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쉽고 무난한 약국 돈벌이보다 의료혜택에서 소외된 가난한 주민들을 찾아나섰다."
'지난 가을'. 잊을 수 없는 그 귀엽던 꼬마는 지금쯤 유치원을 다니는 재롱동이가 되어 있겠지.
그러니까 3년 전의 일이다. 노동자들이 많이 거주하는 경기도 부천시 약대동. 나는 어느 제약회사에 근무하면서 약대동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고, 근처에 있는 새롬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그 교회에 친하게 지내던 교우가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바로 세살박이 지가을이다. 막내동이인 가을이는 정말 예쁘고 귀여운 말썽꾸러기였다.
그런데 어느날 가을이 한테 이상한 증세가 발견되었다. 다른 또마들과 뛰어놀다 보면 손가락과 입술이 파랗게 되고 숨을 가쁘게 쉬며 곧 잠이 빠져버리는 것이었다. 부천 세종병원에서 진찰을 받다본 결과 '심실중격결손'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의료보험을 적용해도 약 2백만원의 수술비가 드는 병이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가을이네 집으로서는 새세대심장재단 등에 알아볼 수밖에 없었지만,수술을 기다리고 있는 환자가 많아서 오랜 시일이 걸리는데다 여러가지 복잡한 심사를 거쳐야 한다는 대답이었다. 할수없이 막노동을 하던 가을이 아빠가 조그만 회사에 취직해서 의료보험증을 발급받고, 2백50만원짜리 전세방을 사글세방으로 옮기고서야 가을이를 수술대에 올릴 수 있었다. 가을이 아빠와 나는 병원벤치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착잡한 심정으로 가을이의 완쾌를 빌 뿐이었다.
●- 가난한 자의 약국
이제 가을이는 건강한 모습을 찾았다. 그러나 그집 4식구는 몇 년째 살던 전세방을 잃었다. 앞으로 몇 년은 더 벌어야 전세방을 한칸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또다시 가을이네 가족에게 어떤 질병이나 사고가 닥친다면 어떻게 될까? 가난한 사람은 돈이 없으면 병원에도 못가고 아파서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인가? 어떻게든 돈을 모아 치료비를 지출하고 나면 더욱 가난해져야 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건강문제. 이를 단순히 돈없는 탓으로 돌리기엔 너무나 가혹했다.
새삼 의료보장제도의 필요성이 절실히 느껴지던 때였다. '의료보장'하면 말그대로 사회보장 잘되는 돈많은 나라에서나 실시되는 제도이지, 우리와 같은 현실에서는 약사인 내 자신마저 무기력함을 절감했다.
대한민국 헌법에는 모든 국민이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가 있다고 적혀있고 국가는 사회보장 사회복지를 실시할 의무가 있다고 되어 있다.
국민의 건강권을 지켜주기 의한 제도가 의료보장제도이다. 의료보장제도란 인간인 이상 돈이 없어도 생명과 건강의 유지에 필료한 의료비를 사회적으로 조달해 주는 제도이다. 국민의 의료문제를 개개인의 경제적인 능력에 맡겨두지 말고 가난한 서민들도 돈걱정하지 않고 건강한 신체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의료보호와 의료보험이 있긴 하지만 시행과정에서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더구나 의료공급급체계 또한 어떠한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국공립병원 보건소 등 공공의료기관은 우리나라 전체 의료기관의 20%에 불과하다. 나머지 80%의 병·의원은 민간이 운영하므로 의료를 돈으로 팔고 사는 것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또 의료기관의 86%가 도시지역에 몰려 있다고 한다.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 도시에 많이 살기 때문이다. 벌이가 잘 되는 도시에서 개업을 많이 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환자의 60%가 질병에 걸려서 제일 먼저 찾아가는 곳이 약국이라고 하는데, 의료기관의 상업성과 이윤추구의 면에 있어서는 약국도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가난한 사람들이 건강문제는 누가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먼저 국가의 의료보장제도가 사회복지 차원에서 정의롭게 확대 실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의료공급 체계도 공공의료기관의 수를 늘리는 한편 의료기관의 사적소유에서 의료를 공개념화하는 방향으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의사 약사 등 보건의료인들이 기득권에 집착하지 말고 고통받는 환자들의 편에 서는 결단이 해결을 위한 출발점이리라.
