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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을 놀라게 한 블랙박스 도청, 얼마나 밝혀졌나

안기부가 전자통신연구소에 46억원을 주고 개발한 'X프로젝트'. 전화국마다 은밀한 곳에 설치했다가 일제히 철거해간 '블랙박스'의 정체는?

안기부의 지시로 통신공사가 전자통신연구소를 통해 도청시스템을 개발했느냐에 온국민이 관심이 쏠려있다.

체신부와 과기처, 통신공사와 전자통신연구소는 이른바 '블랙박스'로 지목되는 도청장비에 대해 팩시밀리나 국제텔렉스 등의 전송품질을 점검하기 위한 '비음성통신용 전송품질 측정시스템'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장치가 전자교환기와 컴퓨터에 물린 도청장비라는 것은 이미 연구소와 전화국 내에서는 상식화된 사실이다.

다만 개발을 지시한 쪽과 연구를 직접 수행한 당사자들이 입을 다물고 있어 공식적으로 확인은 되지 않고 있다.

이번 사건은 6공화국의 도덕성을 시험대에 올려놓았다는 정치적인 측면 외에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정부출연연구소가 '검은 연구'를 하고도 결과에 대해 무책임하고 △국민의 사생활이 안보의 이름으로 일상적으로 침해되고 있으며 △첨단기술도 악용될 경우 인간의 삶에 얼마든지 불이익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됐다는 점에서 충격을 던져 주고 있다.

도청논란은 당사자인 전자통신연구소 노동조합(위원장 주진천)이 지난 10월4일 밝힌 성명서 '도청장치 의혹에 대한 우리의 입장'에서도 그 성격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오로지 민족과학기술발전을 위하여 일한다는 자부심만으로 십여년간을 연구개발에 몰두해온 1천5백여 연구소원 일동은 최근의 속칭 '블랙박스논쟁'을 맞아 이제까지의 자존과 노력들이 수포로 돌아가는 듯한 심한 허탈감과 답답함을 느끼고 있다.

과학기술은 반드시 국가 구성의 기본 주체인 국민의 생활에 편의를 제공함으로써 국민들에게 봉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 연구원들에게 주어진 책임과 사명이다. 그러나 최근 도청장치에 대한 연구개발의 시비는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채 혹시라도 국민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방법의 하나로 이용되는 도청장치로 이용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우리들로 하여금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분노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과학기술의 가치중립을 방패삼아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려는 무책임하고 기계적인 과학기술자의 모습을 부정한다. 반드시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

2급비밀 「X프로젝트」

이같은 블랙박스 시비에 대해 국회는 경과위와 교체위가 국정감사를 통해 증인심문과 실물검증까지 벌이면서 정체를 파악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국가 2급비밀'이라며 수감기관들이 연구원 명단이나 연구기간 등의 기본자료도 제출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의원이나 보좌관들이 과학기술의 전문가도 아니어서 명쾌한 확증을 끌어내지는 못했다.

다만 "비음성통신용 전송품질 측정시스템이 안기부와 관계있는 프로젝트이며, 도청용은 아니지만 특수한 어댑터(adapter)를 붙이면 간단히 도청장치로 전용이 가능하다"는 답변을 전자통신연구소에서 얻어내는데 그쳤다.

전화국 직원들이 밝히는 도청의 실상은 이렇다.

직원들은 지난해 5월 한국전자통신연구소 연구원이라며 서울시내 전화국 전자교환실에 들어와 설치하고 간 정체불명의 전자장치에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박스를 가져온 연구원들은 "안기부와 이미 협조가 이루어진 것이므로 걱정말라"며 새벽까지 이 박스를 설치했고 용도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알면서 왜 물어보느냐"고 말했다고 전화국 직원들은 당시 있었던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목격자들은 평소 열쇠로 잠겨진 이 박스 안에는 전원장치와 몇장의 회로기판이 내장돼 있었으며 여기에서 나온 4가닥의 선은 전자교환기의 심장부인 중앙처리장치 그리고 중앙처리장치가 처리한 가입자의 전화교환내역 즉 발신자 착신자 통화시작시간 통화종료시간이 모두 기록되는 자기테이프장치의 단자와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전기를 공급받는 선이 있었으며 나머지 한가닥은 수만가닥의 가입자 선과 함께 어딘지는 모르지만 외부로 나갔다는 것이다. 용도를 알 수 없어 전화국 직원들 사이에 '블랙박스'란 별명까지 얻었던 이 장비는 그러나 국정감사를 10여일 앞둔 지난 9월초 통신공사의 지시에 따라 서울시내 대부분의 전화국에서 철거됐다.

