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관론과 비관론
김-바쁜 중에도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논의할 주제는 90년대를 맞이하면서 우리의 과학기술운동이 어떤 과제를 안고 새롭게 출발해야 하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에게 '커서 뭐가 될 것인지' 물어보면 대개 '과학자'라고 대답합니다. 옛날에는 '대통령'이었는데. 과학자는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것으로 아이들은 생각하고 있지요.
19세기 철학자들도 이와 비슷했습니다. 과학이 전쟁 질병 식량문제 등 인간의 모든 고민을 풀어줄 것이라는 낙관적인 사상이 그 시대를 풍미했습니다. 진화론에 영향받은 이러한 견해는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도 지속됐습니다.
2차대전이 끝나자 이러한 인식은 위기감으로 변했습니다. 자원이 고갈되고 전쟁은 인류의 멸망을 의미하게 됐습니다. 환경오염이 극심해지고 의술은 발달하고 있지만 소외된 계층은 여전히 그 혜택에서 제외되고 있습니다. 건축기술의 발달은 오히려 주거환경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심화시켰습니다. 그래서 요즘 철학자들은 낙관론을 펴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과학기술의 발달이 반드시 그만큼 인류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라고.
그러면 먼저 '오늘의 과학기술운동이 어떠한 동기에서 출발하는지'에서부터 얘기를 풀어봅시다.
의료기술의 편향성
양-'의학'과 '의료'를 구분할때 의학은 학문이란 차원에서 과학기술의 범주에 들지만 의료는 사회적 실천을 포함하고 있다고 봅니다. 가령 건강을 정의할때 '육체적 정신적'이란 말 뒤에 '사회적'이란 단어가 반드시 붙습니다.
의료기술의 발달이 그대로 인류의 건강 증진에 이바지하느냐에는 많은 의문이 있습니다. 오히려 사회적 조건에 의해 더 많이 규정받는다는 느낌입니다.
일례로 우리나라 결핵환자는 현재 80만명에 이릅니다. 그런데도 결핵전문의는 1년에 겨우 몇명밖에 배출되고 있지 않습니다. 반면 상대적으로 환자수가 적은 성형외과전문의는 수십명씩 자격을 얻습니다. 치료비를 댈 수 없는 80만명보다 능력있는 성형외과환자를 더 선호하는 의사들의 편향성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제가 의대를 다닐 때나 졸업한 후에나 한번도 직업병에 대해서는 배워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노동부 통계를 보면 현재 8천9백명의 직업병환자가 있다고 합니다. 전문가들은 최소한 3~10배는 더 된다고 보고요. 그러나 직업병에 대해 의사들은 일부러 외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의료기술의 발달은 필연적으로 윤리문제를 야기시킵니다. 얼마전 '대리모'(代理母) 문제가 사회적 관심을 모았지만, 양수검사 초음파검사 등 남아선호현상도 가속화되는 추세입니다. 이러다간 농촌총각뿐아니라 도시총각도 장가가기 힘들겠어요(웃음).
김-우리나라가 산업재해나 직업병의 발생률이 세계최고라는 얘기가 있는데….
양-아닙니다. 산업재해율은 가장 높지만 직업병환자수는 일본보다 오히려 적습니다. 그러나 실제 환자수가 적을 리는 만무하고 단지 직업병의 기준을 엄격히 해서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으면 직업병으로 쳐주지 않고 있을 뿐이지요. 이럴 때 없는 사람들에게는 과학이란 도망가기 좋은 수단으로 비쳐지지 않겠어요.
한-과학자하면 흔히 박사학위 받고 실험실에서 연구하는 사람들을 연상합니다. 그러나 현대는 과학기술혁명의 시대입니다. 말하자면 과학기술이 인간의 모든 생활에 보편화된 만큼 과학자도 일반적인 인간에 다름아닙니다. 80년대 예를들면 이공계 대학을 다니는 학생수는 같은 나이 또래의 30% 가량 됩니다. 이런 식으로 이공계 학과를 졸업하고 연구소나 대학, 산업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과학기술자로 정의할때 전체 경제활동인구의 10%가 이에 해당됩니다.
