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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화학의 세계, 수시로 바뀌어 온 관심분야

서울대 박준우 교수


●―우연히 택한 화학자의 길

우리는 흔히 위인전에서 후세에 큰 영향을 남긴 사람들이 어릴 적부터 자신이 추구할 인생의 목표를 미리 설정하고 이의 달성을 위해 부단히 노력한 입지전적 경우를 접하게 된다.

그러나 보다 많은 평범한 사람들은 앞으로 전개될 상황이나 앞길이 어떨지 미리 예견하지 못하며, 단지 그때 그때의 주어진 상황에 따라 자신의 생의 방향을 새롭게 설정하고 그전의 것을 수정 또는 포기하게 된다. 나의 경우도 후자에 속한다.

나는 지금은 누구나가 공업도시로 그 지명을 알고 있으나, 30년 전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에게 생소한 울산의 변두리인 병영(당시는 울산군 하상면)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중학을 마친 후, 1962년에 부산의 경남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고등학교 1학년까지는 나 자신이 장래에 어떤 분야에서 어떤 직업을 가질지를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설문지에 장래 희망을 적는 난이 있을 때는 가끔 '작가'라고 적은 기억이 난다. 시골에서 중학을 마친 것에 연유된지는 알 수 없으나, 국어와 영어보다는 수학과 과학의 성적이 좋았다. 따라서 2학년 진급시 자연계와 인문계를 나눌 때 극히 자연스럽게 자연계를 선택하게 됐다.

고3진급시 진학희망대학을 선정할 때 당시로는 크게 인기가 있었던 서울공대를 선택하였으며, 과학선택과목에서 물리와 화학을 선택했다(당시의 대학입시제도는 지금과 달리 대학별 출제였으며, 대부분 대학에 국어 영어 수학 그리고 사회와 과학에서 한과목씩 모두 다섯과목을 보았으나 서울공대는 과학에서 두과목을 보았음).

공대에 진학하겠다는 나의 계획은 3학년 여름방학 즈음에 변경되었다. 5·16 혁명 직후인 당시에는 국토개발 특히 농촌개발에 큰 관심이 쏠렸고, 이에 따라 농촌지도자가 각광받게 되었다. 나 자신이 농촌출신이며, 국민의 대다수가 농민이라는 사실이 나의 의식속 깊숙이 자리잡기 시작했으며, 나아가 대학졸업후 농촌에서 농민과 함께 일하며 농촌의 발전을 통해 국가발전에 기여하겠다는 꿈으로 승화되었다.

이에 따라 희망대학은 농대로 바뀌었고 과학과목에서 물리를 포기했다. 농대로 진학하고 후일 농촌지도자가 되겠다는 나의 생각은 대학입학원서를 적는 순간까지 지속될만큼 굳은 것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대학입학후 학비를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라는 현실적인 면에서의 우려가 증대되었다. 가정교사를 하면서 대학을 다녀야 할 형편인 나에게는 서울농대가 수원에 위치한다는 것이 여간 마음에 걸리는 게 아니었다.
입학원서를 넣으면서 담임선생님이 "농대 농학과지?" 하실 때 이 우려는 나에게 절박한 현실문제로 나타났으며, 이는 "문리대 화학과입니다"라는 거의 무의식적 대답으로 나타났다. 나의 화학전공은 이렇게 우연히 이루어졌다.

내가 농학을 포기한 것은 앞서의 현실적 문제가 큰 이유였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많은 학문중 화학을 스스럼없이 무의식적으로 선택하게 된 것은 화학을 가르치셨던 이형수선생님께서 수업중 가끔 소개하신 '전기를 통하는 플라스틱'(25년후인 지금에야 실용화가 시도되는 전도성 고분자), '하늘의 비행기는 녹이는 레이저'(요즘 별들의 전쟁에서 언급됨) 등 교과서에서 언급되지 않는 새롭게 전개되는 화학의 발전과 이의 신비로움에 크게 매료된 때문으로 생각된다.

●―부부가 함께 미국유학

4년간의 대학 화학과 생활은 가정교사와 실험, 그리고 거의 매주 치뤄지는 시험 등으로 빠르게 지났다.

이 과정에서 화학전반에 대한 기초지식을 터득하게 되었으며, 화학이 얼마나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는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보다 깊이있는 공부를 위해 대학원 진학을 바랐으나, 대학원은 입학만 하고는 곧바로 군복무를 위해 휴학했다.