한편 지난 86년 대덕 한국전자통신연구소에는 2급비밀 취급인가를 받고 연구내용을 일체 외부로 유출시키지 않겠다고 서약한 강철희박사 등 38명의 연구원들로 비밀연구 프로젝트팀이 구성됐다. 연구목적이 연구소 안에서도 알려지지 않아 'X-프로젝트팀'으로 불린 이들은 연구소 1동 3층에 복도까지 막아 철저히 출입이 통제된 방에서 지난해 말까지 일을 했으며 자료의 외부유출을 막기 위해 쇄설기로 자료를 폐기처분했다.

블랙박스가 설치된 전자교환실의 출입자 명부를 확인한 결과 블랙박스 설치자들이 전자통신연구소 안의 X프로젝트팀 구성원들로 확인됐다. 또 이 시스템의 개발에 46억원의 연구비가 들었으며 서울시내 44개 전화국의 80개 전자교환기에 이 박스를 물렸다는 것도 드러났다.

최고 6천명까지 한꺼번에 도청

전자통신연구소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강금식의원(평민)은 연구소 연구원의 양심선언을 바탕으로 "X프로젝트팀이 개발한 장치는 분명히 전화도청이 목적이며, 블랙박스에서 수집한 통화내용과 통화자 및 상대방 전화번호가 통신공사 안에 있는 전화교환기 TDX-1과 미니컴퓨터에서 처리돼 안기부로 넘어간다"고 공개했다.

강의원은 최고 6천명까지 한꺼번에 도청이 가능하다고 연구원이 밝혔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연구소의 경상현소장과 X프로젝트의 개발책임자인 강철희박사는 이같은 사실을 극구 부인한다.

이들은 △블랙박스는 비음성통신기기들의 전송품질을 재기 위한 변복조장치(모뎀)를 두고 하는 말이며 △전화는 아날로그신호를 주고 받으므로 이 시스템과 기본적으로 상관없고 △정확한 국제통신요금을 체크하기 위해 통신시간과 착·발신자를 기록할 뿐 통신내용까지 이 장치로 알아낼 수는 없다는 설명이다.

교체위의 한국전기통신공사에 대한 국정감사에서도 야당의원들이 블랙박스의 용도를 집중적으로 따졌으나 통신공사 이해욱사장과 이 장비를 개발한 전자통신연구소 강철희박사는 "블랙박스라고 일컬어지는 장비는 모뎀이며 이는 국제통화중 음성통신과 비음성통신양을 구분 측정해 국제통신상대국가와 요금을 정산하는 데 사용될 목적으로 개발된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철거 이유는 모뎀을 통하여 전송되는 데이터가 불안정하여 보완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며 개발과정을 2급비밀로 분류한 것은 첨단기술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세상만사가 양면성을 갖는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은 숱한 의문점을 남기고 있다.

우선 전송품질 측정용으로 시중에 나와 있는 모뎀에 몇가지 기능을 추가한 단순 프로젝트라면 46억원의 막대한 연구비가 들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강박사도 모뎀개조는 간단한 기술이며 비용이 크게 들지도 않는다고 시인한 적이 있다. 또 음성과 비음성통신을 아날로그와 디지털신호로 구분짓는 것도 통신선로의 디지털화가 거의 이뤄졌고, 전화와 컴퓨터 교환기 상호간의 연동이 일상화된지 오래인 국내 현실을 감안할 때 설득력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블랙박스'가 국제통신량을 측정키 위한 것이라면 국제전화국에만 설치해도 되는데 왜 서울시내 모든 전화국에 설치했냐는 점이다. 또한 단순히 국제간 통화량을 측정키 위한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안기부가 개발을 지시했으며 개발목적 자체를 기밀에 부쳤냐는 점이다. 이와 함께 철거된 60여개의 '블랙박스'는 현재 각 전화국의 창고에 보관돼 있는데 이를 고칠 목적으로 철거했다면 이를 모두 수거해가야지 왜 창고에 처박아두고 있냐는 점이다. 전화국 직원들은 "철거 이유가 국정 감사를 앞두고 국회가 이를 문제삼을 것에 대비해 아예 증거를 없애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경상현소장도 "도청에 이용됐다고 해도 그것은 통신공사에 연구결과를 넘겨준 뒤의 일이어서 연구소로서는 모르는 일이며 과학기술은 물론 세상만사가 양면성을 갖는 법"이라고 밝혀 이같은 주장을 간접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그림)블랙박스의 구성