●- 지역주민들 속으로
나는 빈곤과 질병, 제도와 현실에 대한 고민 끝에 제약회사를 그만 두고 약국을 개업하기로 마음먹었다. 기존 약국들의 잘못된 점과 한계점을 극복하고 주민들을 직접 대하면서 건강사회를 향한 실천의 장이 될 수 있는 약국(나는 이러한 약국을 '지역약국'이라 명명했다)을 열기 위한 준비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의 건강문제를 주로 다룬 한국의 의료현실에 관한 자료들과 도시빈민의 주거 교육문제 공해문제 산업재해 직업병 등에 관한 여러 자료들을 보며 나의 짧은 식견을 메꾸어 나갔다.
그러는 한편 나는 뜻을 같이하는 '건강사회실현약사협의회'(약칭 건약) 소속동료들과 지역약국 설정을 위한 구체적인 공동작업에 들어갔다.
건약은 88년초 민주화를 열망하는 진보적이고 양심적인 약사들이 모여 총체보건 확립과 약사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결성한 모임이다. 건약은 내게 혼자가 아닌 더불어 일하는 터전을 마련해 준 모태가 된 셈이다.
이러한 준비과정 속에서 설정된 지역이 성남이었고, 마침내 지난해 7월 2일 2·3공단 입구에 '열린약국'이라는 간판을 걸고 문을 열었다. 성남은 다른 지역에 비해 유동인구가 비교적 적은 편이고 지역생활권이 형성되어 있으며 전국 60개 도시 중에서 빈민이 제일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7월 1일부터 실시되는 전국민 의료보험 적용 인구가 전국민의 63.1%로 전국에서 1위). 막상 약국문을 열였지만 드동안 생각한 바를 현실에 적용시키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다. 먼저 약국일지부터 작성하기로 했다.
○월 ○일
조제료가 천원이니까 주민들이 의아해 하는 눈치. '약값이 싸니 싼 약만 쓰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 '좋은 약을 쓰면서도 돈을 조금 받는 것은 기존 약국의 많은 이윤을 주민들에게 돌려드리는 것'이라고 홍보했지만 역부족인 것 같다.
○월 ○일
알림판에 붙어 있는 의료보험조합 대책위 신문과 소식지, AIDS 추방의 논란 스티커를 훑어본 주민들은 아직 낯선 느낌을 많이 받나 보다. 혹시 지역주민들과의 신뢰 형성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도 된다. 하지만 가끔 함께 논의를 해보자고 관심을 표명한 주민도 있었다.
○월 ○일
문을 닫으려고 하는데 공장에 다니는 한 아주머니가 야근으로 지금 막 끝났다며 들어왔다. 양말공장의 나쁜 작업환경으로 기관지가 많이 상한 편이었다. 약을 받아 나가면서 "내가 짠 양말이에요"하며 양말 두 켤레를 건네준다. 주민에게서 받은 첫 선물이었다.
○월 ○일
몇년간 심장판막증으로 고생하면서도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던 옥경이 아빠가 간신히 의료보호카드를 만들었다고 한다. 인하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받던 중 혈액이 모자라 지역주민들과 긴급히 연락을 취해 다행히 성공적으로 수술을 마쳤다. 이제 겨우 동네 주민들에 도움을 주는 약사가 된 듯히다.
●- 노동과 건강
짧게나마 약국일지를 작성하며 느낀 점은 인내였다. 나의 목적의식처럼 현실이 빨리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어느정도 예상했었지만 그 이상으로 어려웠다. 우리 사회 속에 뿌리박힌 기존의 의료관행과 약사로보다 약장수로만 보려는 사람들의 불신, 지역에서 같이 일할 동료들의 부족, 쪼개어 써도 부족한 시간적 여유 등 수없이 많았다.
거듭되는 어려움 속에서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항상 내편에서 먼저 지쳤다.
약국을 찾는 환자들은 대개 불편한 상태로 들어서게 된다. 우선 몸이 불편해서, 혹은 병원에 가야 할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돈이 부족하거나 큰 병이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 때문에 짜증난 얼굴로 들어돈다. 이렇게 얼굴이 마주치면 대부분 환자들은 식이 영양 금기 등 환자 자신이 기울여야 할 노력에 대한 나의 설명을 귀찮아 했다. 오히려 다짜고짜 무슨 병이냐고 물으며 정확하지도 않은 의학상식으로 자신이 결정해 버린 질병을 확인받고자 했다. 대개 이러한 경우 자신의 질병을 확대 해석하기 일쑤이다.