전반적인 화학보다는 특정한 세부분야의 화학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3년여의 해군 의정장교 시절이다. 이 기간에는 해군병리연구소의 생화학실과 국군군의학교 등에 근무하면서 질병의 진단과 관련된 소변검사 혈액검사 등 임상화학에 대한 공부와 일을 했다.

이런 일은 대학에서 구체적으로 취급된 적은 거의 없었으나, 기본적인 화학지식으로 큰 어려움이 없이 원만히 수행할 수 있었다. 군복무를 하면서 나는 같은 대학 같은 과 2년 후배와 결혼을 하고, 우리의 장래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계획을 구상하게 되었다.

3년3개월의 군복무후 대학원에 복학하여 공부를 계속하겠다는 당초의 생각은 제대를 불과 몇달 앞둔 어느 날 아내가 가져온 한 정보에 의해 크게 수정됐다. 이 정보는 미국 필라델피아에 위치하는 '템플'대학 화학과에서 한국인 유학생을 원하며, (그 대학에는 서울대 화학과 교수를 역임하신 김순경교수가 계셨음) 부부가 동시에 입할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소식이었다.

다시 가정교사를 하면서 국내에서 대학원 2년을 하여 석사학위를 받기보다는 그곳에서 장학금을 받아 보다 편하게 공부하고 4년 정도에 박사학위까지 받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우기 3년여의 군복무가 학문에 대한 공백기간으로 여겨지자, 이를 보충하기 위해서도 하루빨리 외국유학을 해야겠다는 충동이 일어났다. 템플에서의 대학원 입학허가는 단지 우리의 성적표와 우리가 영어로 의사 소통이 가능하다는 외국인 편지 한 통만으로 전격적으로 얻어졌다.

템플대 화학과는 결코 우리나라에 잘 알려진 소위 말하는 명문대학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대학원 학생에게 (조교를 하는 경우) 등록금이 면제되고 생활에 필요한 장학금이 주어지며, 당시의 국내대학보다 월등히 좋은 연구시설이 마련되어 있었다. 아내는 유기화학을 전공으로 택했고, 나는 이론화학을 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론화학을 하겠다는 나의 유학초기의 계획은 책상에 앉아 몇시간씩 복잡한 수학관계식을 유도하고 깊이 사고하는 것을 감내하지 못하는 나의 천성적 단점과, 학위취득후 직장을 얻는데 실험화학보다는 어려움이 많다는 주위의 조언으로 인해 대학원 생활 1년만에 실험물리화학 전공으로 수정되고 말았다.

나의 박사학위 연구과제는 최근의 휴대용 TV 화면이나 전자시계 또는 계산기의 숫자판 등에 사용되는 액정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전자기기에 사용하는데 요구되는 보다 바람직한 특성을 갖는 액정의 조성, 전기장 및 자기장에서의 액정의 변형에 대한 컴퓨터 시뮬레이션, 그리고 액정상에서의 화학반응 등 비교적 넓은 범위에 걸쳐 연구를 해나갔다.

액정의 응용과 관련된 연구를 수행하면서, 한편으로는 이와는 다소 거리가 먼 생물계의 생명현상 원리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키워나갔다. 생명계의 많은 부분은 액정상태와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어 액정의 연구과정에서 얻은 지식과 개념은 이들 연구에 용이하게 적용될 수 있으리라 짐작했다. 또한 생명현상에 대한 물리적 내지 물리화학적 접근은 아직도 초보적 단계에 있으니 한번 이 분야에 대한 연구를 해보겠다는 욕구도 일어났다.

●―화학연구소에서의 연구생활

4년 조금 안되는 기간에 아내와 나는 박사과정을 끝내고 보스턴에서 연구원 생활을 시작했다. 아내는 MIT에서, 그리고 나는 '눈(Eye)연구소'에서 다당류의 생물물리화학적 면에서의 연구를 수행하게 됐다. 주된 연구대상은 눈의 유리체와 관절활액 등에 많이 존재하는 하아루론산(최근 고급화장품에 노화방지제(?)로 첨가되는 물질)과 혈액의 항응고작용을 나타내는 헤파린의 여러가지 물리화학적 특성이었다. 이때 익히고 연구한 내용은 귀국후 대우재단의 후원으로 '뮤코다당류의 생화학 및 생물리학'이라는 저서로 연결되었다.

