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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은 과학과 정보이고 힘의 뿌리는 자유"

중국민주화의 기수 천체물리학자 방여지는 어떤 사람인가

서구적 가치와 제도를 주장하면서 중국체제의 전면적인 개혁을 주장


그는 서구적 가치와 제도를 주장하면서 중국체제의 전면적인 개혁을 주장한다.

"과학자의 사회적 작용은 단지 기술이나 지식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속한 전체사회의 발전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므로 현실 사회의 부조리 현상을 보고만 있어서는 안된다"

중국의 천체물리학자 방여지(方勵之·Fang Lizhi)박사의 주장이다. 그의 이런 주장은 중국의 민주화를 강력히 요구하는 지식인 문화인 학생들의 이론적 지주가 되어 왔다. 그래서 서방세계의 언론은 그에게 '중국의 사하로프'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는 북경에서 1936년에 태어났다. 2살 때 어머니로부터 문자교육을 받았을 정도로 총명했고 16세 때인 1952년 북경대학 물리학과에 진학했다.

북경대학을 졸업한 그는 중국 과학원 물리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이때 모택동이 '백화제방 백가쟁명'(百花齊放 百家爭鳴·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주장을 펴라는 뜻)운동을 벌였는데 방여지도 이때 동료들과 함께 '과학과 민주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요지의 주장을 중공당 중앙에 보내려다 사전에 좌절되었다. 이 때부터 중국의 현실이 그를 과학자로서만 가만있지 않게 했다.

1958년에 중국과학기술대학이 설립되자 반우파투쟁 당시 비판 받았던 중국과학원 연구원 30명과 함께 이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1966년에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우파로 지목되어 비판을 받고 대학에서 추방당했다. 그후 노동개조수용소에 수용되어 농장일과 광산노동자 일을 했다.

이때 그는 평소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던 상대성이론에 대해 틈이 나는대로 연구해 뒷날 연구원으로 다시 복귀했을 때 세계의 관심을 끈 논문을 준비했다.

작달만한 키에 굵고 검은 안경테가 인상적인 그는 79년에 중국에서 가장 어린 나이로 정교수 자격을 취득했으며 중국화학아카데미 최연소 정회원으로 선발되었다. 그리고 로마대학 케임브리지 대학 일본 쿄토대학 등의 초빙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또 87년 4월에는 이탈리아 트리에스테에서 열린 국제 물리학 심포지엄에도 참석했다.

1984년 안휘성합비시의 과학기술대학 부총장이 되었을 때 그는 평소 주장했던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학교 운영방침에 반영시켰다.
학교에서 뿐만 아니라 일반 군중에게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연을 통해 "청년들이 자유와 인권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해야하며 역사적 사명감을 느껴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는 "중국의 사회발전, 특히 사회적 사고의 변화를 위해서는 중국사회가 외부를 향해 개방되어야 한다" "오늘날의 사회에서 가장 생산적인 힘은 바로 과학적 지식과 정보이고 이런 힘은 대학의 민주화와 자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했다.
88년5월4일 북경대학 창립 90주년 기념식에 교우로서 참석했던 그는 이 자리에서 "중국이 낙후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서구의 과학 기술 문화 정치 도덕을 받아들이고 소유제도도 서구화애햐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끊임없이 도전했다. 금년 1월6일에는 반체제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는 공개서한을 등소평에게 보냈다. 이 사건은 한달 뒤 북경의 지식인고 저명작가 등 33명이 방여지의 요구를 지지한다는 공개서한을 전국 인민대회(의회)상무위와 당 중앙위에 보내는 사태로 이어졌고 드디어 5월의 천안문광장 대규모 시위로 발전되었다.

방여지는 6월4일의 '북경의 대학살' 이후 피신해 있으면서도 AP와의 인터뷰를 통해 "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 등은 중국보다 훨씬 민주화가 진척되어 발전을 계속하고 있다. 그렇게 많은 학생과 시민이 천안문광장에 모여 목청을 높인 것은 등소평과 같은 구세대가 물러가고 민주화를 이루자는 국민의 뜻을 나타낸 것이다" 라고 말했다.

이시대의 중국을 과학으로 구출하려는 물리학자 방여지의 뜻이 이루어질 것인가?

1989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 동아일보사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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