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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와 나 두가지 역할의 갈등


기말시험때문에 심신이 적잖이 바쁠때다. 게다가 고등학교 재학 시절이래, 거의 3년만에 마주하는 원고지가 꽤 부담스럽기까지 하다. 허나 지금까지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해 온 '공부'라는 것을 돌아보려고 한다. 단지 맹목이나 습관이 아닌, 내가 선택한 삶의 일부로서,새로 인식하는 기회로 삼고자 한다.

물리학에 관심을 갖게된 것은 고1때였다. 나는 수학을 특히 좋아했던 반면, 어학을 꽤나 싫어했다. 어머니께선 어학을 못하는 건 게으른 탓이라고 핀잔을 주시곤 했다. 사실 영어단어를 열심히 외운 기억도 없고, 사전이 낡을 때까지 뒤적이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무렵 문고판으로 간행된 현대과학에 대한 글들을 재미있게 읽었다.

상대성 이론을 소개하는 4차원의 세계, 절대0도(-273˚k) 근처에서 액체헬륨 등이 나타내는 초전도현상(저항이 없는 상태가 되어 전류가 손실되지 않는다), 물질의 궁극이라고 믿던 양성자, 중성자들이 보다 기본적인 입자들(쿼크)로 다시 분해되는 경이의 이야기들….

엔트로피는 무엇인데 계속 커지기만 하며, 우리가 사는 이 우주는 어떻게 생겨났으며 또 어떻게 될 것인지….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관심거리는 뭐니뭐니해도 아인슈타인의 위대한 영감(inspiration)이 번뜩이는 '상대성이론'이었다.

지금 보면 간단한 수식으로 기술될 수 있는 특수상대성이 말하고 있는 참으로 놀라운 사실들! 관측자의 운동에 관계없이 빛은 일정한 속도(1초에 30만㎞)로 관측된다. 광속에 가까이 갈수록 시간은 천천히 가고 진행 방향의 길이는 줄어든다! 이 사실만으로도 물리학은 참으로매력적이었다.

그당시 내게는 물리학이야말로 인간의 이성이 이룩한 최고의 지적 산물로 여겨졌다. 나는 물리학이 앞에서의 모든 문제-물질의 궁극은 무엇인가 등의-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자연법칙은 모두 질서정연하게 물리학이 기술하는대로 움직여갈 것이라는 등의 생각을하였다. 마치 19세기의 절대론자들처럼.

어쨌거나 나는 그당시 꽤나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에 가득차 있었고, 내가 이러한 물리학의 완성에 일익을 담당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사실 나는 대학에 와서 나와 비슷한 많은 과우들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열등감을 느낄 기회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과 친구들처럼 제2의 아인슈타인을 꿈꾸고 있었다.

누가 장래희망을 물으면 물리학자가 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왜냐고 물으면, '물리가 좋아서'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나는 성실하게 학과공부에 임했다. 무엇을 위한 성실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날 공부에 열심이었다. 공부한다는 것은 나에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이 특별히 즐겁지 않아도 좋았다.

나는 다른 대부분의 것에는 무관심했다. 즉 고등학교 교육이 안고 있는 문제점과 불필요한금지 사항, 그런 것들을 스스로 문제삼지도 않았고 제시된 원칙대로 사는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 나는 내가 느끼는 만족으로 충분했고 체제에 순응하는 모범(?)학생이었으니까. 또 틈틈히 읽은 실존주의 문학작품과 철학들, 특히 열을 올렸던 니체 등은 나자신의 개인주의를 심화시키고 엘리트주의 같은 것을 형성시켰다.

그 당시 나는 내가 가진 경이를 공유할 누군가를 원하고 있었으나 유보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대학이 이러한 나의 갈증을 해소시켜주리라 믿었다. 같은 학문적 이상을 가진 이들이 모여 토론하면서 서로를 실현해 나가리라 생각하였다.

드디어 대학입시를 치르고 원서를 썼다. 1ㆍ2ㆍ3지망 모두 '물리학과'라고 써 넣었다. 일종의 자만심이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물리를 최고의 이상으로 삼고 공부해온 것이 아니라 최고의 대상을 물리라고 생각하고 최고를 따라온 것이 아니었나 할 때가 있다.

무사히 합격은 했다. 내 입학성적은 과평균쯤 되었으리라.