우리나라가 그동안 고도경제성장을 이룬 이면에는 노동자의 힘도 컸겠지만 생산 현장이나 연구소에서 묵묵히 자기일을 수행한 과학기술자의 노력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정책결정과정이나 분배에 있어서는 과학기술자의 힘이 그다지 크지 못했습니다. 과학기술이 야기했던 사회적인 책임에 있어서도 과학기술자들은 떳떳이 목소리를 낼 수 없었습니다.
기본적으로 과학기술자가 일부 특권계층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의 집합이라는 점, 풍요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을 잘 활용해서 생산수준을 높여야 한다는 점, 그리고 과학기술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자들이 힘을 뭉쳐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야한다는 점이 과학기술운동의 출발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엉뚱하게 포장된 연구결과
이-연구소에 있으면 과학기술의 허실을 많이 보게됩니다. 83년에 시스템공학센터에서 원격탐사기술을 이용한 댐에 관한 연구가 있었어요. 북한에 가상적인 모델을 설정하고 그 영향을 분석한 결과 별로 우려할만한 것이 없다는 식이었어요. 그런데 87년에 갑자기 뚱딴지처럼 '금강산댐'사건이 터져나온 거예요. 연구에 참여했던 어떤 연구원이 발표의 배경을 알아봤더니 자신의 연구결과가 근거자료로 되어있더라는 겁니다.
87년 어느날 고분자부서에는 긴급하게 정부에서 프로젝트가 떨어졌는데 연구내용에 대해 박사들은 지시만 할 뿐 일절 함구하고 있더랍니다. 궁금하게 여긴 연구원들이 여기저기 논문을 찾아 알아봤더니 최루탄껍질을 부드럽게 하는 내용이었답니다. 6월항쟁 당시 최루탄에 의한 부상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되자 부작용없는 최루탄개발에 고심하던 정부 당국이 연구지시를 내린 것이지요.
얼마전 페라이트개발에 관한 기사가 신문지면을 장식한 적이 있지요. 우리 연구원의 어떤 박사가 발표한 내용인데 이 기술은 97%가 일본이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나게 매스컴 탈 때는 좋았는데 얼마후 일본측으로부터 항의가 들어왔습니다. 조사결과 일본의 연구결과를 그대로 베낀 것으로 판정났고요. 박사는 밑에 연구원들이 한 일이라고 꽁무니빼고, 연구원측은 은폐하기 급급하고….
이런 경우 연구원들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깊은 고뇌에 빠집니다. 첫째 연구내용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배제되고 둘째 그 연구결과가 다른 목젝에 이용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배신감을 느끼고 셋째 연구내용이 왜곡조작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두려움마저 느끼게 됩니다.
김-환경문제는 우리 생활하고 직접 연관을 맺고 있으면서도 그동안 심각함을 덜 느꼈어요. 우리가 숨쉬는 공기, 마시는 물, 먹는 음식 등등 이 모든 것이 바로 환경오염과 직결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 나라 환경문제의 심각성은 오염된 기간이 짧고 그 진행속도가 날로 가속화되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빠른 경제성장의 결과 급속도로 환경파괴가 진행되고 그동안 환경오염에 대한 인식부족과 정책부재로 심각한 지경에까지 와버린 것이지요.
또하나 환경문제는 가난한 계층으로 갈수록 더 심각하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래도 부자동네의 공기가 더 깨끗하고 라면도 없는 사람들이 주로 먹는 것 아니에요(웃음). 최근 저희 연구회에서 조사한 결과 빈민층은 실제 환경오염이 더 심했던 80년대초보다 요즘에 환경오염이 더 심하다고 느낀다는 겁니다.
그동안 전문가들도 환경문제에 수동적 소극적 자세를 보여온 것을 반성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정부의 전향적인 방향전환이 있어야 한다고 봐요. 환경문제는 감추고 측정자료는 숨기기 일쑤이고 문제가 발생하면 은폐하기 급급하던 무사안일한 태도를 청산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전문가들의 과학적인 문제 접근이 정말로 필요한 시점입니다.
과학기술자는 얼마나 힘이 센가?
한-과학기술운동이 무엇인지 개념을 정의하는 일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먼저 '과학기술운동'과 '과학기술자운동'을 나누어 생각합시다. 과학기술운동이란 현대의 과학기술이 야기하는 여러가지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대중들의 사회적 실천을 의미합니다, 가령 반공해운동 반핵운동 등이 여기에 속하지요.
