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인쇄소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서울 을지로일대의 인쇄골목에는 최근 몇년새 풍속도가 바뀌고 있다.
조용히 보이지않게 불어닥친 바람. 그러나 날로 번창해가는 업체와 쇠퇴해가는 업체를 명확하게 갈라 놓고 지나가버린 매서운 바람. 출판인쇄계에‘전자출판’이라는‘제2의 활자혁명’이 몰아치고 있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컴퓨터가 출판과정에 끼어들어 책을 만드는 공정을 크게 변화시켜 버린 것이다. 큰 비중을 차지하던 공정이 하루 아침에 불필요한 과정으로 전락해버린 반면 새로운 작업방식이 필수적으로 부각됐다. 이에따라 컴퓨터를 도입한 업체들은 사세가 확장되고 그렇지못한 업체들은 낙오자의 운명에 처하게 됐다.
출판분야의 전산화는 우선 인력수급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다.
전통적으로 인쇄업계에서는 납으로 된 활자를 뽑아내는 문선(채자)과정과 납활자를 부식시켜 지형을 뜨는 작업이 주축을 이뤄왔다. 이러한 작업은 고도의 숙련을 요구하는 것이어서 보통 10~20년의 경력을 쌓아야 어디가서 한몫 할 수 있는 정도가 된다. 그러나 컴퓨터가 이 과정에 관여하면서 양상은 달라졌다. 글자를 입력시키는 것에서부터 판을 짜는 과정까지를 컴퓨터 화면상에서 처리하게 됨에 따라 숙련공들은 설 땅이 없어지게 됐다. 오히려 컴퓨터자판에 익숙한 타이프실력있는 여성인력이 인기를 끌고 구하기도 어려워졌다.
원고의 집필과 편집과정에서도 변화는 급속히 이뤄지고 있다.
최근 한 통계에 따르면 대학교수 작가 번역자 가운데 약 20% 정도가 퍼스널컴퓨터나 워드프로세서로 원고를 쓰고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책상에 앉아 연신 줄담배를 피워대면서 몇줄 쓰다가는 ‘북’찢어 쓰레기통에 버리고 다시 원고지와 씨름하는 ‘고전적’인 집필광경 대신에 컴퓨터를 앞에 놓고 화면상에서 문장을 마음대로 첨삭하는 장면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컴퓨터로 작성된 디스켓원고는 출판사에서도 환영받는다. 원고를 다시 사식기로 입력 시키는 과정이 생략될 뿐 아니라 필자 자신이 직접 작성했으므로 오자(誤字)가 적어 교정보는 수고를 훨씬 덜 수 있다는 것. 현재 디스켓원고를 활자체만 변경시켜 곧바로 출판해내는 변환프로그램도 등장하고 있다.
전자출판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조판과정의 전산화와 집필및 편집과정의 컴퓨터 이용에서 더 나아가 종이로 된 책 자체를 거부하는 새로운 출판양식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미래의 서점에는 책이 진열돼 있는 것이 아니라 디스켓이나 광디스크 또는 패스워드(password, 컴퓨터에 들어있는 파일을 열어 볼 수 있는 일종의 암호)만을 판매하게 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예측한다.
데스크톱─적은 부수를 신속히
전자출판(electronic publishing)이란 말은 77년 미국 그래픽커뮤니케이션학회에서 ‘윌리엄 딕키스’가 연설 중에서 최초로 사용했다. 이 개념은 학자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나 대체적으로 ‘컴퓨터를 이용해 사진식자를 치고 인쇄물을 생산하는 것’과 ‘컴퓨터및 통신시스팀을 이용하여 사용자에게 전자적으로 데이터를 전달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전자출판은 또 다른 말로 CAP(Computer Aided Publishing)라고 부르기도 한다. 필자는 구체적으로 전자출판을 △데스크톱 출판(DTP) △편집및 조판과정의 전산화(CTS) △디스크책 △화면책의 4가지로 나누어 사용하려고 한다.
데스크톱출판(desktop publishing)은 개인이나 소규모 출판분야에서 퍼스널컴퓨터를 이용해 원고작성에서 부터 편집·인쇄작업까지 일괄적으로 처리하는 형태이다. 최근 퍼스컴이 대중적으로 보급되면서 출판물의 제작도 출판사만의 고유 영역이 아닌 PC사용자라면 누구나 만들어 볼 수 있는 것으로 바뀌고 있다. 즉 책상위의 PC를 이용해 문자 사진 도표 등을 입력시키고 이를 화면상에서 편집하여 레이저프린터로 출력한 다음 사용자가 원하는 부수만큼 인쇄해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DTP는 80년대 중반 미국에서 IBM PC AT기종과 매킨토시기종이 출현하면서 관련 소프트웨어들이 무더기로 쏟아져나와 폭발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도 몇년전까지만 해도 생소하던 이 개념이 최근에는 기업마다 사무실에서 필요한 형태의 출판물을 자체제작하는 방법으로 일대 붐을 이루고 있다. DTP의 장점은 원고입력에서 인쇄까지를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어 신속하게 출판물을 만들수 있고 적은 부수의 책(또는 서류)을 손쉽게 제작해낼 수 있다는 점이다. 기업체에서는 주로 제품의 메뉴얼이나 보고서 논문 등을 이 방식에 의해 인쇄해내고 있다.
