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오리엔트문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이 놀라운 유적은 세계 8대 기적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세계박물관협회 제 4차 아시아 태평양지역 총회(금년 3월1일~15일)에 참석하기 위해 처음 중국을 방문했다. 우리 나라의 46배나 되는 중국땅을 밟는 순간, 고고학자로서 남다른 감회가 밀려옴을 느꼈다. 아마도 한국역사 구석구석에 영향을 미쳐온 중국의 역사에 대한 강한 호기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회의에는 한국을 비롯해 북한 일본 태국 소련등 14개국 60여명의 학자가 참석했는데, 무엇보다 중국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유적지를 일반관광객에 비해 조금 더 자세히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방문의 백미는 만리장성과 병마용대군단이었는데, 둘다 진시황이 만든 것이었다. 절대군주의 힘과 수많은 사람들의 땀이 뒤섞여있는 이 유적지 앞에서 형언하기 어려운 기분이 들었음을 숨길 수 없다.
중국의 그 장엄한 역사를 한마디로 이야기한다고 하는 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1만리가 넘는, 약 5천km에 이르는 돌성이 계속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이런 생각에 잠겼다. 역시 중국의 역사는 황토지대의 한(漢)민족과 그 북변의 오랑캐와의 대결의 역사라는 것을 이 엄청난 규모의 장성이 말하여 주는 듯 했다.
달나라를 여행한 한 우주인이 지구를 바라 보았을 때, 만리장성만이 눈에 띄었다고 한다. 인류가 엄청난 규모의 대기념물을 수도없이 건축하여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안에 들어온 유일한 인조물은 이 만리장성 뿐이었던 것이다.
중국역사의 증거물
북경시에서 서북쪽으로 한시간 남짓하게 달려가니 팔달령(八達嶺)산맥의 능선을 따라 축조된 석성(石城)이 그 끝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계속 뻗어 있었다. 이 산능선을 따라 산성을 개미떼처럼 올라가는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 관광객들의 행렬은 가히 장관이었다. 역시 이 장성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성은 춘추시대(BC 700년~400년) 제(齊)나라시대 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후 진시황제가 천하를 통일(전국시대의 마감)하면서 감숙성의 서쪽까지 증축, 그 엄청난 자태를 드러내게 된 것이다. 오늘날의 장성의 모습은 6세기 북제(北齊) 때 만들어진 것을 명나라 때 증축한 것이다.
북변의 흉노족은 중국역대왕조를 늘 위협하여 왔기 때문에 그럴 때마다 이 장성이 튼튼한 방어선이 되어, 중국 역사의 산 증거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세계 8대 기적
서안(西安)에 와서 진시황 지하궁전의 병마군단을 보지 않으면 중국을 여행한 것으로 볼 수 없다.
AD 7세기부터 당나라의 수도였던 서안은 도시 전부가 문화재로 가득하다. 어느 지점에 서서 봐도 웅대한 ‘역사의 숲’ 한가운데 끼어들곤 하는 것이다.
이 서안 시내로부터 동쪽으로 35km 떨어진 지점에는 5백62m²크기의 진시황제릉역안에 작은 산과도 같은 진시황릉이 자리잡고 있다. 무덤주변에는 판자집들이 즐비했다. 이 판자집은 대부분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가게들인데 서쪽 지방답게 모피가 많이 걸려 있었다.
진시황릉의 크기는 동서 5백15m, 남북 4백85m이고 높이 76m의 평면 사각형 무덤이다. 무덤봉분 꼭대기까지 계단이 나 있어서 오르는데 약 15분 정도가 소요되며 주변이 완전한 평지로서 사방 4km(10리) 안에는 아무 것도 없다.
옛날 초왕(楚王) 항우(項羽)가 한(漢)의 유방(劉邦)과 패권을 다툴 때 항우의 병졸들이 이 무덤을 파서 금은보화를 꺼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아직 정식 발굴조사가 안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궁금증만 품게 하고 있다.
진시황은 자기 무덤을 만들고 나서 진나라 적국들의 땅이었던 동쪽에다 자기 사후세계를 지키는 군단을 배치하였다. 살아 있는 병마가 아니라 흙으로 빚은 군인 말 마차 등을 질서정연하게 세워 놓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계 8대 기적중의 하나인 진시황 도용군단(秦始皇 陶俑軍團)이다.
