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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통치와 한국의 과학발전

거의 제자리걸음한 한세대

우리는 오늘날 세계 중진국중에서도 선두를 달리고 있는 신흥공업국가로 부상했다. 불과 40여년 전만해도 가난한 농업국가로 출발했던 우리가 이제 선진공업국에 공산품을 수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반도체를 포함한 몇몇 첨단분야에서는 그들과 경쟁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44년전 일제 식민지의 굴레에서 풀려날 때 우리의 공업기반은 불과 몇개의 방직공장을 주축으로 하는 경공업시설이 전부여서 참으로 보잘것 없는 수준이었다. 일제가 남기고 간 몇몇 중공업시설은 북한 땅에 있었다. 더욱이 건국한 뒤 2년도 못되어 일어난 한국전쟁으로 전국토는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오늘의 결실은 한국전쟁이 끝난후 잿더미에서 새로 출발하여 우리 스스로의 노력과 슬기로 이루어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36년간의 일제 식민통치가 우리민족의 과학기술진흥의 길을 그렇게까지 철저하게 봉쇄하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우리의 근대국가 건설은 훨씬 앞당길 수 있었을 것이라고 비쳐지는 것이기도 하다.

과학인력 양성을 원천봉쇄

과학기술은 전문적인 교육과 훈련을 받은 적정한 수의 과학자와 기술자 없이는 할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과학기술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우선 사람을 양성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1920년대초 이땅에는 ‘민립대학(民立大學)’ 설립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나갔다. 민립대학 기성회는 3단계 사업계획을 세웠는데 제1단계는 법·문·경제·이과등 4부를 설치하고 제2단계는 공과, 그리고 제 3단계는 의과와 농과를 두기로 했다.

그런데 이 민립대학이 가장 초점을 둔 것은 과학기술자의 양성이었다. “우리가 교육의 필요성을 외치고 대학의 설립을 부르짖는 것도 그 이유의 80%는 과학지식의 보급과 과학자의 산출을 바라기 때문이다”(동아일보 1923년 9월25일자 사설)는 논조에서 볼 수 있듯이 민립대학설립의 주요한 목표는 과학기술자양성이었다고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당시 이땅에는 관립계의 과학기술관련 고등교육기관으로서 1916년 설립된 경성공업전문학교 후신인 경성고등공업학교, 1918년 설립된 수원농림전문학교의 후신인 수원고등농림학교, 1916년 설립된 경성의학전문학교, 1919년 설립된 조선약학교등이 있었으나 모두 일본인 학생을 위주로 개설한 학교여서 한국학생은 여짬으로 덧붙이기에 지나지 않았다(안동혁박사 회고록).

일제는 우리의 민립대학설립운동이 본격화되자 이것을 봉쇄하기 위해 경성제국대학을 서둘러 설립하기로 하고 1924년에는 예과를 그리고 1926년에는 법문학부를 개설했다. 그런데 경성제대가 이공학부를 개설한 것은 그로부터 15년뒤인 1941년이었다. 이것은 1928년 문을 연 또 하나의 식민지 제국대학인 대북제대(대만)가 수학과 물리학만 제외하고는 이공계 학과를 고루 갖춘 이농학부를 갖추고 개교한 것과는 좋은 대조가 된다. 경성제대 이공학부는 중일전쟁으로 심각한 공과계인력의 부족현상이 생기지 않았다면 개설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일제가 이땅에 설립한 제국대학에 이공계학과 개설을 늦춘 이유중의 하나는 한국인 인재가 그나마 바늘구멍 같이 좁은 기회를 통해서라도 이공계로 진출하는 것을 봉쇄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발명학회가 펴낸「과학조선」창간호(1933.6)
 

사상배경까지 들춘 입학시험

이런 생각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사실은 일제에 이땅의 관립 이공계 고등교육기관에 한국인학생의 입학을 교묘하게 제한함으로써 한국인 과학기술인력의 양성을 철저하게 봉쇄했다는 것이다. 이 결과 경성고등공업학교의 경우 1918~1945년간 모두 28회에 걸쳐 2천여명의 졸업생을 냈으나 이중에서 한국인학생은 약 5분의 1인 4백52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 방법은 교활하기 그지 없었다. 이들은 입학정원의 2배수를 1차로 뽑은 뒤 그중에서 우선 일본인학생으로 정원의 3분의 2를 메우고 나머지 자리를 한국인 학생에게 기회를 주었다. 일제는 한국인 학생들이 일본인 지원자보다 성적이 아무리 우수하다고 해도 낙방시킬 구실을 얼마든지 만들어 냈다. 한국인학생의 사상적배경을 들먹거릴 수도 있고 면접시험이나 신체검사의 결과를 마음대로 편리한 방향으로 조작할 수도 있었다. 가장 간교한 방법은 한국인들의 성적을 전체적으로 떨어뜨리기 위해 일본인들만 이해할 수 있는 매우 까다로운 일본어시험문제를 출제하는 방법이었다.

