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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제대로 모르고 반항심에서 입문했다. 과학은 99% 알면 모르는 것과 같다는 정신으로···


서울대 계산통계학과 김수화 학생


인간의 기쁨은 확률과 여러모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 커트라인선에서 불과 한두 점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합격한 사람의 기쁨은, 넉넉한 점수로 충분히 합격한 사람보다 몇배 큰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연필을 굴려 모르던 문제를 맞췄을 때의 쾌감이란 시험을 쳐 본 사람이면 누구나 경험해 본 일이다.

어는 날 뜻하지 않게 우연히 맺은 인연은 쉽사지 지워지지 않는다. 우리는 꽤나 우연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우연적인, 다시 말해서 확률상 발생 가능성이 희박한 일이 주어졌을 때 주인공은 신의 은총을 느끼게 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연을 몹시 거부하는 모습도 보인다. 그렇게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우연성이라고는 발 디딜 틈조차 없는 과학이란 학문을 인간이 생애를 바쳐 추구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우연히 일어난 사건에 대해 과학은 항상 인과법칙에 따른 필연성을 추구한다. 우연이건, 필연이건, 통계학에서는 모든 사건의 발생 가능성을 0과 1 사이의 작은 수치로 나타낸다. 소수점 이하의 작은 수값에 따라, 흔히 말하는 우연과 필연이 결정되는 것.

●- 학과선택과 반항

통계학 하면 먼저, 딱딱하다는 느낌과 골치 아픈 숫자가 먼저 연상된다. 적어도 내가 이 과를 선택할 때의 느낌이 그러했다. 그러나 그러한 특성이 오히려 나를 이끈 매력이기도 했다.

어떤 일의 논리적 전개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일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생긴다. 너무나 많은 우연의 소지들이 불안을 가중시키는 것이다. 문득 어렸을 때 읽은 동화 '솔로몬의 동굴'이 생각난다. 우연한 월식으로 인해 야단 법석을 떨던 원주민의 모습들. 아마도 우연의 달콤함 보다도 그에 따른 불안이 더 크기 때문에 인간은 과학을 하는 것이 아닐까?

통계를 숫자놀음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에게 있어서의 통계는 명확성의 의미로 받아들여 졌다.

학력고사 수학시럼에서 꼭 한 문제 틀렸다. 다름아닌 맨 마지막의 통계문제였다.

나의 고약한 특성 중의 하나는 남들이 어렵고 싫어하는 일에 되레 흥미를 느낀다는 점이다. 어렵고 힘든 일일수록 비례적으로 강한 승부욕을 느끼는 것이다. 고등학교 때 이과를 택하게 된 동기도 그 때문이었다. 수학과 과학 등 이과과목이 하기에 고생스럽다는 사실이 반항적 성격이었던 나에게 일종의 도전심을 심어주었다. 사실 수학과 자연과학에 흥미를 느낀 것은 대학에 들어와서부터였다.

그러나 자연과학이라는 학문이 내게 그리 쉽게 다가오진 않았다. 입시 위주의 평이했던 고등학교 공부와는 달리, 갑자기 깊고 넓어진 곳에서 한참을 허우적대야만 했던 것이다. 암기위주의 공부는 오히려 방해가 되었다. 새삼스레 우둔한 머리가 야속하게 느껴졌고 적성이 맞지 않는가하고 고민도 많이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이유가 나의 노력 부족때문 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고등학교 때 과학과목은 화학을 빼고는 모두 좋아했다. 물리는 유형별로 묶어 그 개념을 이해했더니 무척 재미있는 과목이 되었다. 사람은 좋아하는 것은 잘하게 마련인데 별다른 이유없이 싫어했던 화학은 역시 점수가 나빴다. 반면 지구과학은 참 좋아했다. 특히 기상과 은하계에 대해서 큰 매력을 느꼈다. 그래서 대학에 들어와서는 천체와 우주등에 관해 혼자 공부하기도 한다. 이는 지구과학 선생님이 대학 강의식으로 가르쳤고 교과서 외의 넓은 내용으로 지도, 사고의 폭을 넓혀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호기심이 풍부한 동물이다. 자연과학은 이러한 우리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너무나 많은 것을 지니고 있다. 자연과학이 갖고 있는 무궁무진한 내용들. 진리들, 폭 좁은 시험공부에 얽매였던 고등학교 당시에는 자연과학에 대해 잘못 생각했던 점이 너무도 많았던 것이다.
대학에 입학한 후 처음에는 누구나 가치관의 혼란을 경험한다. 그대에 어긋나게 펼쳐지는 현실과 조화를 이루기 어렵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또 이제까지 묻어두었던 자신의 존재의미, 가치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더이상 고립적인 작은 나만일 수 없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사회라는 큰 유기조직 속의 한 부분으로서 스스로를 새로이 세워야 했던 것이다.

