해진다. 비오는 날 밤 중절경험이 있는 여자를 범행대상으로 삼는 데 아기 기저귀로 입을 틀어막고 강간 살해하여 불에 태워버리는 행위 속에는 여러 상징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비오는 날 밤 불에 태워버리는 그의 끔찍하고 잔혹한 행동에는 비와 불로서 모든 죄를 씻고 태워버려 소멸시킨다는, 정화의 의미(물론 병적인 사고이지만)가 담겨있는 것이다.

아기 기저귀를 입에 물리는 행동은 '넌 자식을 죽인 여자이다'라는 응징의 의미이며 강간의 의미는 성적 쾌락보다는 복수와 공격성을 나타낸다. 결국 나중에 어머니도 살해되지만 범인이 연쇄살인한 중절경험이 있는 여성은 사실 무고한 희생자일 뿐이다. 실제로 범인의 살해대상은 자신을 낙태시키려 했던 어머니인 것이다.

자아나 초자아가 형성돼야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 영화 속의 주요 핵심토픽인 인간의 본능, 성장과정에서의 동일시, 강간심리 살인심리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독일 정신분석가 프로이드(Freud)는 1890~1920년 사이에 인간이 지닌 본능적 욕구인 이드(id)에 대해 세번씩이나 수정이론을 발표하였다. 초기에는 성적(sexual)인 것과 자기보존적인 것, 두 가지라 했다. 그러나 중기에는 성적욕구 하나만을 인간의 본능적 욕구로 간주했고, 후기에는 최종적으로 성적인 것과 공격적(agression)인 것, 두 가지로 보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성적인 욕구와 공격적 욕구는 양적으로는 같지 않으나 공존한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예컨대 남녀간의 성교행위에는 다소간의 공격성이 내포되어 있기 마련이다. 그 영화 속에는 변호사가 애인과 성행위를 격렬하게 하는 장면 사이 사이에 스쿼시(실내미니테니스경기)를 아주 거칠게 하는 장면이 삽입되어 있다. 이는 성적 본능과 공격적 본능이 서로 교차함을 묘사한 것이다.

물론 사회적으로 용납해서는 안될 행위에 대해서는 자아(ego) 또는 초자아(superego)가 발동하여 잘 억압하고 있다. 그러나 차를 광적으로 급하게 운전한다거나 운동경기를 격하게 하는 행위에서 인간의 본능인 공격성이 숨어있음을 볼 수 있다.

즉 범인의 경우 성장과정중 자아·초자아의 발달이 안되어 극단적 충동욕구를 마음대로 발산하지만 변호사는 내면에 공격적 충동이 있지만 잘 억제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한편 동일시(identification)란 성장과정중 부모 형 주변 윗사람들의 태도와 행동을 닮는 것을 말한다. 이는 단순히 그들의 행동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미래 모습을 그들의 생각 가치관 도덕관 삶의 방식에 맞춰 그들과 같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청소년기는 동일시를 통해 자아·초자아가 발달하는 중요한 시기다. 이때 주위에 동일시할 만한 적당한 인물이 없거나 혹 있다 하더라도 좋지 못한 인물을 동일시할 경우 그릇된 인간이 되기 쉽다. 대개 동일시되는 인물은 자기 주변에서 감정적으로 가장 가까운 인물이 되는데 영화 속의 범인의 경우 반드시 복수와 응징을 하는 할아버지를 동일시했던 것 같다. 할아버지의 '복수철학'이 그대로 범인의 가치기준의 일부분에 포함된 것이다.

정신분열증과의 차이

살인자의 과거 성장배경을 살펴 보면 몇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대체로 어려서 부모나 주위 사람으로부터 가해진 마음의 상처를 자주 경험하고 있다. 이때마다 자기 자신이 못났고 나쁘다고 보는 자책감과 죄책감에 쌓이게 된다. 동시에 누구를 증오하는 마음이 생긴다. 이 증오심이 그의 무의식 세계에 남아 마음 속 깊이 잠재돼 있다가 성장 후 어떤 자극을 받으면 한순간에 터져나와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 바로 그 전형적 예다.

강간심리에 대해 깊이 연구한 여류 사법정신의학자 그로스(Groth)의 1977년 발표 논문을 인용해 보자. 그는 강간은 성행위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성이란 방법을 통해 자신의 힘을 과시하거나 분노를 풀려는 기도라고 말했다. 현재 이 설명은 하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는 또 강간을 '권력형 강간'과 '분노형 강간'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대개 두가지 유형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데 그중 하나가 두드러진다.

'권력형 강간'인 경우 그 행동이 매우 난폭하다. 대개 평소 느껴왔던 자신의 신체적·정신적 열등감을 약한 여자에게 해소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열등감을 해소하는 것이다. '분노형 강간'은 과거에 여자들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던 사람이 흔히 저지른다. 특정 여성에게 느꼈던 분노 경멸 증오심을 다른 여성에게 푸는 것으로 주로 자기보다 연상인 여자를 대상으로 삼는다. 이 영화의 경우 범인의 어머니에 대한 증오심이 좀더 강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여지므로, 범인의 강간심리는 '분노형 강간'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지금까지 '크리미날 로'라는 영화에 대해 줄거리를 중심으로 정신의학적 측면에서 살펴 보았다. 영화 속 범인의 정신의학적 진단을 굳이 내리라면 나는 편집증(paranoia)이라고 진단서에 기록할 것이다.

내가 그를 편집증환자로 보는 이유는 이렇다. 한 가지 사고에 집착한 범인이 용의주도하게 모든 일을 처리하는 점이 편집증 증상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정신분열증 환자라면 그 범행은 다분히 우발적이고 계획성이 없게 진행됐을 것이다. 즉 정신분열증 환자의 사고는 편집증 환자의 사고처럼 계획적이고 체계적일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정신분열증세도 약간 있어 보인다. 그의 복수망상이 편집증 환자에게 흔히 나타나는 의처증이나 의부증과는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신분열증 환자를 잘 모르는 사람이 환자의 얘기를 들으면 그럴듯 해 보인다. 현실성이 있어 보이는 것이다. 반면 편집증 환자를 대하는 사람은 환자의 생각이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금방 눈치채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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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 이영식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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