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으로도 독특한 구조와 성능을 가진 한선이 관련 민속과 함께 재현된다.
"겨레의 배 황포돛단배를 한강에 띄우세"라는 기치아래 지금은 사라져버린 우리 고유의 배를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히 벌어지고 있다.
지난 10월 30일 서울 종근당빌딩에서는 흥겨운 뱃노래와 풍물놀이와 함께 '황포돛단배 띄움회' 발기대회가 열렸다. 각계 인사 3백명이 참여한 이 대회에서는 김순제(金順濟·인천교대)교수를 발기위원장으로 김재근(金在瑾·서울대)명예교수를 고문으로 추대하고, 단절되어 가고있는 민족의 문화유산인 황포돛단배를 복원, 내년 올림픽 기간중 고유 뱃놀이와 민속행사를 개최하기로 했다.
황포돛단배란 말그대로 누런 돛을 단 배. 발동선이 도입된 후 돛단배의 모습은 거의 찾아보기가 어려워졌지만 현재도 떠다니는 돛단배는 거의 전부가 일본식의 배라는 것이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조선시대까지 이어진 신라의 조선술
우리나라의 조선술은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미 마한시대의 기와에서 우리배의 형태를 찾아볼 수 있으며, 삼국시대의 토기와 고분벽화에도 그 모습이 나타난다. 한편 우리 선조가 일찌기 우수한 해양민족이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실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을지문덕 장군은 수·륙작전에 능했다고 전해지며 백제는 왕성한 해상활동을 바탕으로 중국의 요서(遼西)지방을 점령하기도 했다.
신라시대에 이런 해상활동은 정점에 달해 장보고는 동지나 해상권을 장악했다.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이 당시의 세력이 인도네시아의 자바지방에까지 미쳤다는 주장도 있다. 아뭏든 분명한 것은 활발한 해상활동의 근저엔 우수한 조선술과 선박이 있었다는 점이다. 신라시대의 선형(船型)은 조선시대에까지 이어졌다.
고려시대에도 조선기술이 발달했고 고유의 조선법이 확립되어 있었다. 길이가 96척에 달하는 군선이나 1천석을 실을 수 있는 배가 만들어졌다는 기록을 볼때 방대한 조선능력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여몽(麗蒙) 연합군의 일본 정벌시 중국의 군선은 태풍으로 거의 침몰한데 반해 고려의 군선은 온전했다는 사실은 당시의 조선술이 중국을 앞섰음을 시사한다.
왜구가 창궐한 조선시대에는 군선의 발전이 눈부셨다. 세종때는 9백여척에 달하는 군선을 보유했다고 전해지며, 명종때는 독특한 구조의 순선이 개발되기도 하였다.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은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당시의 조선술을 말해준다.
한선이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 것은 일제시대에 접어들고부터였다. 우선 발동기를 단 동력선(통통배)이 도입돼 범선인 한선은 도저히 이것과 경쟁할 수 없었다. 아울러 일제는 벌목을 억제한다는 명목아래 한선을 만들던 목수들을 동원해 재교육시키고 모든 배의 형태를 일본식의 일중선으로 바꾸도록 강요했다고 한다.
거북선은 철갑선 아닌 목선
현재 한선은 그 건조기술이 경험과 함께 단절된 상태이다. 다만 일부지역에서 부분적으로 원형을 유지한채 버려진 것이 발견되었을 뿐이다.
한선에는 전선(군함) 조운선(화물선) 어선 시선(땔나무나 물고기 운반선) 늘배(다용도의 소형배)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전선이 가장 규모가 크며, 어선과 조운선이 중간 크기이고 나머지는 소형선박이다.
이조시대의 전선으로서 특이한 것이 판옥선(板屋船)인데, 2층의 갑판을 채택했다. 이것은 하갑판은 노를 젓는데 전념하고 상갑판에서는 전사들이 유리한 위치에서 기민하게 전투를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특히 거북선은 판옥선의 상갑판 대신 나무로 된 둥근 지붕을 씌우고 그 위에 칼침을 꽂는 구조. 배 앞에는 박달나무로 된 두 개의 머리가 튀어나와 있는데 위의 '용머리'에서는 대포를 쏘았고 아래의 '귀신머리'로는 왜선의 옆구리를 들이받아 파손시켰다. 참고로 거북선에 대해 잘못 알려진 상식은, 거북선이 이순신에 의해 발명되었으며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라는 점. 김재근교수의 '거북선의 신화'란 책에 의하면, 거북선은 철갑선이 아니라 목선이었으며 일본측이 패전의 핑계로 허위보고한 것이 외국에 알려졌기 때문에 잘못이 생겼다고 한다.
한선은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만큼 독창적인 구조와 우수한 기능을 갖췄다고 한다. '황포돛단배띄움회'의 사무국장인 이우원씨로부터 조선공학적 견지에서 본 한선의 우수성을 알아보았다.
