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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철과 송이영. 이 두 17세기 천문학자는 지구회전의 원리를 어떻게 확신하고 정립했을까?

●―예일대학에서 온 편지

1960년 봄이었다. 예일대학 과학사학과에서 한통의 편지가 왔다. 그 학과 프라이스(D.J.Price)교수의 부탁으로 그의 지도로 박사과정을 하고 있던 야기(八木)씨가 쓴 사연이었다.

1936년에 루퍼스(Rufus)의 '한국의 천문학'(Astronomy in Korea)에 조선시대의 한 천문시계에 대한 글이 있다. 그것은 매우 귀중한 유물인데, 6·25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서 살아남아 있는지? 그리고 그 시계에 관한 역사적 자료는 어떤 것이 있는지 조사해달라.
대체로 이런 내용이었다. 편지 말미에는 루퍼스의 논문에는 김성수(金性洙)선생 댁에서 찍은 그 당시의 사진이 실려 있다는 중요한 정보가 쓰여 있었다.

인촌 김성수선생이다. 나는 그렇게 단정하고 인촌선생 댁에 전화를 걸었다. 사모님이 기억을 더듬으면서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한 것으로 알고 있으니 거기에 알아보라는 것이었다. 전화를 했다. 있다. 당장 달려가서 확인하니 1백20cm×98cm×52.3cm 크기의 천문시계였다.

놀라운 일이었다. 나는 그것이 조선시대에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놋쇠로 깎아 만든 정교한 톱니바퀴들, 지금도 움직이는 시계장치와 맑은 종소리, 정확한 지구의가 들어있는 천구의(그 때는 그렇게 보았다). 그것은 정말 대발견이었다.
 

시계의 운행장치 부분


●―기와집 한채 값을 주고

1930년대 초였다고 한다. 인사동 골동 거리에 독특한 시계장치 하나가 리어커에 실려 사줄 사람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고려청자도 이조백자도 훌륭한 그림병풍도 아닌 덩치큰 기기(機器), 궁궐에서 쓰던 건데 귀한것이라며 엄청난 값을 불렀다 한다. 하지만 아무도 사려는 사람이 없었다. 저녁 때가 다돼서, 팔리기는 어렵겠다는 중론이 굳어갈 무렵에 그 물건은 인촌선생의 눈에 띄었다.

기와집 한채 값이었다고 한다. 작고한 화산서림 이성의씨가 당시를 회고하여 내게 1960년대에 남긴 증언이다. 그 당시 그런 종류의 인기없는 골동품을 그 값에 사들이는 어수룩한(?) 사람이 김성수선생 말고 또 있었겠느냐면서, 우리 나라 과학문화재의 슬픈 역사를 우리는 같이 애석해 했다.

많은 과학문화재들이 우리의 무관심 속에 유실되고 해외로 흘러나갔기 때문이다. 그런시기에 인촌선생이 그렇게 큰 돈으로 천문시계를 사서 집에 보존하다가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했다는 사실은 나라사랑의 큰 뜻을 몸소 실천한 일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이런 천문시계는 지금 전 세계에 하나 밖에 없다. 동양과 서양의 천문시계의 역사가 이 기기 속에서 하나로 조화되어 그대로 살아 있다. 다른 어느 나라에도 없는 조선식 특징을 그대로 간직한 시계장치가, 그 전통이 이 유물 속에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죠셉 니이덤(Needham)은 그의 저서 '중국의 과학문명' 4권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이처럼 풍부한 내용을 갖춘 장치는 그 전체를 복원하여 적당한 역사적 해설을 붙여서 세계의 주요한 과학기술사 박물관에 전시하는 것이 좋겠다."

실제로 미국 스미소니언 기술사박물관은 1960년대 말 이 천문시계의 특별전시를 계획하고 정밀 실측 및 복제품 제작을 제의해 온일이 있었다.