멀찌감치 바라 본 사회는 나만의 가치가 절대적인 수 없는 다(多)가치 사회였다. 우선 타인을 인정해야 했다. 또 스스로를 지켜가기 위해선 추구해야 할 뚜렷한 가치가 필요했다. 고등학교 때에 갈망했던 대학의 '보랏빛'도 선뜻 내 앞에 나타나주질 않았다

인문과학은 인문과학대로, 사회과학은 또 그 나름대로 각기 절대적 진리와 가치를 내세우고 있었다. 절대적 진리를 특정 학문만이 가르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나는 자연과학만이 갖는 일부 특수성을 무척 사랑한다. 쉽게 변하지 않는 불변성과 논리성, 합리성, 객관성, 엄밀성 등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또 세상 물욕과 떨어져 있는 순수한 학문내용은 그것을 공부하는 나 자신을 자랑스럽게 느끼게 해준다.

우리가 추구하는 진리는 결코 인간과 유리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현대 사회의 소외가 거론될 때, 그 원인 중의 하나로 과학이 꼭 거론되고 있다. 아마도 과학의 논리성이나 엄밀성 탓이리라.

흔히 문과생은 로맨틱하고 여유있는데 반해, 이과생은 딱딱하고 까다롭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논리적 필연성을 추구하면서도 우연적인 일에 오히려 큰 기쁨을 느낌을 생각해 보면 수긍이 가는 말이다.

●- 99%의 답은 0점

나의 계산통계학과는 계산학분야와 통계학분야, 둘로 나뉜다. 계산학은 컴퓨터의 소프트웨어 쪽을 공부한다. 세분하면 프로그래밍, 스위치이론, 컴파일러, 오퍼레이팅 시스팀, 인공지능 등의 내용을 배우는 것.

나는 대학에 들어와서야 처음으로 컴퓨터를 대했다. 그래서인지 컴퓨터 앞에 앉으면 수줍은 소녀처럼 어쩔줄 모르고 당황하기만 했다. 한번은 프로그램 숙제를 하느라 12시간 동안이나 씨름한 적이 있다. 쉼표를 찍어야할 곳에 마침표를 해서 에러(error)가 난 것을 알았을 땐, 융통성 없는 컴퓨터가 한없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문과생에게 있어서 95%의 답은 1백점이지만, 이과생에게 99%의 답은 0점이란 말을 절실히 느꼈다.

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엄밀하고 정확한 자연과학의 매력이었다. 하지만 때론 이 매력이 식을 때도 있었다. 정확만이 '전부'가 아님을 안 것이다.

자연과학을 공부하면서 항상 따라 다니던 것이 종교의 문제였다. 성질상 전혀 성격을 달리하는 두 문제가 서로 배타적인 것 같으면서도, 결코 어느 한족도 무시할 수 없는 문제로 남았다.

현대인의 소외의 책임중에는 과학만능주의가 깔려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또 과학이 가장 멀리해야 할 '맹목적 추종'이 아직 위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신처럼 전능한 존재라면 굳이 확률이나 통계가 필요없을 것이다. 신은 적어도 내일 비가 올 확율이 30%라는 식의 일기예보는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인간은 그리 정교하지도 정확하지도 못하다. 우리 중의 한 학자는 동전의 앞면이 나올 확률이 0.5%임을 확인하기 위해 수만번 동전을 던졌다. 또 동전의 회전은 역학법칙을 따르므로 물리수식을 활용, 확률을 계산해내기도 했다.

하지만 확률은 확률일 뿐이다. 반드시 맞을 수는 없다는 말과 같다. 따라서 과학에의 '맹목적 추종'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이를 막기 위해 우선 과학과 종교가 만나야 한다. 예전에 복권추첨에 당선된 사람이 1백만 분의 1이라는 당첨확률을 계산하기 앞서 먼저 감사기도를 드리는 광경을 본 적이 있다. 그는 '왜 그렇게 작은 확률의 행운이 나에게 떨어져야만 했는가'란 해답을 통계학 책에서는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선 기도부터 했을 것이다.

1988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김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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