박사학위를 받고 1~2년의 연구원 생활을 거치면 영구적인 직장을 구하는 것이 화학분야의 통례이다. 이때 외국유학생들의 고민은 '귀국할 것인가, 남을 것인가'와 '어디에 영구적인 직장이 있으며, 외국에 남는다면 영주권이 확보될 것인가'하는 것들이다. 우리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연구소에서는 보다 오랫동안 남아서 근무해주기를 희망했으나, 동양인에 대한 차별대우가 있는 미국땅보다는 귀국을 해서 우리나라의 화학발전에 기여하는 것이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당시의 여건으로는 대학보다는 연구환경과 보수가 좋을 것으로 여겨지는 화학연구소를 택했다.

6년 남짓한 미국유학생활에서 우리 가족은 연구실에서의 실험, 논문작성 등으로 단 사흘도 연속적으로 휴식한 적이 없었다. 귀국길에 미국의 서부와 하와이에서 며칠씩 보내면서 미국을 구경했을 뿐이다.

화학연구소는 주로 기업에서 필요한 연구를 수탁하여 수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대학원과 연구원 과정에서 연구한 액정과 다당류가 산업계에 응용성이 크기는 하였으나 당시의 국내 경제규모로는 수요가 적어 연구소에서 연구할 대상이 되지 못했다.

따라서 보다 경제규모가 크고 생산으로 직결되는 것을 연구대상으로 택해야만 했다. 건전지에 관한 연구, 전자공업에서 도전 재료로 사용하는 귀금속을 값싼 금속으로 대체하는 연구(이는 1979년의 귀금속 특히 은값의 세계적인 폭등으로 연구필요성이 지대해졌으나, 연구종료시에는 은값의 하락과 전자부품의 소형화로 실제활용성이 줄어들었다) 등이 3년간 연구소에서 수행한 주된 테마였다.

나의 화학에서의 세부적인 연구분야의 변화는 1981년 직장을 대학으로 옮기면서 다시 한번 일어났다. 1980년도에 단행된 연구소의 통폐합은 연구소라는 직장의 안정성에 대해 회의를 안겨주었다. 또 연구결과가 산업계에 바로 활용되어야 한다는 부담감(이들은 최근 국책연구로 많이 감소되었다) 등이 이화여대에서 교수직을 제공했을 때 쾌히 승낙한 이유가 되었으리라 여겨진다.

이화여대에서의 나의 연구는 계면활성제와 이온성 고분자 등의 콜로이드성 용액에서의 여러가지 물리화학적 연구가 주된 내용이다. 이들 연구는 주로 태양에너지 전환과 관련되어 이루어지나, 대학원시절부터 생각해온 생물물리학, 그리고 생명계가 보여주는 신비하고 정교한 화학적 특성을 실험실에서 모방하고 흉내내어 실용적 화학에 응용하는 생체모방화학의 면도 많이 내포되어 있다.

●―화학의 다양한 연구분야

돌이켜보면 화학을 전공하기 시작한 이래 나는 한가지 분야에만 관심을 갖고 이를 깊게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보다는 관심분야를 수시로 바꾸어왔다. 이는 한가지에 만족하고 이에 몰두하지 못하는 나의 성격에서 비롯된 것 같다. 그러나 이같은 변화를 가능케 한 것은 화학이라는 학문의 특성이다.

화학은 물질의 성질과 물질의 변화(물리적 및 화학적 변화)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어떠한 물질계도 화학의 연구대상이 된다. 다른 어떤 학문보다도 화학은 다른 분야의 학문에 접미어로 연결되어 사용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이를 증명한다. 농화학 약화학 생리화학 식품화학 물리화학 생물화학 환경화학 핵화학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 다양한 화학분야는 비록 이들의 대상물질과 연구목적에는 차이가 날지라도 동일한 원리와 법칙이 적용된다. 다만 주어진 시대의 상황과 요청에 따라 어떤 물질계가, 즉 어떤 분야의 화학이 보다 많은 확심을 끌기도 하고 보다 덜 관심을 끌기도 할 따름이다. 인간이 물질과 더불어 생활하고, 물질을 보다 유용하게 활용(또는 보다 덜 유해하게 사용)하고, 새로운 특성을 갖는 물질을 만들어내 이용할 필요가 있는 한 화학은 존재하고 또 발전할 것이다.

