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적 작은 핵(核)에 해당하는 1백메가t급의 핵무기가 투하되면 지구전역에 걸쳐 거대한 '한랭전선'이 형성되고 상당 기간 어둠이 계속될 것이다. 또 곳곳에서 화재가 발생하고, 하늘을 뒤덮는 연기 때문에 생명의 젖줄인 태양으로부터 외면당하게 된다. 특히 핵이 떨어진 시점부터 1주일~10일 사이에 기온은 40℃ 정도 폭락하고, 태양을 가로막는 '연기장벽'은 좀처럼 기세가 꺾이지 않아 수개월 이상 차가운 기온이 계속될 것이다.
이것은 1983년에 컴퓨터가 예고한 이른바 '핵겨울' 시나리오의 골자다.
그 후 이 가상 모델은 여러 과학자들의 손을 거치면서 한결 세련되게 다듬어졌다. 이를테면 다소 과장된 면들이 지적되었다. 우선 핵폭발 후 발생하는 온도의 낙폭(落幅)이 수정되었다. 한꺼번에 40℃나 떨어지는 일은 있을 수 없고 14℃ 정도 낮아진다는 것이다. 또 지속기간도 수개월이 아니라 수주일이 될 것으로 추정했다. 결국 핵겨울이 핵가을로 완화된 셈이다.
그런데 최근 이 '핵가을' 모델에 의의를 제기하고 나선 학자가 등장했다. 미국 브리스톨대학의 이론물리학자인 '제니 넬슨'은 핵폭발 후 발생하는 연기의 모양이 잘못 선정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핵가을이 매서우냐, 밋밋하냐 하는 것은 태양광선을 어느 정도 차단하느냐에 달려 있는데, 그 차단력은 주로 연기의 모양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이다.
컴퓨터 시나리오에 따르면 핵폭발 때 생기는 연기의 반은 거무스름한 연기다. 기름 플라스틱 아스팔트 등이 포함된 연기인 것이다.
「종이 호랑이」인가?
넬슨은 이 연기의 모양이 지금까지 알려진대로 공모양(球型)이 아니라 프랙탈(fractal, 본지 1989년 4월호 118p 참조)형에 가깝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전자현미경으로 조사한 결과 작은 구슬사슬들이 수없이 모여 응집된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그는 핵폭발 후 며칠 동안은 연기의 모양이 구형이든 프랙탈형이든 상관없으나 시간이 더 경과하면 연기 입자는 대기 중에서 뭉쳐질 것이고, 그 뭉쳐진 정도에 따라 태양광을 여과하는 능력에 차이를 보일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때 프랙탈형의 연기가 태양차단을 더 효과적으로 차단한다는 게 '넬슨'설의 요체다.
연기입자층에 도달한 태양광은 여러 방향으로 퍼진다. 입자층에 흡수 또는 반사되거나 그대로 통과하는 것이다. 흡수된 빛은 입자 표면근처의 원자들을 자극하기 시작한다.
이때 연기입자가 어떤 모양이냐에 따라 태양빛을 흡수하는 능력이 달라진다. 예컨대 아주 작은 입자일 경우에는 태양광을 잘 흡수한다. 그 원자들의 전부가 표면 주위에 몰려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기입자가 공모양이면 태양광과 접촉하기조차 어렵다. 공모양의 입자는 그 중심부위에 원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태양빛이 그곳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넬슨의 주장대로 연기입자가 눈송이 같은 프랙탈형이라면 사정은 크게 달라진다. 프랙탈형 입자의 원자들은 표면 근방에 자리잡고 있어, 태양과의 만남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프랙탈형 입자는 표면적/전체 크기가 커서 태양광 흡수력이 뛰어나다.
요컨대 공모양의 연기입자를 가상해 만든 모델에 비해 프랙탈형 연기 입자를 상정한 모델은 핵가을의 '공포'를 한결 덜어준다. 적어도 핵폭발 후 추워지는 정도와 그 지속기간에서 만큼은, 넬슨은 9℃쯤 온도가 떨어지고, 그 지속기간도 훨씬 짧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렇다고 핵가을을 '종이호랑이'로 여기는 것은 위험천만하다고 핵관련 학자들은 입을 모은다. 아무리 날고 뛰는 컴퓨터라 할지라도 핵폭발 후 나타날 것으로 보이는 모든 현상들을 다 예측하기는 어렵고, 따라서 '그날 이후'는 아직 미지수로 남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