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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과 방황끝에 찾아낸 결론

 

갈등과 방황끝에 찾아낸 결론


제1 지망 불합격, 제2 지망 합격, 4년전 나의 삶의 방향을 돌려놓았던 그 순간이 아직도 어제 일인 양 생생하다.

그날 이후, 다시 나를 가다듬기까지 얼마나 많은 방황을 하였나? 스스로를 아웃사이더로 몰아갔던 대학1학년 시절도 지금 돌이켜 보면 하나의 애틋한 추억으로 떠오른다.

공부만이 생활의 전부였던 고3시절, 그렇게도 빨리 지나치고 싶었던 시간들이었으나 이제는 희미한 기억속으로 페이드 아웃(fade out)되고 있다. 지나고 보니 그 때가 나의 삶을 가장 왕성하게 살찌우던 전성기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진정으로 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앞만 보며 달려왔다. 때문에 자신을 차분히 정리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것이 후회된다.

무더웠던 여름도 그 끝을 드러내고 있다. 이제 생활의 일부분으로만 느껴왔던 공부라는 것을 돌아보면서 얼마 남지 않은 대학생활을 마무리하고 졸업후의 나의 진로를 설계해 볼 시점이다.

여고시절 나는 어떤 과목들보다도 수학이나 과학계통의 과목들을 좋아했다. 말하자면 다분히 이과취향의 학생이었던 것이다.

대학입시 위주의 학교수업때문에 모든 과목을 고르게 공부해야 했던 시절이었기에 화학이라는 과목에 특별한 관심을 갖지 못했다. 그저 수많은 법칙과 화학반응식들로 가득찬 분야일뿐. 특히 작용기에 따라 각기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름도 천차만별인 탄소화합물들을 배울 때는 복잡하고 까다로운 학문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거리감마저 느껴졌던 화학과 얼마간 친숙하게 된 것은 고2때였다. 우연하게 화학반(특별활동시간)에 들었던 게 '화해'를 하게된 계기였다. 이 시간은 실험위주로 진행되었는데, 이론중심의 수업과는 판이하게 다른 느낌으로 화학을 대할 수 있었다. 실험에 재미를 붙이고 실험결과들에 대해 경이를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인간의 생명을 다루고 연장시키는 의학에 더 큰 매력을 두고 있었다. 입학원서를 쓸 때 제1 지망으로 의대를 지원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누구나 다 그렇게 느끼겠지만 어이없게 낙방을 맛보았다. 대신 2지망인 화학과에 합격했으나 나의 대학시절은 갈등과 무력감으로 시작되었다. '재수해서 원하던 의대에 갈까', 정말이지 수없는 갈등속에서 방황했다. 그러다보니 이쪽도 저쪽도 다 놓칠 지경에 이르렀으나, 동요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이렇게 1년, 속절없이 시간만 보냈다.

대학 2학년이 되자 밀리는 전공과목은 더욱 나를 압박했고, 차츰 날개를 잃은 천사 꼴이 되고 말았다. 이제는 더이상 멈춰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열등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을 해야할까 고심했다. 결론은 공부였다.

유기화학 물리화학 등 본격적인 전공공부를 하면서 새로운 흥미가 새록새록 쌓여갔다. '길은 어느 곳에나'있음을 실감했다. 화학이라는 '세계에 차츰 빠져 들어간 것이다. 그 즈음 나는 '화학을 잘 하려면 어떤 소양을 갖춰야 할까' 자문했다.

화학의 세계 즉 화합물의 조성이나 구조, 화학반응의 메커니즘들은 눈으로 관찰하여 결정할 수 없지 않은가? 이러한 것들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세심한 실험과 관찰과정을 거쳐야 하고, 많은 사색과 창의성을 필요로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상 많은 화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화학법칙과 가설들을 배우고 그 일부를 스스로 실험해보며 재확인하는 과정들을 통해 화학과 가까워졌다. 고등학교때 복잡하고 어렵게만 느껴졌던 화학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화학공부를 하는 요령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우선 논리적인 사고의 훈련이 필요하다. 아울러 끊임없이 '왜', '어떻게'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몸으로 부딪쳐 보는 일, 즉 반복적인 실험의 중요성을 실감했다.

현대사회에서 과학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때로는 한 나라의 사회발전을 그 나라의 과학기술수준을 보고 판단할 정도다. 화학도 그 동안 많은 부분을 물리학 생물학 등과 교류하면서 발전해 왔듯이, 사회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예컨대 '엔트로피'라는 개념은 사회와 우주의 현상들을 열역학 법칙들로 설명하고 있지 않은가?

이공계 학생들은 사회·정치·경제 등의 세상사에 별 관심이 없는 '절름발이 지식인'이란 말을 많이 듣는다.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이 크게 증가된 지금, 그같은 얘기를 들을 때면 한편으론 부끄럽기까지 하다. 과학도를 자처하는 나는 이 문제들을 늘 가슴에 담고 있다.

"과연 과학을 함으로써 자기만족, 자기성취라는 것 이외에 사회나 인류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본다.

물론 과학이 순수한 호기심과 탐구의 열정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과학은 발견하고자하고 탐구하고자 하는 동기 자체만으로도 참여할 수 있는 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런 순수한 열정과 동시에 인류에게 기여 할 수 있는 과학만을 추구해 간다는 신념을 가지면서 공부하고 싶다.
 

생각을 잠시 멈추고, 창밖으로 바라다 본 교정의 모습이 유난히 정겹게 느껴진다. 이 교정에서 강의실과 실험실을 오가며 생활한지도 벌써 3년반이라는 시간이 흘러 어느덧 대학에서의 마직막 학기만을 남겨두고 있다.

2학기 개강을 앞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이 미래의 나의 모습을 그려보곤 한다. 하얀 가운을 입고 새로운 연구과제에 몰두하여 실험을 하는 모습, 강단에 서서 후배들을 가르치는 모습이 기분좋게 펼쳐진다.

오늘 내가 사랑하는 나의 길은 실제로는 스스로 택한 진로는 아니다. 마치 우연과 필연이 묘하게 교차돼 이 길에 들어선 것같은 느낌도 없지 않다. 하지만 나는 오랜 진통을 마감하고 새롭고 흥미로운 세계에 이제야 정착했다. 늘 인내하고 성실한 하얀 가운의 화학자, 이 모습을 일생동안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 충만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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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09월 과학동아 정보

  • 김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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