'불순'용어만 나와도 체크

통신 전문가들은 80년 들어 기계식 교환기가 철거되고 컴퓨터에 의해 작동되는 전자식 교환기가 도입되면서 도청 또한 소규모 수작업에 의한 방법에서 대규모 자동화 단계로 변천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전자식 교환기 자체가 거대한 컴퓨터이므로 중앙처리장치(CPU)를 조작해, 특정 도청 대상자가 전화를 걸면 정보기관으로 가는 전화선을 통해 통화내용이 자동적으로 흘러가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에 문제가 된 '블랙박스'도 교환기의 중앙처리장치와 연결돼 있었다.

또한 과거 안기부 등 정부기관 요원들은 70년대만 하더라도 전화국 시험실에 있는 가입자별 단자판에 정보기관으로 가는 전용회선을 연결해 도청을 했으나 기계식 교환기가 20%밖에 남아있지 않은 지금은 이같은 수공업적 도청은 거의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전화국 직원들의 증언이다.

설혹 블랙박스가 당국의 설명대로 단순히 데이터를 전송해주는 것이라고 해도 이 박스의 용도는 이미 어느 다른 곳에서 도청한 통화내용의 발신자와 착신자를 확인하기 위한 장비일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중앙처리장치 옆에 붙은 자기테이프 장치에는 전화국 가입자들이 통화를 할 때마다 그 사람의 전화번호와 상대방 전화번호 그리고 통화시각이 즉시 기록된다. 따라서 이 정보만 있으면 도청대상자가 누구에게 전화를 했는지 또 누구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는지까지도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도청에 관여한 적이 있는 한 정보기관의 직원에 따르면 서울 남산의 안기부 6층 황색건물이 도청을 총지휘하고 있으며 요즘은 음성인식시스템까지 도입해 '불순'용어만 통화중에 튀어나와도 내용분석까지 가능하다고.

평민당 김대중총재도 지난달 전자통신연구소에서 기자들과 만나 "안기부에 황색 도청센터가 있다"고 주장했다.

도청을 뒷받침해주는 또하나의 사실은 김정길의원(민주)이 최근 국회에서 있은 통신공사에 대한 감사에서 밝힌 '가입자선로 집중운용보전시스템'(LCR)이다.

김의원은 블랙박스와 마찬가지로 전자 통신연구소에 의해 개발돼 서울시내 광장 아현 행당 등 3개 전화국에 설치된 LCR도 도청장비의 의혹이 짙다고 주장, 이를 철거하라고 요구. LCR은 올해 말까지 구로 영등포 영동전화국에 설치될 예정이다. 이 시스템은 원래 가입자의 전화고장신고를 받아 자동으로 통화상태를 점검, 수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된 것이나 블랙박스의 실체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도청을 위한 것임을 발견하게 됐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김정길의원이 입수해 공개한 이 시스템의 규격서에는 이 장비가 "단순한 키조작으로 외부에 설치된 녹음기에 접속되어 통화내용을 녹음할 수 있어야 한다"고 되어 있다. 김의원은 "정보화시대에 필수적인 신제품의 발명과 개발은 인간생활에 유용성과 편의성을 제공하지만 오용되거나 특히 독재권력에 의해 악용되는 경우 모든 국민이 감시당하고 제약받는 공포의 사회가 되고 말 것"이라면서 "첨단정보기술의 악용방지 대책으로 정부로부터 독립된 가칭 '정보통신기술용 민간 심의기구'를 설치하라"고 주장했다.