협서(陕西)성 고고연구소의 도움으로 병마용대군단(兵馬俑大軍團)을 발굴한 장본인인 원중일(袁仲一)관장의 안내를 받으며 마용박물관을 둘러보게 된 것이다.
이 진시황병마용박물관은 병마용이 발견된 현장에 거대한 돌을 덮어서 만든 것으로 크기는 세로 2백30m, 가로 62m였다. 지금까지 1만여개가 발견된 병마용대군단은 아직도 발굴이 계속중이다.
야외 병마용박물관에는 고대(古代) 병기마차를 전시한 제1 전시실과 현재 복원 수리중인 동(銅)마차를 전시한 제2 전시실이 있다. 전시실 옆에는 이곳을 방문한 각국 원수들의 기념사진과 증정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프랑스 소련 미국 등의 각국 원수들의 기념사진이 눈에 띄었으며 북한의 김일성으로부터 증정된 장수술병도 나의 눈길을 끌었다.
백골이 매장돼 있다고
중국의 황하와 장강. 이 두개의 하천의 분수령을 이루는 산맥이 있다. 고대에는 진나라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진령(秦嶺)으로 불린다. 진령의 지맥인 여산의 북쪽 산록에 만들어진 거대한 능묘내에서 영원히 잠들어 있는 사람이 중국 최초의 황제인 진시황제(BC 259년~210년)이다 (시황제릉은 여산의 산록에 있기 때문에 여산릉이라고도 불리운다.).
‘천고일제’(千古一帝)로 칭송되었던 이 인물은 살았을 때 용맹을 떨치면서 6개국을 병합, 중국을 통일하였다. 그래서 5세기 이상에 걸친 열국쟁패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또 각국의 문자 화폐 도량형 제도 그리고 마차의 괘폭을 통일하였다. 뿐만아니라 전국에서 노동력을 징용하고 거액의 자재를 소비, 세계적으로 유명한 만리장성을 쌓았다. 고대의 엄청난 서적을 태워(灰燼) 버리고, 유생(儒生) 4백60명을 생매장하였다.
게다가 70만의 인부를 징용하여 아방궁이나 여산릉을 건설하는등 엄청난 사치를 일삼았다. 그 때문에 아직도 진시황릉 주위의 지하에는 층층이 백골이 매장되어 있다고 한다.
사서(史書)의 기록에 의하면, 진시황릉은 높이 50장(丈) (약 1백15.5m) 주변의 길이 2.5km에 이른다. 오늘날의 고증에 의하면, 여산릉의 능원은 한변이 각각 7.5km이고 총면적은 56.25km²이다.
능묘의 깊이는 얼마인가? 전해지는 얘기에 의하면 이 이상은 암석도 깎지 못하고, 등불도 달지 못한다는 지점까지 파들어 갔지만, 진시황은 여기에서 다시 3백장 정도 더 파들어갈 것을 명령하였다고 한다. 진나라 때의 3백장은 현재 6백93m에 해당한다.
능묘의 내부는 이렇게 건설되었을 것이다. 우선 기초로서 거석을 매립하고 용동(溶銅)을 주입, 건물을 단단히 하면서 궁전 누각 대신들의 대기 장소를 건립하였다. 지하궁전의 들보와 기둥은 대부분 동을 주물한 것이다. 또한 궁전전체에 알 수 없을 정도의 보물이 쌓여 있었다고 전한다.
궁전 내부의 도처에 이 제왕의 권력과 위엄이 재현되어 있다. 돔은 천상(天象)의 상징인데, 진주로 태양 달 별을 모방하였다. 지상은 대지의 상징인데 수은으로 강과 바다를 본떴다.
또한 실제의 조당 그대로 백관의 좌위가 서열대로 만들어져 있다. 이곳에도 병마용갱(兵馬俑坑)과 마찬가지로 문무백관의 상(像)들이 놓여 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여산릉은 2/5만 남아
지하궁전의 곳곳에 상야등(常夜燈)이 고정되어 있다. 등유는 사람의 기름이라는 설도 있다. 아마도 그것은 큰 물고기 또는 사람을 모방한 커다란 양초였던 것 같다.
