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자신의 사진을 넣은 크레디트 카드나 명함을 흔히 볼 수 있다. 또한 모든 사람이 날씬한 몸매를 갖기 원한다. 외모가 중요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단백질’이란 생체분자는 어떻게 생겼을까.
단백질의 세계에서는 인간 사회보다 모습이 훨씬 중요하다. 어떻게 생겼냐에 따라 서로 간의 만남이 결정되고 이로 인해 자신이나 상대 단백질이 변하게 된다. 2002년 노벨 화학상은 단백질과 같은 생체분자의 생김새와 무게를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한 사람들에게 돌아갔다. 스위스 연방공대(ETH)의 쿠르트 뷔트리히 교수는 핵자기공명법(NMR)을 사용해 단백질의 3차원 입체구조를 생체환경과 유사한 수용액 상태에서 규명할 수 있도록 했고, 미국 버지니아 커먼웰스대의 존 펜 교수와 일본 시마즈 회사의 다나카 코이치는 단백질같은 생체고분자의 질량을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했다.
세포 안의 노동자, 단백질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는 세포로 이뤄져 있다. 세포 안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세포 내에는 다양한 물질이 존재해 역동적인 생화학 반응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 이 중에서도 단백질은 세포가 그 역할을 잘 해낼 수 있도록 모든 작업을 실제로 수행하는 노동자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단백질이 만들어지냐에 따라 세균에서부터 식물, 인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생명체가 결정된다. 또한 같은 인간이더라도 단백질의 생김새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과 기질을 갖게 된다. 물론 어떤 단백질을 만들 것인가에 대한 정보는 DNA라는 유전물질에 담겨 있다.
DNA는 4가지 종류의 알파벳(A, T, G, C)만 등장하는 긴 문장과 같은데, 이 중 단백질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정보가 들어있는 부분을 유전자라 한다. 인간의 경우 약 3만-4만개의 유전자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전자의 알파벳을 모두 읽어내면, 단백질이 어떤 아미노산으로 이뤄져 있는지 알 수 있다. 최근 성공적으로 끝난 인간게놈 프로젝트는 인간의 DNA를 모두 읽어내고자 한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단백질이 어떤 아미노산으로 구성돼 있는지를 알더라도, 단백질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단백질의 기능을 파악하는데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어떻게 생겼나’와 ‘얼마나 무거운가’에 대한 답을 알아내는 것이다.
종류마다 천차만별 NMR 스펙트럼
단백질이 어떻게 생겼나, 즉 단백질의 3차원 입체구조를 알아내는 방법은 현재로서는 ‘X선 결정학’과 ‘핵자기공명법’(NMR), 두가지밖에 없다. 최근 일부 단백질에 대해서는 제한적으로 전자현미경이 사용된 예도 있으나, 이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속한다.
NMR의 가장 큰 장점은 단백질이 실제 작용하는 환경과 같은 수용액 상태에서 단백질의 구조을 알아낼 수 있다는 점이다. 이에 비해 X선 결정학은 단백질을 일단 결정(크리스탈) 상태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실제 모습과는 약간의 차이가 날 수 있다.
단백질이든 DNA이든, 모든 분자는 원자로 이뤄져 있다. 원자는 전자와 핵으로 구성되는데, NMR은 핵으로부터의 신호를 포착해 분석하는 기술이다. 핵은 보통 상태에서는 신호를 발생시키지 않지만, 강력한 자기장 아래에 놓이면(강한 자석 근처에 놓이면) 고유한 주파수의 전자기파를 발생시킨다.