이제 나는 평범한 학생이다. 결코 우수해서 주목의 대상이 되지 않는, 다만 여학생이라는 약간의 특수성을 가진 그런 입장이다. 대학은 나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수정하길 요구해 왔다. 학문적 동지로서 토론하고 서로를 실현해 내리라는 이상은 열등감으로 산산히 조각나 버렸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것은 나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물리가 좋아서, 물리를 연구하기 위해서 이 길을 택했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누구보다도 더 잘 해내야 한다는 욕구가 더 컸으리라.

그러나 이런 것을 오래 문제삼을 이유는 없었다. 그것은 알을 깨는 작업이었고 고통이 수반되는 과정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론 성장의 기쁨이기도 하였다. 편협한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보다 넓은 세상을 이런 기회가 오지 않았음을 아쉬워 했다. 어느 친구가 말한 것처럼, '특권 의식'은 없을수록 좋은 것이었다.

대학은 비교적 열린 사회이다. 자기 자신만 들여다보면 고등학교때에 비하면, 대학은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비판하게 하는 진보를 지향하는 사회이다.

나에게 가장 먼저 닥쳐온 것은 과학 그 자체에 대한 인식의 변화였다.

나는 '누구를 위한 과학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해야 했다.

단지 물리가 좋아서, 자기만족을 위하여, '진리를 위한 진리'를 주장하며 공부한다고 할 때, 현상적으로 나타난 과학기술에 의한 대량학살과 파괴를 설명할 수는 없었다. 대부분의 교수님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과학의 가치 중립성은 중 고등학교 시절 이후 우리의 뿌리깊은 믿음이기도 하였다. 실제로 얼마 전 과 학우들을 대상으로한 설문조사의 내용중에 '과학자의 연구동기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이 있었는데 70%이상의 학생들이 자기만족이라고 답한 것을 보았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학우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과학의 가치 중립성에 대한 강한문제 제기와 더불어 더이상 과학의 연구가 자기만족이나 지적 유희의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확산시켜가고 있다.

사회의 구조적 측면과 체제와 밀접하게 유착되어 있는 오늘날의 과학은, 과학의 가치중립성, 순수성이라는 허울아래 포장돼 있다. 순전히 개인적 차원의 연구에만 골몰하는 과학기술자에 의해, 또 이들을 조장하는 권력집단에 의해, 만인을 위해 전인류를 위해 이용되어야할 그 성과물들이 대중의 복지와는 유리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특정계층에 대한 반(反)사회적 기여를 심화시킴을 볼 때 문제의 심각성은 더해진다. 나는 최소한의 인식공규가 과학기술자들 사이에 있기를 바란다. 자신과 사회를 유기적으로 연관시키는 가운데, 사회를 위해 일하는 자신의 위상을 정립해 나갈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러한 생각들과 더불어 오늘날 대학사회에 넘쳐흐르는 변혁의지는 나를 비롯한 과우들에게 또다른 문제의식을 제공했다.

사회의 제(諸)모순을 해결해 나가고자하는 뜨거운 열기가 진지하게 성숙되고 있다. 나는 이런 노력들을 성실하게 담아내는 친구들을 볼 때 자신이 몹시 부끄럽게 느껴지곤 한다. 실천없는 인식이란 얄팍한 자기만족 이상은 아닐 것이다. 그 얄팍한 것 이상의 어떤 것을 찾지 못하는 자신의 비겁함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다. 매주 4~5개씩 부과되는 리포트와 엄청난 전공공부가 밀려있음을 깨닫고는 부랴부랴 도서관에 올라가 책장을 넘긴다.

마음의 여유…. 그런걸 바라는 것은 욕심일까? 2시간쯤 한문제를 붙잡고 끙끙대다가 창밖을 내다보면 푸른하늘이 있다. 짜증스런 맘을 달래려고 옆에 앉은 친구를 부추긴다. '커피라도 한 잔 마시고 오자.'

6층 열람실에서 내려와 커피 한잔씩을 빼어들고 '아크로' 잔디위에 모여 앉은 사람들을 멀찌감치 앉아 바라본다. 과학도로의 삶이, 이땅의 대학생으로서의 삶과 저만치 유리되어 있는것은 아닌가 생각하면서. 친구는 말한다.

"물론 어렵겠지. 두가지 역할을 모두 소화해낼 수 있는 삶을 찾는다는 것은…. 하지만 찾아내야지. 실천적 노력만이 이를 해결해주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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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 이남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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