이리하여 일제 식민지 36년간 이땅의 관공립고등교육기관에서 배출된 한국인 이공계 고급인력은 경성제대 77명, 경성공전(또는 고공) 4백52명, 경성광전 49명 등 모두 6백명을 넘지 못했다.

1945년 경성제대 이공학부, 경성공전 및 경성광전에서 배출된 한국인 졸업생수는 모두 29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같은 해 일본은 제국대학 공과계졸업생만도 2천8백96명이나 되었고 전문학교까지 합치면 1만명에 이르는 이공계 고급인력을 배출했다.

일제 식민당국은 한국인의 이공계고등교육기관의 입학을 원천적으로 봉쇄했을 뿐 아니라 졸업한 뒤에도 이공계출신 고급인력의 기를 꺾기 위해 취직의 문을 좁혔고 간신히 취직한 사람에게도 일인과의 극심한 차별대우를 했다. 이른바 좋은 자리는 모두 일본인에게 배정했을 뿐 아니라 이들에게는 특별수당과 사택료를 지급함으로써 같은 대학을 나와 함께 같은 직장에 취직을 해도 일본인의 봉급은 한국인의 2배나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이공계교육기관의 대대적인 확장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의 과학기술계 진출이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광복을 찾은 우리에게는 연구를 할 수 있는 수준의 과학기술자수가 고자 1백명을 조금 넘을 정도였다.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의「과학의 날」포스터
 

생산보다 생활에

조선총독부 식민지정책의 기조는 한민족을 ‘생산방법’보다는 ‘생활하는 방법’에 치중하는 민족으로 전락시켜 영원히 그들의 예속밑에 두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과학기술교육정책은 일본인을 위한 고급과학기술자 양성에 주력하는 반면 한국인의 과학기술계진출에 온갖 제동을 걸었다. 1924년 경성제대를 설립한 뒤 17년간이나 이공학부를 개설하지 않는 이유를“원래 한국인은 법률, 경제 등 정치방면에는 관심이 많으나 이·농·공등 자연과학방면은 극히 소홀한 때문”이라는 구실을 내세우다가 마침내 자기들의 전쟁목적 수행을 위해서 어쩔 수 없게 되자 개설하게 된 것이다.

한편 총독부의 초·중등학교 과학교육시책도 한국인과 일본인학교간에 커다란 차별을 두었다. 우리 민족교육기관인 보통학교(국민학교)에서는 이과교육을, 남녀고등보통학교(중고교)에서는 물리학 화학 생리위생학 및 수학을 가르치기는 했으나 실험실습시설이 거의 없는 상태여서 과학교육의 효과는 기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한국인학생들은 시험을 위해 과학의 원리나 수학의 공리를 암송하지만 시험때만 넘기면 잊어 버리고 진정으로 과학에 대한 이해와 흥미를 지속적으로 갖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러나 일본인학교의 경우는 초중등을 막론하고 상당한 수준의 실험실습시설을 고루 갖추고 있었다.

정구충박사의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한국인 학생교육기관중 가장 높은 수준이었던 경성고등보통학교에서도 “대수의 경우 2차 방정식을 푸는 공식조차 가르치지 않았고 영어는 상과지망생에 한해 2학년부터 1주일에 2시간씩 가르쳤다. 그래서 상급학교 진학에서 영어시험 때문에 많은 곤란을 겪었다··· 이렇듯 일제는 유능한 인재를 모아놓고는 일본인학교에 비해 너무나 열등한 교육내용으로 식민지교육정책을 추진해 나갔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런 암담함 여건에서 일제하의 우리 민족이 내세울만한 과학기술분야의 연구업적은 많지 않다. 다만 한국인 과학자들이 비교적 많이 진출한 의학분야에서는 주목할만한 업적이 여럿 나왔다. 그중에서도 윤일선이 이영춘, 최성장등과 함께 연구한 ‘알레르기에 대한 실험적 연구’, 최동의 ‘법의학적으로 조선인혈형과 기생충학적으로 조선인 피낭 아메바환자의 통계학적고안’은 높은 평가를 받은 업적이었다.