한 분자에서 나오는 모든 NMR 신호를 그래프로 그린 것을 ‘NMR 스펙트럼’이라 한다. 핵에서 나오는 모든 신호는 주파수가 서로 다르므로, NMR 스펙트럼은 마치 인간의 지문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NMR 스펙트럼은 서로 일치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기 때문에 이를 측정하면 그 물질이 어떤 것인가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렇게 지문 정도를 파악하는 수준에서 활용되던 NMR이 단백질 입체구조를 규명할 수 있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푸리에변환 NMR 기법’이 1966년 에른스트 교수에 의해 개발됐기 때문이다. 에른스트 교수도 뷔트리히 교수와 마찬가지로 스위스 연방공대에 재직했고, 이 업적을 인정받아 1991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푸리에변환 NMR 기법은 NMR 신호를 주파수별로 모아서 측정하던 과거의 방법에서 탈피해 수천개에 달하는 모든 신호를 한꺼번에 측정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이다. 이로 인해 신호 측정시간이 획기적으로 단축됐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방법이 발전돼 핵의 NMR 신호를 단순히 측정하는 차원을 넘어 핵과 핵 사이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즉 두 핵 사이의 거리나 각도 등을 NMR로 측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뷔트리히 교수는 이 중에서도 핵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는 방법을 이용해 단백질의 3차원 입체구조를 계산해낼 수 있는 방법을 1980년대에 개발했다. 그는 단백질에서 측정된 NMR 신호가 단백질의 어떤 핵으로부터 나오는 것인지를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을 확립했다. 그 후 두핵 간의 거리를 측정해, 이로부터 단백질의 3차원 입체구조를 계산할 수 있는 ‘디스턴스 지오메트리’(distance geometry)라는 방법을 적용했다. 그가 고안한 방법은 수많은 단백질 구조 규명에 적용됐고, DNA와 RNA 등의 핵산 구조 규명법도 유사하게 개발됐다.
또한 뷔트리히 교수는 1997년 ‘트로지’(TROSY)라는 NMR 실험기법을 개발해 NMR을 이용한 생체분자 입체구조 분석법의 최대 약점을 극복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NMR의 최대 약점은 분자량이 4만-5만달톤(dalton, 원자나 분자의 무게를 표현하는 단위, 수소원자는 1달톤이며 아미노산 1개는 약 1백10달톤) 이상이 될 경우 입체구조를 구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는 분자량에 관계없이 NMR 방법을 입체구조 규명에 적용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했다. 트로지 기법은 아직 완성된 방법은 아니며 여러 학자들이 많은 연구를 계속 진행하고 있다.
레이저와 전기장 이용해 단백질을 이온화
단백질의 기능과 특성을 파악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단백질의 3차원 입체구조를 규명하는 것이다. 하지만 X선 결정학이나 NMR 방법으로 구조를 구하는데는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든다. 이때 단백질의 질량을 측정하면 신속하고 손쉽게 단백질을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단백질의 질량을 측정하기는 보통 방법으로는 매우 어렵다.
화학약품이나 작은 크기의 분자는 질량분석기를 이용해 쉽게 질량을 측정할 수 있다. 하지만 단백질은 질량분석기를 이용하기에는 너무 ‘거대’하다. 따라서 단백질같은 거대분자를 질량분석기에 이용하기 위한 방법들이 1970년대부터 많이 개발돼 왔다. 대표적 방법이 흡착 기술(desorption technology)이다. 단백질같은 거대 분자를 가스 상태의 이온으로 만든 뒤, 이를 진공챔버(상자)에서 가속시킨다. 그러면 단백질이 이온화된 정도와 질량에 따라 맞은편에 도달하는 비행시간이 달라진다. 가장 빨리 도착하는 것이 가장 가볍고 이온화가 많이 된 것이다.
펜 교수와 다나카는 이같은 종래의 방법을 획기적으로 개선해 단백질의 구조와 형태를 변형시키지 않으면서 이온화된 가스형태로 만드는 방법을 개발했다. 펜 교수는 ‘전자분무 이온화’(ESI, ElectroSpray Ionization) 방법을 확립했다. 강력한 전기장 하에서 수용액 상태의 단백질 분자를 분사시키면 수분이 증발되면서 단백질이 진공챔버 속에서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는 이온화된 가스상태로 변한다. 이를 질량분석기에 투입하면 단백질의 정확한 질량을 손쉽게 알아낼 수 있다.
한편 다나카는 단백질 분자를 가스 이온화시키는 수단으로 레이저를 사용했다. 그는 ‘말디’(MALDI, Matrix Assisted Laser Desorption Ionization)라는 방법을 개발했다. 레이저를 단백질 분자에 직접 쏘면 구조와 형태가 깨지므로 매트릭스를 거쳐 에너지가 전달되는 방법을 이용해 단백질 분자를 이온화된 가스상태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ESI와 MALDI는 모두 복잡한 생체분자를 분석하는 유용한 수단이다. 이 기술의 개발 덕분에 저가의 질량분석기로 생체분자의 연구가 가능하게 됐다. 펜 교수와 다나카의 단백질 질량분석 방법은 최근 단백질 체학(proteomics)라는 학문을 여는데 결정적 기여를했으며, 이는 새로운 약품의 개발과 유방암, 전립선암 등의 난치병 극복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