데스크톱출판이 성행하게된 것은 PC의 대중화와 함께 레이저프린터및 관련 소프트웨어기술의 향상에 힘입은 바 크다. 일반프린터(도트매트릭스방식)보다 훨씬 다양한 서체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글자체가 활자나 사식 글자와 같이 예쁜 레이저프린터의 등장은 출판물제작을 전문가의 영역에서 아마추어도 도전해볼 수 있는 차원으로 끌어내렸다. 그러나 아직 레이저프린터는 국내에서 대당 3백만원선의 비싼 가격대를 형성해 데스크톱 출판의 확산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고 있다.
컴퓨터기술의 발달로 최근에는 데스크톱보다 크기가 작아 무릎위에 올려놓고 사용할 수 있는 랩톱(laptop)컴퓨터가 출현해 출판분야에도 이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데스크톱 출판은 한마디로 출판사가 아닌 아마추어가 비영리적인 목적으로 손쉽게 책을 만들 수 있는 출판시스팀인 것이다.
출판물제작에 있어서 편집및 조판과정을 표준화하고 전산화하여 온라인(on-line)으로 출판사와 인쇄소, 편집부와 조판부및 인쇄부를 연결한 방식을 CTS시스팀(Computerized Typesetting System)이라고 한다.
CTS─컴퓨터조판
주로 대형출판사나 신문사에서 많은 부수의 출판물(또는 신문)을 제작하는데 쓰이는 방식으로 최근에는 PC를 이용한 보급형시스팀도 출현하고 있다.
조판방식은 납활자를 일일이 사람손으로 찾아서 판을 짜던 전통적인 방식에서 사진식자를 이용하는 방식으로 변화해 왔다. 사식기도 수동사식기에서 최근들어 컴퓨터(전산)사식기로 바뀌었는데 이 전산사식기가 CTS 시스팀의 입력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입력기는 대개 16비트 PC를 하드웨어로 쓰고있다. 여기에 일반 PC보다 더많은 한자와 특수기호를 사용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 그리고 레이아웃(lay out) 프로그램등이 추가된다. 요즘에는 필자 자신이 직접 작성한 디스켓원고를 입력기에서 코드만 바꿔 이용할 수 있는 코드변환프로그램도 나와 원고작성에서 편집까지 바로 연결되기도 한다.
입력기에 의해 입력된 데이터는 인화지 또는 일반 용지로 출력기에서 출력되며 이를 인쇄과정에서 곧바로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책대신에 디스크
미래의 출판물은 반드시 종이로만 이루어 지지 않는다. 들고다니기 무겁고 파손의 위험이 있는 종이책보다는 디스크의 형태를 띠게 되리라는 것이다.
디스크책은 디스켓 CD롬(Compact Disk ROM) 광디스크 등 작은 부피에 보다 많은 정보량을 수록한 것으로 최근 실용화단계에 들어서고 있다.
디스켓형태는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먼저 나타날 가능성이 높은 형태이다. 영어회화테이프나 TV과외비디오테이프처럼 컴퓨터를 이용한 교육(CAI)분야에서 학습물로 상품화 하려는 시도를 몇몇 대형출판사에서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CD롬은 지름 12cm, 두께 1.2mm정도 크기에 종이책 2천4백페이지 분량의 정보를 수록할 수 있다고 한다. 현재 일본에서 60여종이 상품화되어 있는데 암파서점과 후지쓰가 공동제작한 일본어사전 ‘광사원(廣辞苑)’을 비롯, 삼성당의 ‘모범육법’일본출판판매의 ‘도서목록’(약 60만권수록) 등 주로 사전류에 이용되고 있다.
광디스크는 CD롬과 비슷한데 크기가 지름 30cm정도의 대용량이란 점이 다르다. 정보 수록량도 엄청나 광디스크 1장에 약 8억자(2백자 원고지 4백만장)를 기록할 수 있다. 국내에서도 과학기술원 시스템공학센터가 광디스크를 이용한 ‘전자파일링시스팀’을 개발했지만 실용화에는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디스크책에서 더 나아간 출판형태가 화면책이다. 화면책이란 출판사의 대형 하드디스크에 독자가 자신의 퍼스널컴퓨터를 전화선으로 연결하여 컴퓨터화면상에서 내용을 마음대로 읽어볼 수 있게한 것이다. 이때 독자는 언제든지 읽은 내용을 자신의 디스켓에 복사해놓을 수 있다. 독자는 서점에서 책이나 디스켓을 사는 것이 아니라 출판사의 디스크에 접근할 수 있는 패스워드만 구입하면 된다.