영국에서는 니이덤과 콤브릿지(J.Combridge)가 1962년부터 필자의 협조를 받아 시계장치에 대한 기계공학적 연구를 수행했다. 이 연구는 기술사(史) 학자들에게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1962년 일본에서 발표된 나의 한국과학사에 대한 첫 논문이 이 천문시계의 연구였던 것은 그런 학문적 인연에서 비롯된 것이다.
몇개월에 걸친 조사연구 결과, 이 천문시계는 1669년에 천문교수(天文敎授) 송이영(宋以頴)이 만든 것임을 밝혀냈다.
큰 수확이었다. '조선왕조실록'과 '증보문헌비고' 등 조선시대 1차사료는 우리에게 새로운 사실들을 말해 주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 것에 대해서 너무도 모르고 있다. 한국 전통과학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고 올바른 평가를 내려야 하는 일은 민족이니 애국이니 하는 것 이전에 학문적으로 마땅히 선행되어야 할 일인 것이다.

지난날에 일본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소극적인 평가와 부정적 해석에서 파생된 그릇된 인식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되었다. 외국인들이 높이 평가하는 우리의 과학 유물을 우리가 모르고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1985년, 송이영의 혼천시계는 국보 2백30호로 지정되었다.

인촌이 아무도 돌보려 하지 않던 이상한 '골동품'을 큰 돈을 내어 보존한지 실로 반세기만의 일이었다.
17세기 한국의 혼천시계(渾天時計). 서울의 천문시계

세계의 과학기술사 학계에서 이젠 널리 쓰이고 있는 이 천문시계의 학문적 이름이 정착되기까지의 사연은 마치 우리의 전통과학이 겪은 발자취를 압축한 것과도 같다.
그만큼 어려웠다는 얘기다.


시패와 작동장치^국보 2백30호,송이영의 혼천시계(1669년).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임진란 후 일시 끊겨

'세종실록' 제 60권, 세종15년(1433년) 6월초 9일의 기사를 인용해 본다.
정초(鄭招) 박연(朴堧) 김진(金鎭)등이 새로 만든 혼천의(渾天儀)를 올리다.

간결한 기사다. 언제 누가 무엇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썼을 뿐,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지 않다. 혼천의라 했으면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사관(史官)들은 판단했는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면, 그 구조와 기계장치는 세종 때의 천문학자들에겐 일반적인 것이며, 만드는데도 그렇게 어려울 것이 없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세종 때 만든 천문시계는 그후 여러 번 수리하면서 1백여년 동안 잘 써내려 왔다. 고장이 나거나 수리하는 동안에는 여볼로 만들어 놓은 것을 썼다. 물론 가끔 새로 만들어 낡은 것과 대체했다.

관상감과 홍문관의 학자들은 천문시계를 늘 다루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임진왜란으로 천문기기들이 모두 불타 없어지자 오랫동안 혼천시계를 만들지 못했다.

다시 만들게 된 것은 1659년(효종8)에 이르러서 였다. 그러나 그것은 별로 정밀하지 못했다. 그 문제점을 해결한 사람이 천문학교수 이민철(李敏哲)과 송이영(宋以頴)이었다. 1644년(현종5)의 일이다. 이리하여 거의 1세기 동안이나 끊겼던 세종 때의 천문시계의 전통이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

1669년(현종10)에 새 천문시계 제작의 사명이 이민철과 송이영에게 주어졌다. 그들은 2개의 천문시계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이민철의 것은 물레바퀴를 동력으로한 전통적인 방식의 모델이었다. 송이영의 것은 이른바 자명종의 원리에 의한, 즉 추를 동력으로한 장치로 전혀 새로운 모델이었다. 그들은 혼천의 부분도 개량, 지구의를 그 중심에 설치했다.

'증보문헌비고' 에는 새 모델에 대한 비교적 자세한 설명이 기록되어 있다. 그 시계장치 부분에 대한 설명을 일부 인용해 보자.
물항아리를 널판 뚜껑 위에다 설치하고 물이 구멍을 통해서 흘러내려 통 안에 있는 작은 항아리에 흘러들어가 번갈아 채워져 바퀴를 쳐서 돌리게 됩니다. 또 그옆에 톱니바퀴를 설치하고, 겸하여 방울이 굴러내리는 길을 만들어서 시간을 알리고 종을 치는 기관이 되게 하였습니다. 송이영이 만든 혼천의도 모양이 역시 서로 같으나 물항아리를 쓰지 않습니다. 서양의 자명종의 톱니바퀴가 서로 물고 돌아가는 격식을 확대한 것으로 해와 달의 운행과 시간이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이민철의 혼천시계는 세종대 이래의 제작기술 축적이 바탕이 되어 이룩된 것이다. 이민철은 여기에 몇가지 특색있는 개량을 했다. 물레바퀴로 움직이는 시계장치와 시간을 알리는 타종장치 등을 개량한 것이다.