한편 과학기술자운동은 과학기술자들이 힘을 합쳐 그들의 권익을 향상시키고 또 그 결집된 목소리로 과학기술자에게 맡겨진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는 활동을 말합니다. 과학기술자들의 각성과 주체적인 노력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넓은 범위의 과학기술운동은 이 두가지 범주를 포함하고, 어떻게 효과적으로 결합하느냐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이-과학기술자들은 우리나라 과학정책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가령 70년대에는 화학공학이 일대 붐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그후 10년도 못돼서 화공분야는 실업자가 넘치고 반면 컴퓨터 신소재분야는 사람을 못구해서 쩔쩔맵니다. 과학기술인력정책이 불과 10년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임기응변으로 일관하는 한 단면이지요.
요즘 유전공학하면 첨단학문으로 굉장히 각광받는데 실상을 알아보면 그렇지 못한 측면도 많습니다. 유전공학연구에 쓰이는 어떤 용액은 1㎎에 수십만원씩 하는 것도 있다는데 얼마나 효용성있는 연구를 하는지는 의문입니다. 외국에서는 80년대초 각광받던 유전공학이 요즘 퇴조하는 기미마저 보이고 있다고 해요. 돈은 엄청나게 쏟아붓는데 나오는 결과가 거의 없다는 거예요. 유전공학연구가 인간에게 필요한 측면은 식량과 의료분야에 도움을 주는 것인데, 실제 유전공학센터에서 연구하는 것을 보면 그러한 분야는 거의 없어요. 실제로 필요한 연구보다 홍보성 정치성 연구에만 매달려 있다는 느낌입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과학기술자는 자유롭고 낭만적인 직업이었습니다. 과학기술연구원의 연구원들도 당시로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혜택받는 특권계층에 속했습니다. 그러나 80년대들어 연구소 숫자가 늘어나고 과학기술자도 양적으로 팽창하면서 더이상 자유인으로 머물 수가 없게 됐습니다. 지위도 하락하고 연구방향이나 내용의 결정에도 소외되어가고 있습니다. 최근 연구소나 기업체의 연구개발부서에 근무하는 과학기술자들은 자신이 무슨 기계의 부속품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고민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김-과학기술자의 층이 넓어지고 과학기술로 인한 많은 모순들이 드러나면서 80년대 후반에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현상들이 나타났습니다. 과학기술자들이 스스로를 조직해서 실제 사회운동의 한 부분으로 참여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아직 전반적으로 초기단계라고 볼 수 있지만 '인도주의 실천의사협의회'(이하 인의협)처럼 사회적으로 명성을 떨친 단체도 없지 않습니다. 각 단체들의 결성동기와 활동에 대해 말씀해 주시지요.
양-인의협은 의료와 의료인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자는 지극히 당연한 목적에서 출발했습니다.
87년 11월에 창립됐는데 현재 대학교수 개업의 종합병원의사 수련의 등 4백 17명의 회원이 가입돼 있습니다.
활동을 간단히 소개하면 첫째 건강에 대한 상담을 받고 있습니다. 회원들이 교대로 사무실을 지키면서 전화나 방문에 의한 상담을 해주고 있는데 아직도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병원문턱이 높고, 의사들이 무얼 잘못하고 있는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둘째 병원비 때문에 의료혜택에서 소외된 사람들에게 진료의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철거민들을 대상으로 한 주말진료나, 사정이 어려운 환자들을 회원들이 근무하는 병원으로 보내 도움을 받게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셋째 의료환경에 대한 조사작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가령 탄광에서나 발생하는 것으로 알고 있던 진폐증이 서울 상봉동 연탄공장 근처 주민들에게 발생한 사실을 조사한 것이나, 매향리 주민들의 공군폭격기에 의한 소음 피해를 조사한 활동이 이에 속합니다. 마지막으로 현재 의료의 편중현상을 타개하고 돈없는 사람들의 건강권을 보장하기 위해 '국민의료보장법'을 제정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의료'행위 자체가 원래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시작된 것인데 우리 사회가 그렇지 못한 면이 많기 때문에 의사들이 중심이 되어 원래의 정신으로 되돌아가자는 것이 인의협의 결성 취지라 하겠습니다.