과학자의 양심이 시험대에

꼬리를 물고 연이어 제기되고 있는 도청의혹 속에 국민은 먼 미래의 일로만 생각되었던 조지 오웰의 1984년이 바로 코앞에 닥쳐 온 것이 아니냐 하는 우려와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이와 함께 이번 국정감사를 계기로 모든 사실이 밝혀져 안심하고 전화를 할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번 도청시비를 둘러싸고 제기된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 문제는 앞으로 발전하는 과학 기술이 인간을 힘든 노동에서 해방시켜 주게 될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권력이 인간을 감시 억압하는 도구로 이용되도록 내버려둘지를 결정하는 열쇠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교훈을 던져준다고 하겠다. 과학기술자들은 단순히 주어진 연구과제를 수행해 나가는 단순기능인이 아니라 자신이 개발한 것이 어떻게 쓰일지 그리고 일단 개발된 연구 성과가 악용되고나 있지 않은지 감시하는 책임까지도 국민으로부터 요구받고 있다.
 

국정감사에서 「X-프로젝트 」팀장인 강철희박사가 의원들의 질의에 성실히 답변하겠다고 선서하고 있다.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블랙박스」

항공기사고의 원인을 규명하는 열쇠가 되는 것으로 알려진 '블랙박스(black box)'가 이번에는 전화도청에 이용됐다는 의혹이 제기돼 일반인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블랙박스는 원래 '어떤 입력(input)을 주면 그에 따른 출력(output)을 내는 장치'를 가리키는 제어공학용어. 그러나 항공기의 자동운항기술이 발전하면서 이에 관한 주요 자료들을 수록한 작은 상자를 흔히 블랙박스라 부르게 됐다. 블랙박스는 검은색이 아니라 보통 표면 색깔이 주황색이거나 노란색이지만 '중요한 상자'라는 의미에서 이렇게 지칭한다.

블랙박스하면 얼른 83년 소련 전투기에 의해 격추된 'KAL기 참사 사건'을 연상하게 된다. 당시 이 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어줄 것으로 기대됐던 블랙박스는 미·소 양국에 의해 치열한 해저수색경쟁이 펼쳐졌지만 아직까지 찾아냈는지조차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블랙박스는 보통 가로 50cm 세로 20cm 높이 11cm 크기의 금속상자로 무게는 11kg 정도. 이 박스는 비행기 뒷부분 화장실 천정부근에 설치된다.

블랙박스는 조종실음성기록장치(CVR)과 비행자료기록장치(FDR) 2가지로 구성된다.

CVR은 조종사가 비행도중 지상 관제소와 하는 교신내용, 조종사들의 대화내용들이 모두 기록된다. 그러나 매30분마다 녹음되기 때문에 사고 전 30분간의 교신내용이 밝혀진다.

FDR에는 사고를 당하기 전 항공기의 속도 고도 자세 방위 등 19종류의 자료가 마그네틱테이프에 수록돼 있다. 이 장치는 비행기의 엔진과 함께 작동되고 멈추도록 돼 있어 승무원이 임의로 변경시킬 수 없고 25시간 간격으로 새 자료가 수록되고 먼저 것은 지워진다.

블랙박스는 불의의 사고를 당했을 때 필요한 것. 그래서 섭씨 1천1백도의 고열에서 30분 견딜 수 있고 자체중량 1백배의 충격에도 부서지지 않도록 제작된다. 또 사고발생시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일정 주파수의 전자음을 25∼30일 동안 발사한다.

이번에 문제가 된 도청장치 '블랙박스'는 엄밀한 의미에서 블랙박스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단지 '은밀히' 설치됐고 용도가 베일에 가려져 있으며 '검은귀(도청)'일 가능성이 크다는 측면에서 블랙박스라 명명했다.

정식명칭이 '비음성통신 전송품질 측정시스템'으로 밝혀진 이 블랙박스는 가로 30cm 세로 40cm 높이 20cm 크기로 각 전화국의 전자교환기실 중앙처리장치(CPU) 캐비닛 뒷부분에 눈에 잘 띄지 않게 설치됐다가 어느날 갑자기 일제히 철거됐다. 과연 이 장치의 용도는 무엇인가.

1989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이재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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