●―동서양의 전통을 묶어

송이영의 혼천시계는 '현종실록'에 기록된 대로 '서양식 자명종의 원리'를 이용한 금속제 기계시계 장치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 송시영의 혼천시계는 동서양과 한국의 천문시계의 전통을 하나로 융합시킨 '도가니'가 되었다. 세계에 하나 밖에 없는 창조적인 모델. 이것이 송이영의 천문시계를 평가하는 기술사가들의 말이다.

1669년에 완성된 송이영의 천문시계는 조선시대 문헌에 혼천의(渾天儀) 선기옥형(璿璣玉衡)등의 이름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이것을 혼천시계라는 절충된 용어로 부르기도 한다. 앞에서 말했지만 이 천문시계는 지금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잘 보존되어 있다. 상태도 훌륭해서 조금만 수리하면 곧 움직일 수 있다. 이 시계는 길이 약 1백20cm, 주요 부분 높이 약 98cm, 폭 약 52.3cm 크기의 나무궤속에 들어 있다. 혼천의의 직경은 약 40cm이고 그 중심에 위치한 지구의의 직경은 약 8.9cm이다. 이 천문시계는 시계장치와 혼천의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타종장치를 움직이는 톱니바퀴 부분


●―24개의 쇠공으로

시계장치는 두 개의 추(錘)의 운동에 의하여 움직인다. 하나는 시각을 위한 바퀴와 톱니바퀴들을 회전시킨다.
시각은 원반형 톱니바퀴에 붙은 수직축의 바퀴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바퀴가 회전하는 것은 창문을 통해서 볼 수 있도록 했다. 그 바퀴에는 12시패가 붙어 있는데 이 시패가 시각마다 창문에 나타나게 되어 있다.

다른 하나의 추는 시간을 알리는 타종장치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타종장치는 또 여러 개의 쇠공(金鈴)으로 조절된다. 즉 24개 ('증보문헌비고'의 기록에 의하면 이민철의 모델은 비둘기 알만한 것, 24개라고 한다) 의 쇠공이 영도(鈴道)를 굴러내려 가면서 쇠망치를 걸리게 하여 종을 치도록 되어 있다. 이 메커니즘은 회전바퀴에 붙은 페달에 의하여 쇠공들이 들어 올려지게 됨으로써 반복된다.

이 시계장치의 바퀴들과 톱니바퀴들은 놋쇠로 깎아 만들었다. 톱니바퀴는 그 당시의 시계장치 중에서는 가장 앞선 기능의 것이있다. 또 서양 자명종의 원리를 이용하였다고는 하지만 서양시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여러 가지 형태의 바퀴들과 제어장치들이 있다. 이는 이 시계가 독특한 형식의 장치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계장치와 여러 개의 톱니바퀴에 의하여 연결된 혼천의는 육합의(六合儀) 삼신의(三辰儀) 그리고 지구의의 세 부분으로 되어있다.
육합의는 6방위기점(基點)의 콤퍼넌트, 즉 수평면의 동서남북과 천정(天頂) 천저(天底)를 정하는 장치이다.
육합의 안에 있는 삼신의에는 12궁(宮)24절기(節氣)와 28수(宿)가 새겨져 있다. 또 3백60등분된 황도단환(黃道單環)과 27개의 못으로 분할하여 28수를 나타낸 백도단(白道單環)으로 되어 있다.

지구의는 남북극을 축으로 하여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데, 17세기 서양 지리학의 성과를 모두 담고 있는 최신의 것이다.
송이영의 이 천문시계는 홍문관에 설치, 학자들이 정확한 시간을 측정하고 천체의 운행을 알아보는데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학자들의 천문학에 대한 지식은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다. 따라서 이 천문시계는 선비들의 천문학 교육용으로도 활용되었다. 그들은 또 이시계에서 정밀기계 장치에 대한 실험적 지식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 시계는 17세기에 가장 앞선 정밀기계 장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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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09월 과학동아 정보

  • 전상운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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