이-과학기술연구원 노조는 87년 노동자 대투쟁이후 사무전문직노조들이 잇따라 설립된 것에 자극을 받아 그해 12월 17일 창립총회를 가졌습니다. 당시 과학기술원 노조로 출범했지만 현재는 과학기술연구원을 비롯, 과학기술원 시스템공학센터 유전공학센터 해양연구소 등 사실상 5개 노조로 나뉘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과학관련 연구소의 노조활동은 임금 근로조건 등 처우개선에도 역점을 두고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앞에서 말한 연구환경과 인사제도의 개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연구원들이 프로젝트의 결정에서부터 연구방향 연구내용에 이르기까지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지요.
연구소노조라서 그런지 다른 노조나 단체로부터 전문적인 의뢰가 많이 들어 옵니다. 가령 얼마전 지하철노조에서 노동자들이 마시는 식수에 대한 조사를 해달라는 부탁이 들어와서 저희 노조에서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아직은 미약하지만 그런 쪽으로도 과학기술자들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면이 있지 않겠어요.
김-교원노조 싸움을 보면서 '선생님이 무슨 노동자냐'하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마찬가지로 실험실에서 연구하는 과학자가 무슨 노동자냐하는 질문을 많이 받을 것 같은데….
이-노조설립직후 연구원측으로부터 탄압을 받아 제가 재임용조치에서 탈락되고 곧바로 군대에 가게 됐습니다. 이때 노조에서 즉각 파업에 돌입했는데 '과학자들이 쟁의한다'고 신문에 대문짝 만하게 났어요. 박사들 중에서도 조합원이 있는데 언론에서 화제거리처럼 보도한 적도 있고요. 그러나 인간의 모든 창조적 활동이 노동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할 때 과학기술자도 노동자의 큰 범위안에 들어가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요즘은 대부분의 연구소에 노조가 생겨서 그런지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히려 과학기술자들이 노동운동에 참여하면서 노동자의 폭이 넓어졌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두리암」이 모태가 되어
한-청년과학기술자협의회(이하 과기협)는 87년 8월에 결성됐는데 그 이전에 YMCA산하에 '두리암'이라는 서클이 모태가 됐어요. 저희가 대학을 다니던 80년초 '과학기술이 가진 자를 위한 도구로 쓰여지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을 가지면서, 역사속에서 과학기술을 어떻게 유용하게 이용할 것인가에 관해 많은 토론을 하게 됐어요. 또 자연과학이 점차 전문화 신비화되면서 과학기술자는 일반 대중으로부터 유리되고, 그들의 연구결과가 잘못된 목적에 쓰여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됐습니다. 이러한 배경하에 과학기술자운동의 일환으로서 과기협을 결성했는데 현재 회원수는 2백50명 정도예요. 회원구성은 초기에는 이공계 대학원생이 주축이었지만 지금은 연구소나 기업체에 다니는 직장인이 더 많습니다.
활동은 소모임과 교육홍보, 연구 등 세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소모임은 회원들을 전공별 직장별 주제별로 나누어 진행하고 있는데 각자 자신이 관심있는 분야에 소속돼 활동하고 있지요. 주제별 모임으로는 최근 통신개방에 관한 입장을 정리한 '민족통신연구회'와 과학기술의 평화적 이용을 연구하는 '과학과 평화' 모임이 대표격입니다. 매월 회지 '과학과 노동'을 발간하고 신입회원의 교육과 과기협의 활동을 홍보하는 것도 중요한 사업입니다. 또 아직 과학기술운동이 완전히 이론적으로 토대가 확립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론적 틀을 갖추고 올바른 방향과 활동을 정립하는 작업도 게을리할 수 없습니다.
김-말씀들을 듣고보니까 저희 '환경과 공해연구회' (이하 환공연)가 가장 역사가 짧은 것 같은데…. 환공연은 89년 6월 17일 60여명의 회원이 참석해 창립총회를 가졌습니다. 이제까지 환경문제가 심각하다고 다들 떠들어댔지만 막상 그속에 전문가들은 찾아보기 힘들었어요. 환공연은 처음으로 국내 여러 분야의 과학기술자들이 조직적 틀을 갖추고 환경운동에 나서기 시작했다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회원들은 토목 미생물 화학 의학 법학 교통공학 과학정책 등을 전공한 소장 학자들과 직장인 대학원생들로 구성돼 있습니다.