그렇지만 이 신화와 같은 지하궁전은 36년이 걸려서도 준공되지 못했다. 진시황은 중국 동부를 순방하던 중에 병사, 여산에 안장되었다.
진시황이 사망한 다음 해(BC 209년), 중국전역은 다시 전란에 빠졌다. 진왕조는 간신히 3년간 버티다 결국 망하고, 아방궁과 여산릉도 눈깜짝할 사이에 파괴돼 버렸다. 그뒤 다시 여산릉은 역사의 풍우(風雨)에 의해서 침식되고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원래 높이의 2/5에도 미치지 않는 높이 45m의 것 밖에 없다.
결국 역사는 흘러간 것이다. 그렇지만 1974년에 여산의 산록에서 빅 뉴스가 전해져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우연히 우물을 파다가 시황제릉의 동쪽에서 면적 2만km²의 고대 조소(彫塑)의 보고(宝庫)가 발견되고 그곳에 등신대의 천군만마가 살아 있는 것처럼 매장되어 있다는 보도였다.
조사 결과, 매장물은 대강 무사 8천명 군마 6백두 전차 1백25량인 것으로 알려졌다. 마차는 목제(木製), 병마(兵馬)는 도제(陶製)였다.
이 시황제의 지하군단은 질서정연한 군진을 편성, 2200년전 시황제가 6개국을 통일한 당시의 위풍당당한 진군의 강대한 진용을 재현하여 보여주고 있다.
이 센세이셔널한 발견은 20세기에 있어서 고고학상 최대의 수확이며 세계의 기적의 하나라 할 수 있다.
병용
왕조의 흥망의 비밀을 담고 있어
병용(兵俑)은 진시황의 무덤이 위치한 여산릉 조각예술의 진수이다. 군인의 계급과 특과에 따라 장군 무관 갑사(甲士) 궁수 기병 어자(御者)등 여러 조형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 수는 8천여개에 달한다. 병용의 평균 신장은 1.8m로 실제 인물보다 조금 크다. 이 위풍당당한 무사들의 조각품과 그 사이에 드문드문 자리잡은 사두(四頭)전차가 어우러져 군진(軍陣)의 위세를 뽐내고 있다. 그 위용은 보는 것만으로도 전율을 느끼게 하나 곧 감탄을 자아낸다. 아무튼 군용은 세계의 기적으로 칭송되는 진나라 예술의 매력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다고 보아도 좋다.
진나라의 토용(土俑)은 고대 오리엔트의 예술의 보고이며, 동시에 중국 고대문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병법가의 시각에서 보면, 그것은 형상화된 고대의 병법서이며, 이를 통해 군진의 전개상황, 병기의 주조, 갑옷의 제작 등 여러 수수께끼를 해결할 수 있다.
공예가의 시각에서 보면, 그것은 진나라 복식의 전문서적이 된다. 병용(兵俑)은 각종 복장 머리형태 모자 신발 등이 명확하게 규명되어 있어 중국복장사의 공백을 메우게해 준 것이다.
또 인류학자가 본다면 어떨까? 아마도 병용의 표정과 용모의 특징을 통해 진나라 병사의 인종구성과 민족구성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경제사가들은 병용의 장비에서 진나라의 국력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충실했을 것으로 추론한다.
또 역사학자는 군용을 통해 한 왕조의 흥망의 비밀을 보게 된다. 실제로 이 곳을 견학한 사람은 누구라도 독자적인 인상을 받게될 게 분명하다.
마용
진나라의 정예부대로
마용(馬俑)의 발견은 진나라 역사의 연구에 있어서 지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본디 진나라 사람은 말의 사육에 솜씨가 좋은 것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었다. 실제로 ‘진’(秦)이라는 국호도 비자(非子)가 서주(西周)의 효왕(孝王)을 위해 말을 사육한 공으로 진읍(秦邑)을 받은데서 유래한다.