더 힘든 경우는 자신이 약값 약종류까지 결정하고 올 때이다. 부작용이 많은 약이거나 환자에게 중독증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경우, 아무리 그 약에 대해 설명하여도 이러한 약이 주는 싼값이기 때문에 다른 비싼 약을 팔려고 하는 줄 알거나, 이제까지 먹어도 별 이상 없었다는 식의 과신으로 귀기울이질 않았다. 그러다 보니 내가 먼저 환자를 불신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날 지치게 만드는 일상 속에서도 내게 보람을 안겨주는 일도 없지 않았다. 주로 야학이나 노동조합 지역 탁아소 자모들을 대상을 건강교육을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올 때이다. 건강하게 살 권리와 우리가 질병에 걸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서로 이야기하다 보면 오히려 내 자신이 배우게 되는 점도 많았다.
이들과 건강의 중요성과 병의 원인 병을 이기는 방법에 대해 얘기를 나누다 보면 자연스레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곤 했다. "건강이 중요한 것은 살아남기 위해서 만이 아니다. 육체가 건강하지 않으면 정신 또한 건강하지 않으며, 아무리 굳은 생각과 굳은 의지를 갖고 있는 사람도 육체가 생각대로 의지대로 움직여 주지 않으면 어떤 일을 다부지게 과감하게 실천하지 못한다."
만남이 거듭될수록 열악한 근로환경과 사회적 환경 등에 관심이 옮겨져 금년 7월부터 시행되는 의료보험에 대한 문제도 거론되었다. 전국민 의료보험 실시는 보험료의 불평등 부과로 인해 출발과정에서부터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기존 조합주의 방식의 잘못된 점을 밝혀내고 어떻게 하면 환자의 입장에서 진정한 의료보장을 만들어내느냐가 관건이다.
이를 위해 의료 혜택에서 이제껏 소외되어 왔던 노점상인들과 일용 노동자들의 단체인 성남 노점상연합회와 복정동 일용노동조합, 그리고 성남지역의 16개 단체가 합심하여 전국에서 도시지역으로는 최초로 '성남 의료보험 대책위원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대책위는 지난 3월 임시국회에서 여야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지만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부딪쳐 국회 재심의에 부쳐진 새 '국민의료보험법'을 지지하고 그 내용을 알리는 소식지 '성남건강'을 만들어 배포하는 한편, 의료보험 문제에 관한 간담회와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또한 새 국민의료보험법 쟁취대회와 평화대행진, 그리고 서명운동 등으로 열심히 활동했지만 애쓴 보람도 없이 새 국민의료보험법은 국회에서 폐기되고 말았다. 지난해 1월부터 실시된 농어촌지역 의료보험은 농어민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현재도 보험료 거부운동이 계속되고 있다. 현행 법대로 도시지역 의료보험이 시행되었을 때 도시지역 주민의 반응은 어떠할지 궁금하다. 두고볼 일이다.
건강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자신이 할수 있는 일, 사회(정부의 복지정책)가 당연히 해 주어야 되는 일, 우리들이 협력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지킬 것은 지키고 찾을 것은 찾고 닫힌 것은 열어제껴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일이 우리 모두의 일임을 알나낸 중요한 계기가 이때 이루어졌다.
●- 작은 걸음마
열린약국이 문을 연 지 벌써 1년이 가까워온다.
"인간은 누구나 건강하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열린약국은 가난한 이웃, 가장 건강해야 할 일하는 사람들, 고통받는 환자의 입장에서 열려 있고자 합니다. 질병으로부터의 아픔도, 아플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모순도, 우리의 마음도, 닫혀 있는 통일의 문까지도 활짝 열어갑시다. 사회의 구조와 사람의 행위가 인간에게 진정 이익이 되는 건강한 사회를 열어가는 열린약국이 되고자 합니다."
개업 안내문을 읽다보니 어설프고 쑥스러움이 앞선다.
건강사회를 열기 위한 작은 걸음마도 나의 경직된 포부가 앞서다 보니, 무던히 기다리고 부대껴내는 융통성이 부족하여 뒤돌아 보면 잘한 일보다 반성해할 일이 더 많다. 아직 지역약국이라고 떳떳하게 부르기에는 너무나 미약한 '열린약국'이지만 얖으로 무수히 새로 태어날 지역약국의 발판이라도 되었으면···
○월 ○일
양심적으로 거둔 수익은 양심적이고 실천적인 일에 선뜻 쓸 수 있으나, 사기와 거짓으로 번 돈은 자기 배불리는 데 쓰이기 쉽다. 내가 좋은 일에 돈쓰기를 꺼려하는 마음이 들면 뒤돌아 서서 양심에 가책된 일이 있나 생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