현재 환경보건 환경정책 환경기술 핵 등 4개분과로 나누어 활동하고 있는데 분과별로 매주 세미나와 조사활동 및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난 해에는 '서울시의 대기오염실태조사'와 '전문가들이 보는 대기오염실태와 오염자료공개에 대한 설문 조사' 등 환경보건분과에서 활동이 활발했습니다. 앞으로 환경과 관련한 법률 정책의 연구와 일반대중에게 환경오염의 실태를 쉽게 설명해주는 홍보활동에도 힘을 기울일 작정입니다.
아까 이인우씨도 말했지만 환공연에도 소비자단체 여성단체 등에서 조사의뢰가 많이 들어와요. 앞으로 이런 문제들을 필요할 때마다 공동으로 해결하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과학기술운동에는 이 자리에 참석한 단체 외에도 많은 단체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각 분야별로 간략하게 소개해 주시지요.
양-보건의료쪽엔 길게는 3년, 짧게는 1년이 채 못 된 단체들도 있습니다. 먼저 치과 의사들이 결성한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와 반에이즈운동으로 유명한 '건강사회실현약사협의회'가 있습니다. 의료운동의 이론적 연구를 주로 하는 '보건과 사회연구회', 빈민들의 건강문제에 관심을 가진 '교회빈민의료협의회', 산업재해 직업병 등으로 부터 노동자들의 건강을 지키려는 '노동과 건강연구회'도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간호원들과 한의사들의 모임도 준비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기할만한 것은 의사들이 핵전쟁방지를 위해 결성한 '국제핵전쟁방지의사연맹'(IPPNW)에 우리나라가 지난해 가입했다는 사실입니다. 81년에 결성돼 83년에 노벨평화상을 받은 바 있는 이 단체에 우리나라가 가입함으로써 의료인들의 핵문제에 관한 관심이 높아질 것으로 기대됩니다.
이-87년부터 설립되기 시작한 연구소노조들은 이제 거의 모든 연구소에 보편화 됐습니다. 특히 대덕연구단지에 밀집된 과학기술관련 연구소에는 빠짐없이 노조가 결성됐습니다. 지난해에는 인문사회계통 연구소노조 및 전문직노조들과 힘을 합쳐 '연구전문직노동조합연맹'을 창립했습니다. 과학기술관련 40~50개 노조들은 분과형태로 따로 모임을 가지고 있는데 어차피 교섭의 상대가 모두 정부일 바에야 하나로 합쳐 단일노조를 만들자는 얘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한-과학기술자운동을 위한 단체로는 아직 과기협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현재 각 대학이나 과학기술원에는 무수히 많은 과학기술 서클들이 조직돼 있습니다. 특히 대학원학생들이 주축을 이룬 연구모임들도 많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들이 대학이나 대학원과정을 마치고 사회로 배출될 때쯤이면 과기협도 앞에 '청년'이란 단어를 떼버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환경운동쪽에도 많은 단체들이 활동하고 있는데 지난해에 '공해추방운동연합'으로 모두 통합됐습니다. 그리고 도시문제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공간환경연구회'가 결성돼있고, 건축인들이 올바른 주거환경을 만들어가기 위해 만든 '청년건축인협의회'도 활발하게 사업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각 단체별로 90년대에 계획하고 있는 활동방향에 대해 간략하게 말해 보기로 하지요.
소홀했던 분야에 더 큰 관심을
양-90년대 의료운동은 지금껏 소홀했던 부분에 더많은 관심을 쏟아야 하겠습니다. 핵발전소가 인체에 미치는 영향이라든지, 각종 직업병에 대한 조사라든지 단기간에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꾸준히 연구를 계속해야 합니다. 또 이제까지는 정부나 기업의 의뢰만 받았지만 노동자들의 요청에 의해서도 의료연구가 행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의사가 환자위에 군림하는 사회가 아니라 봉사하는 자세를 가지도록 의료인의 직업윤리가 확립돼야 하겠어요. 또한 90년대 내내 의료운동은 의료보장 예방의학의 현실화를 위해 노력할 겁니다.