진의 시(始)황제가 6개국을 평정하고 흉노를 내쫓고, 위명을 천하에 떨친 것도 강한 병사와 튼튼한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용에는 사륜마차를 끄는 말도 있고 안장이 있는 기병의 말도 있다. 말 몸체의 평균 높이는 약 1.5m, 몸 길이는 약 2m인데 6백마리 정도가 출토되었다고 한다. 모든 마용이 머리 부분은 단정하고, 등 근육은 강건하며, 가슴은 길고, 네 다리는 힘차고 양 눈은 빛을 발하는 진나라의 명마가 생생하게 재현되어 있다.
말을 타고 다니는 기병은 진나라 병사 중에서 가장 잘 싸우는 정예부대이다. 동시에 그것은 전국시대 후기에 출현한 기동성이 풍부한 새로운 부대였다. 마구에는 이 기병의 위력과 출현시기가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또 안장은 있어도 징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진의 기병이 강건하고, 마술이 정교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동시에 마구가 아직 덜 발달되고 기병도 성숙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발굴과 복원
다시 흙으로 덮을듯
진시황의 토용은 발굴순서에 따라 1호갱(坑), 2호갱, 3호갱으로 이름 붙어졌다. 3호갱 속의 군마는 2천2백년의 동면에서 깨어났을 때 전신이 심한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손발이 여기저기 흩어져서 하나씩 나오고 병사가 손에 쥐고 있던 병기도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그 중에는 수십 내지 수백조각으로 된 병마도 있었다. 목제(木製)의 전차도 대부분 썩어서 잔 파편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고증에 의하면 진왕조의 폭정에 격노한 봉기군이 여산릉(驪山陵)을 깡그리 태워버리고 이 지하군영도 파손시켰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재 진시황 병마용박물관의 큰 홀에는 1천여명의 무사가 서 있다. 또 30여필의 군마가 먼지를 털어내고 전시되어 있다. 목제 전차의 일부도 복제되어 어느 정도 본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아직도 미미한 성과이지만, 이것에만도 그럭저럭 10여년의 세월이 소비되었다. 만약 8천여명의 무사, 6백여필의 군마, 1백여대의 전차를 전부 발굴, 복원하려면, 그 작업은 몇년이 걸릴지 기약할 수 없다.
그래서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이미 발굴된 기마용(俑)을 도면으로 하여 사진을 찍은 뒤, 다시 황토를 덮어 역사의 유적을 지하에 보존하려고 계획하고 있다. 좀더 과학이 발달되고 발굴기술이 세련되어질 후대의 연구가에게 복원작업을 맡기기로 한 것이다. 발굴에 있어서나 매립에 있어서나 어느 경우든 그 목적은 이 역사적인 유물을 가장 잘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청동마차
8마리의 준마가 이끌어
2명의 관리, 8마리의 준마, 2대의 마차는 모두 청동제 유물이다. 여기에는 황금 장식이 7백47개, 백은 장식이 8백17개가 달려 있다. 이 유물들은 몇 년 전 여산릉의 서측 20m지점, 깊이 약 6.7m의 황토 속에서 발견되었다. 발견될 당시에는 심하게 파손돼 있었지만, 2년여에 걸쳐 복원작업을 편 결과 이 예술품은 지난날의 모습을 일부 보여주고 있다.
복원된 청동 마차의 제원은 다음과 같다. 마차의 길이는 3.284m, 모양의 凸자형을 한 전후 2실로 나뉘어져 있다. 4개의 벽도 훌륭한 모양을 갖추고 있다. 창과 문이 달려 있고, 보온과 통기가 가능하다.
2명의 관리의 자세는 모두 단정하고 엄숙하다. 1명은 서있고 1명은 앉아 있다. 2대의 마차는 모두 8마리의 준마를 달고 있다.
말의 높이는 평균 0.66m, 길이는 약 1.12m이다. 시황제의 준마는 사서에 7마리의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추풍(追風), 백토(白兔) 등이다. 그 이름에서도 천리를 달리는 준마라는 것을 느껴진다.
시황제는 마차에 올라 준마를 한줄로 묶어 놓고 5번이나 대해(大海)와 태산을 달렸다고 전해진다. 이 동으로 만든 마차는 당시 만리를 달리는 마차와 준마를 모델로 만들어진 것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