전자출판연구회 결성
전자출판이란 개념이 나타난 것은 이제 막 10여년에 불과하다. 더구나 국내에는 2~3년 전부터 출판인쇄계에 전산화의 바람이 불어닥치면서 끝없는 변화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고 있다. 출판계 종사자들이 주체적으로 변화를 주도해가고 있다기보다 갑자기 해외에서 건너온 첨단바람에 떠밀려 생존을 위해 이 변화를 수용하고 있는 측면이 더 강하다.
이러한 위기감과 관심이 고조된 가운데 지난해 3월 출판사 대표와 실무자 17명이 모여 ‘전자출판연구회’를 발족했다. 초대회장에는 탑출판사 대표인 김병희씨.
연구회는 창립취지문에서 ‘우리나라 전자 출판은 아직 걸음마단계로 본격적인 전자출판과는 거리가 있다’고 전제하고 ‘출판의 현대화 과학화 전문화를 위해 전자출판에 관한 정보교환과 조사연구를 통해 이해를 높이는데’그 목적이 있다고 밝혔다.
전자출판연구회는 지난 4월22일 제 2차 정기총회를 열고 2대 회장으로 허창성씨(평화출판사 대표)를 뽑는 등 임원들을 개선했다. 1년동안 회원수는 38명으로 늘어나고 5차례의 연구발표회를 갖는 등 전자출판에 대한 최신 정보의 교류와 인식확산에 주력하고 있다.
출판문화협회가 조사한 ‘출판사의 컴퓨터 보유및 활용현황’에 따르면 지난해말 현재 1백48개 출판사가 컴퓨터를 업무및 편집과정에 활용하고 있으며 현재 발간하고 있는 서적의 절반 정도가 기존의 활판인쇄나 수동식 사식기가 아닌 전산사식기에 의해 제작되고 있다고 한다.
서체개발과 한글코드의 문제점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전자출판, 그러나 우리가 새로운 출판혁명으로 소화해내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너무나 많다.
먼저 전자출판의 발전에 가장 장애물이 되는 것이 한글서체의 개발문제이다. 컴퓨터가 본래 미국에서 개발됐고 현재 하드웨어기술로도 미·일이 가장 앞서있으므로 대형시스팀을 외제품에 의존한다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치자. 그러나 조상이 물려준 가장 아름다운 문자라는 자부심을 갖고있는 한글을 일본에서 글자 1자당 5만원씩 주고 수입한데서야 문화민족의 체면이 서겠는가. 그나마도 컴퓨터에서 이용할 수 있는 글자꼴이 겨우 10여종에 불과해 수백수천 종류에 이르는 영문이나 일본어의 서체에 비해 자유롭게 출판물을 제작하는데 애로를 겪고있는 실정이다.
한글서체의 개발은 출판·인쇄업계의 영세성에 비추어 결코 민간차원에서 이루어지기 힘든 문제이다. 컴퓨터를 도입하는데도 허리가 휘어질 형편인데 수억원씩의 투자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뻔한 사정이다. 한글서체의 개발은 정부차원에서 한글의 미려함과 과학성을 드러낸다는 목적을 갖고 장기적이고도 집중적인 투자가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또하나의 문제는 바로 지난해에 정부가 확정한 ‘2바이트완성형’한글코드가 지닌 불합리성이다.
컴퓨터기종마다 한글코드가 달라 소프트웨어의 호환성이 없어서 정부가 강력한 의지를 발휘해 표준코드를 마련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2바이트완성형은 한글이 가지고있는 우수한 특성을 오히려 저해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완성형이란 컴퓨터가 한글을 인식하는데 있어서 ‘초성+중성+종성’의 순서로 자모 하나씩 인식하는 조합형과는 달리 글자 한자씩 인식하는 방식이다. 이에따라 KS코드에서는 한글 2천3백50자만 표준한글로 채택함으로써 컴퓨터화면상에서 쓸수없는 글자가 생겨나고 말았다. 가령‘뾴뾴한 첼리야빈스키 쐥쐥소리 뮐러’를 컴퓨터에서 표시하면‘한 리야빈스키 소리 러’로 밖에 나타나지 않는다. 즉 ‘뾴 쳴 쐥 뮐’이란 글자는 사용할 수가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초성 중성 종성을 조합하여 표현할 수 있는 한글의 숫자는 약 1만1천자에 달한다.
컴퓨터가 출판과정에 미치고 있는 변화의 과정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퍼스컴을 능숙하게 쓰고 가로쓰기및 한글전용에 익숙한 젊은 세대들은 둔중하고 묵직한 느낌을 주는 활판인쇄보다 경쾌하고 산뜻한 전산사식을 더 선호하게될 것이다. 그리고 컴퓨터기술의 발전은 그림이나 도표, 그래픽 등 영상정보를 출판작업에 응용해내는데 결코 게으르지 않으리라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