이-우선 연구원들의 처우개선이 이뤄져야 겠어요. 이공계 연구원들이 문과계보다 70%밖에 임금수준이 되지 않고 81년부터 6년간 겨우 6%밖에 임금이 오르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연구소에 근무하는 과학기술자들은 비애감마저 느낍니다. 또 올바른 연구를 할 수 있는 연구풍토가 조성돼야 합니다. 과학기술연구가 정치권력의 외풍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성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연구소별 기업별로 분산돼있는 과학기술자들이 하나로 뭉칠 수 있는 조직이 필요합니다.
한-90년대 과학기술운동은 초보적인 단계가 아니라 하나의 사회운동으로서 분명히 자리잡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우선 현재의 추세가 계속된다면 과학기술자의 폭이 더욱 넓어지고 과학기술로 인한 사회적인 문제제기는 더욱 심각한 양상을 띨 것이 아니겠어요. 현재 과기협의 조직만 하더라도 지방대까지 논의가 확산되고 있고 회원증가도 눈에 띌 정도입니다. 이들이 사회로 진출해서 그야말로 자신의 전공분야에서 확고한 전문성을 가질 때 과학기술자들은 자신있게 사회적인 요구를 하고 책임의식을 실천에 옮기리라고 봐요. 이를위해 과기협은 보다 이론적인 틀을 확고히하고 관념적이 아니라 대중성을 갖도록 제반 활동들을 점검할 계획입니다.
김-학교교육을 살펴봐도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아이들에게는 쓰레기줍는 것 따위를 환경보호라고 가르칩니다. 환경이 우리 생활에 얼마나 중요하고, 사회구조적으로 어떻게 환경이 훼손되고 있는지를 가르쳐주지 않고 단지 지엽적인 문제로 호도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것들을 볼 때 환경보호는 어릴 적 교육에서부터 중시되도록 많은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오늘 얘기를 나누다보니 각 분야별로 진행되고 있는 과학기술운동이 서로 유기적으로 협조할 분야가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구체적인 사안에 있어서도 그렇고 서로 다른 관점과 시각에 있어서도 앞으로 많은 논의가 필요하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으로 '미래의 과학기술자는 어떠한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가'에 대해 한마디씩 해주시지요.
골고루 내리쬐는 「빛」
양-과학기술을 빛에 비유한다면 이제까지는 좁은 범위에 일정하게 쪼이는 빛에 불과했습니다. 과학자는 이러한 편향성을 극복해야 합니다. 요즘 의대생들은 거의 모든 공부를 외국원서에 의존합니다. 그러나 우리 현실에 책임지는 의사가 되기위해서는 우리나라 현실에서 시작되는 의학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의료교육이 단지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애를 배워주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는 거지요.
이-어릴때에 '든사람 난사람' 보다 '된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말을 들은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연구원들은 흔히 '어릴 때 과학자꿈, 커서보니 처량하다'라는 말을 우스개 소리로 자주 합니다. 과학자가 된다고 해서 자연과학에 대한 지식만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 특히 과학기술이 어떻게 우리사회의 소외된 이웃들에게 혜택을 줄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하겠지요.
한-과학기술자가 되려면 우선 긍지를 가져야 되겠어요. 미래를 창조하고 개조하는 일은 전적으로 과학기술자의 생생한 노동의 결과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이것이 자만심과 다른 직업에 대한 우월감으로 연결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요. 과학기술자들이 편협한 사고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과학사를 공부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자연과학의 법칙과 수학의 공식들이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그 시대의 사회적 요구를 반영한 결과물이라는 역사의식이 갖춰져야 해요.
김-예비과학자들이 과학기술의 진수를 접하기도 전에 부정적인 측면만을 강조해서 혹시 실망하지 않을까 우려가 됩니다. 그러나 학문을 하는 자세는 바로 현실의 부정적인 측면에서 출발합니다. 그만큼 우리 현실이 미래의 과학기술자들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는 반증이기도 하지요. 성경에 '생물을 다스리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것은 인간이 '마음대로 하라'는 뜻이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조화롭게 살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우리 선조들의 자연관도 그러했습니다. 과학기술자들은 자연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현재의 과학기술이 제기한 여러 모순들을 해결해야할 과제를 안고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