한편 생물학분야에서도 비교적 많은 연구업적이 나왔다. 그중에는 장형두의 ‘조선식물소보’(1935), 이덕봉의 ‘조선특산식물의 연구조사’(1937), 정문기의 ‘조선산해태’(1935), 박만규의 ‘조선산식충식물’(1930), 조백현의 ‘조선야생식물의 식품가치’(1937), 현신규의 ‘소나무와 산나무의 일광조사와 토양등 외부요인에 대한 발육상태와 실험보고’(1937)등이 내세울만하다.

지하자원수탈 노린 지질조사

일제하의 이땅의 지질학연구와 지하자원조사는 거의 일본인 전문가들에 의해 수행됐다. 이러한 배경에는 이 분야의 우리 전문가가 없었다는 이유도 있겠으나 일본이 이땅의 지하자원을 수탈하기 위한 저의를 들어 낸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10년 한일합병이래 일본은 한국의 지하자원을 수탈하기 위해 일본지질학자들을 시켜 한국지질조사연구를 본격적으로 개시했다. 1918년 총독부예하에 지질조사소를 설치한 일제는 1920년부터 1934년까지 그들의 많은 지질전문가들을 동원하여 남북한 전역에 걸쳐 5만 분의 1 도폭(図幅) 지질조사연구를 하여 모두 61매의 도폭지질도를 완성했다.

한편 일제하의 과학기술교육에서 연희전문학교의 수 물학과와 이과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연희전문은 전문학교이기는 했으나 우리나라 최초의 수물학과 응용화학과 농과를 가졌을 뿐 아니라 이곳에서 배출된 졸업생(1919~1945년간 2백73명)들은 주로 중등학교의 수학 물리 화학 생물교사로서 후배양성에 이바지했다. 이들은 암흑기에 우리나라 과학의 싹을 꾸준히 키움으로써 한국과학의 저변을 확대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연희전문은 공립인 경성공전이나 경성광전과는 달리 거의 모든 학생이 한국인이었고 미국선교계의 교육기관 이어서 베커 밀러 언더우드를 포함하여 많은 미국인 교수들이 서구식교수법으로 수업했기 때문에 과학교육의 서구화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과학대중화운동의 횃불

그러나 이런 동토와 같은 일제하 우리의 과학기술계에서 특기할 사건은 1930년대에 전개된 과학대중화운동이었다. 이 운동의 모체가 된 발명학회는 과학교사들과 발명가들의 모임이었는데, 당초 발명에 대한 사회의 인식과 지원을 호소하려는데서 출발한 이 운동은 과학지식보급회를 설립하면서 마침내는 국민을 대상으로한 과학대중화 운동으로 번져 나갔다. 이 운동은 서울에 본부를 두고 지방 주요도시에 지회를 둔 전국적인 규모를 갖고 과학도서의 편찬을 비롯하여 자연과 학교수법의 연구, 과학주간행사, 강연회, 좌담회, 실험회, 이동과학 보급대, 전람회견학단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분야의 활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의 하일라이트는 4월19일을 전후한 과학주간행사였다. 찰즈 다윈의 기일인 4월19일을‘과학의 날’로 설정하고 해마다 전개된 이 행사는 서울을 비롯하여 평양 개성 김천 원산등지에서 거행되었다. 서울의 경우는 자동차행진 기념강연회 과학영화상영회 과학기술관련 견학회등을 대대적으로 펼쳐 일반시민들의 과학에 관한 관심과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이런 운동의 경비는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등 민족언론사들과 과학지식보급회장인 이인의 개인재산 그리고 민족 기업과 단체의 출연금으로 충당했다.

이 운동이 과학지식보급을 통해 우리민족의 역량을 가꾸어서 종국적으로는 일제의 굴레에서 벗어난다는 민족운동의 성격을 띠기 시작하자 일제는 탄압에 나섰다. 1938년 제5회 과학의 날 행사에서 이 운동의 실무책임을 맡은 김용관이 투옥됨으로써 5년간의 과학대중화운동은 중단되고 말았다.