겉보기로는 화학과 무관한, 현대산업의 중추적 지위를 차지하는 전자공업도 반도체 물질을 제조하고 이를 정밀가공하는 화학의 터전위에서 가능하며, 보다 발전된 전자공업은 이에 필요한 전자재료를 취급하는 화학적 기술의 발전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우리나라 공업은 선진외국의 그것과는 상당한 격차가 있었으며, 화학산업은 주로 경제규모가 큰 석유화학 비료 섬유 등에 치중하다시피 했다. 또 소량이나 고가인 많은 산업원자재와 부품은 해외에서 수입되었다. 따라서 기초적 성격이 강한 화학은 산업기술과는 큰 관계가 없는 듯이 보였다. 이제 국내의 경제규모도 커졌으며, 첨단기술을 우리의 능력으로 개발할 필요가 절실해졌다. 새로운 특성을 갖는 새로운 물질의 개발과 이의 응용기술의 확보가 앞으로의 산업발전에 필수적이라 하겠다.

지금까지의 많은 위대한 발견과 발명이 그랬듯이, 연구실에서 우연히(?) 얻은 새로운 물질이나 발견된 새로운 현상이 새로운 과학기술 탄생의 원동력이 될 것이다. 기업은 보다 많은 연구개발비를 투입하여 활발한 연구경쟁을 벌일 것이 예상된다. 여하한 분야의 기술개발에도 여기에 물질이 관여하는 한 화학자와 화학의 지식이 요구된다.

●―여성에게 적합한 학문

나는 가끔 학생들이 지나치게 목적지향적이며 선입관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는 우연히(?) 새로운 물질이나 현상을 발견해야 하는 연구자에게는 장점이기 보다는 단점이 된다. 우리는 사실 앞으로 전개될 산업사회가 어떤 것인지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 따라서 장래에 어떤 물질계에 큰 비중이 주어질지 모르며, 지금 관심을 갖고 있는 물질계의 화학이 앞으로 5년 후에도 동일한 비중으로 관심이 주어질지도 알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앞에 전개될 새로운 상황에 용이하게 적응하고 개척해나가기 위해서는 넓은 범위의 보편적인 지식을 갖는 것이 필요하며,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는 기술과 능력을 배양해야 할 것이다.

앞서 많은 위대한 발견, 발명은 우연히 이루어졌다고 말했으나, 엄밀히 말하면 결코 우연히 된 것은 아니다. 과학 특히 자연과학은 우리의 감각을 도구로 하는 실험과 관찰의 결과에서 우리가 감각할 수 없는 자연의 법칙과 원리를 유추하고 이에 의해 새로운 것의 예측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많은 실험과 관찰이 은밀히 나타내는 자연의 법칙과 원리를 지각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와 통찰력이 과학자에게는 필요하다. 이들은 건전한 상식의 토양 위에서 풍부한 상상력과 강한 호기심 그리고 종합력으로 성장한다. 이를 갖춘 연구자들은 우연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게 된다.

끝으로 과학자를 꿈꾸는 여성들에게 몇마디 조언을 하는 것이 여자대학 교수이며 두 딸의 아버지인 나에게는 일종의 의무라 여겨진다. 첫째는 약 100년전 영국의 왕립학회가 한 소녀의 편지에 회답했듯이 화학은 여성이 하기에 알맞은 학문이라는 것이다. 많은 여성화학자가 지금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대변해준다.

둘째는 과거보다는 현재에, 그리고 현재보다는 미래에 보다 많은 여성화학자가 일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다는 것이다. 종래의 기업활동은 주로 생산에 치우쳐 강한 체력과 긴 노동시간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벌써 징조가 나타나고 있듯이 미래의 산업은 생산이 자동화되며, 연구개발과 서비스분야에 많은 인력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이들은 강한 힘과 장시간의 노동보다도 많은 지식과 깊은 생각이 요구된다.

핵가족제도와 생활의 간편성으로 여성이 가사에 종사하는 시간이 줄어들고, 따라서 앞서의 인력이 필요한 곳에서 일할 시간과 정신적 여유를 갖게 될 것이다. 더우기 앞으로 전개될 과학기술의 경쟁에는 단지 인류의 반만 차지하는 남성들만으로는 이길 수 없으며, 고급여성과학자의 적극적 참여가 필수적으로 요구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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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동아일보사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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