발명붐

30년대의 과학대중화운동은 일제의 탄압으로 좌절되었지만 이 운동이 한창 활발하게 전개되던 무렵인 1935년에는 이땅에 일대 발명붐이 일어났다. 이 해 출원이나 등록된 특허와 실용신안은 이 운동이 일어나기 전의 5배로 늘어났고 심지어는 높은 교도소의 담을 넘어서까지 발명품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일제하 이땅의 사정은 발명품을 기업화하기가 매우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래서 상당한 수준의 발명가들은 발명의 기업화를 위해 해외로 진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예컨대 당시 우리민족의 대표적인 발명가로 알려진 손창식은 그의 37건의 발명고안품중 11건은 일본정부의 특허와 실용신안을 얻고 있었는데 그는 이 발명품의 기업화를 위해 중국 상해로 건너갔으며 결국 그곳 정밀기계창의 공장장 겸 기사로 눌러 앉았다. 당시 소년발명가로 국내에서 이름을 떨쳤던 심승택(전 한국일보 과학부장)도 해외진출을 꿈꾸다가 경유지인 일본 동경에서 일경에게 잡혀 고초를 겪은 뒤 일본에 주저 앉아 ‘비파괴검사법’등을 발명했다.

일제하의 우리 발명가중에는 연희전문을 거쳐 미국 텍사스주립대학을 나온 한글타자기의 발명가 송기주, 미국에서 대학을 나온 뒤 수직비행기의 발명으로 미국정부 특허를 얻은 권영호, 동경고등사범을 거쳐 미국유학을 한 포켓용 사진기의 발명가 송필수를 포함하여 국제수준급의 발명가들도 있었으나 이들의 발명품을 기업화할만한 여건이 국내에서는 되어 있지 않았다.

비중컸던 과학저널

일제 식민지시절 이땅에는 공우(1925) 문명(1925) 신발명(1927) 과학(1929) 백두산(1930) 과학조선(1933) 조선발명계(1937)등 여러 과학잡지들이 뒤를 이어 창간 되었으나 재정이 빈약하고 필자를 얻기 어려워 ‘과학조선’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단명에 그쳤다.

그런데 과학지식보급에 있어서 당시 동광 조선지광 삼천리 신동아 등 일반종합지들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잡지들은 과학평론 과학사설 건강 생활과학에 많은 지면배정을 아끼지 않았다.

신동아의 경우 1933년 5월호는 과학기술기사로 메우다시피하여 ‘과학호’로 펴냈다. 1926년 창간된 종합잡지 ‘동광’은 편집방침의 하나로서 ‘과학의 통속화와 과학과 기술의 획득을 장려하는 것’이라고 명시했다.

한편 일간지들도 과학기사에 대해 매우 큰 비중을 두었다. 예컨대 하루 4면을 발행하던 이 시절의 우리 일간지들은 일요일마다 거르지 않고 한면을 모두 과학란으로 배정했다. 당시 과학에 관한 읽을 만한 책자들이 없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과학정보나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제공하는데 일간지들은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인(위쪽) 김창제(가운데) 김용관(아래쪽)
 

놓쳐버린 기술혁신의 물결

인류사를 되돌아 볼 때 과학기술의 발전에는 몇개의 커다란 물결이 있었다. 기술의 진보는 과거의 성과위에 새로운 업적이 쌓여져 이루어지는 누적적인 것이라고 하지만 기술혁신은 어떤 시기를 두고 일제히 일어나는 이른바‘밴드왜건(band wagon)’의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예컨대 산업혁명이래 대체로 50~60년의 간격을 두고 철도관련기술의 혁신과 전기화학공정 기계기술 혁신의 큰 물결이 일어나 경제는 큰 호황기를 맞았다.

기술혁신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일제식민지로 있던 시절은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1920년대와 30년대를 전후하여 서구를 중심으로 정보이론 원자핵물리 물성물리 고분자화학 양자역학 생명과학 등 새로운 과학이 태동하고 발전하기 시작했다. 40년대부터 이런 이론을 바탕으로 개발된 신기술은 텔레비전 나일론 레이다 제트기 항생물질 액체연료로켓 플라스틱등 대량의 신제품을 쏟아 놓았다. 그래서 이런 기술혁신의 물결은 탄 미국, 서구 및 일본은 엄청난 부를 구가할 수 있게 된 반면 이 물결에서 소외되거나 밀려난 민족이나 국가는 오늘날 후진국이나 개도국이라는 이음으로 뒤떨어져 버렸다.

우리는 일제의 식민지정책에 희생되어 이 중요한 시기를 어쩔 수 없이 놓쳐버렸다. 그러나 광복구 한세대에 걸친 노력으로 이제 수십만의 과학기술인력을 갖추게 되어 다시 찾아 온 기술혁신의 물결에 능동적으로 도전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서고 있다.

우리는 이 중요한 시기를 맞아 특히 기초과학발전을 포함하여 과학 기술진흥에 모든 국력을 쏟아 우리의 후세에게 다시는 후진국이라는 쓰라린 유산을 물려주지 말아야 하겠다.

1989년 08월 과학동아 정보

  • 한원복 과학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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