세계에서 가장 앞선 방향타
우선 겉으로 보아서 한선은 앞끝이 높이 치솟은 모습을 하고있어 파도를 타거나 배의 안정성에 유리하다. 또 앞부분의 물과 닿는 부분은 바가지를 엎어 놓은 것처럼 둥근 모양을 해 물의 저항을 최소화하도록 되어있다. 이에 비해 일본배처럼 앞부분이 유선형이면 오히려 물을 갈라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된다. 한선의 바닥은 평평한 평저선형(平底船型)이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연근해 및 지형에 적합한 형태로서 좌초에 강하며 아주 얕은 물에서도 쉽게 정박할 수 있을 뿐더러, 무게중심이 낮아 복원능력이 좋다.
한선의 가장 큰 특징으로 관련학자들이 '세계적 특허감'이라고 평가하는 것이 '키따리'즉 키(방향타)이다. '키따리'는 배뒤부분에서 비스듬히 배밑바닥까지 뻗쳐있는데, 이것은 현대선박의 센터보드 역할을 해 바람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게 하고, 불규칙한 풍향이나 풍압에 의한 침로(針路) 이탈을 최대한 방지시켜 주며, 선박의 방향전환을 용이하게 해주는 독특한 구조이다.
범선의 우열은 바람을 얼마나 거슬러 올라가느냐로 결정된다고 한다. 그런데 한선은 키따리를 이용해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과 45°각도로 거슬러 올라갔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연평에서 한강까지 물때 좋으면 하루만에 닿았는데, 바람의 반을 째고 올라갔다"는 사공들의 증언에 토대를 둔 것.
서양배의 경우 한선의 키따리에 해당하는 것이 키일(용골)이다. 배밑에 튀어나온 키일은 바람을 거슬러 오를 때 배가 밀리는 것을 막아주는데, 바이킹이 이를 최초로 고안해 해상을 주름잡았다. 현대의 배에는 이런 기능을 센터보드가 하는데 17세기 네덜란드에서 개발됐다. 한선은 방향타와 센터보드의 역할을 겸하는 키따리를 서양보다 훨씬 전에 고안해 사용했던 것이다.
다음에 한선의 특징으로 돛을 들 수 있다. 한선의 돛은 돛대와 함께 바람의 방향에 따라 전후좌우로 움직일 수 있으며, 강풍이 불 때는 눕힐 수도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배를 만드는 과정도 특이하다. 주로 홍송 잣나무 육송 참나무를 재료로 사용하는데 목수는 설계도가 따로 없이 작업한다는 것. 이때 옆에서 비나리(창)꾼이 배 만드는 과정을 창으로 부르며 어느 나무를 어떤 크기로 자르라는 등 지시를 하면, 도목수는 후렴을 맞추며 제작한다. 예컨대 비나리꾼이 "고임목을 놓아라. 굄목을 놓아라. 칫수에 맞춰서 똑바로 괴어라."라고 배짓는 노래를 하면 목수는 '어 어리두 배짓자"고 소리를 받으며 일한다는 것.
한선은 다른 나라와 달리 용골이나 격벽에 의존하는 것이아니라, 버팀목 없이 나무못을 사용해 튼튼한 선체외판을 절묘한 이음새로 구성하기 때문에 공기도 짧고 건조비용도 적게 먹힌다.
내년까지 9척 복원 계획
우리 고유의 배를 되살리자는 움직임이 처음 싹튼 곳은 충남 연포에 위치한 대한청소년요트학교. 여기서 우리나라 고유의 범선으로 교육했으면 하는 바람과 아쉬움을 가진 몇몇 청년들이 한선의 자료를 찾아나선 게 계기가 되었다. 이때 40여년간 이 분야를 연구해온 김재근교수와 평생을 두고 뱃노래의 발굴에 매진해온 김순제교수와의 만남이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자료를 조사했으며 목선 제작에 관여했던 도목수와 도사공을 찾아냈다. 그 과정에서 강화도 외포리의 어류정이란 곳에서 폐선이 돼 버려진 한선을 발견한 것은 큰 수확이었다. 또한 1986년 3월에 국립도서관 조선총독부 자료실에서 '어선조사보고서'란 책자를 찾아냈는데, 여기서 입수한 한선의 설계도를 바탕으로 한선의 모형을 만들 수 있었다. 한선은 이제 그 모습을 점점 분명하게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다.
황포돛단배띄움회는 회원들의 자발적인 모금액 3억원을 기금으로 하여 1차로 내년 9월까지 조운선 상선 어선 시선 등 1개 선단 9척을 건조할 계획이다. 물론 이 복원작업은 각계 전문가는 물론 도목수와 도사공들의 엄밀한 고증을 거칠 것이다.
전래의 한선 황포돛단배를 현대의 선박과 기능상 우열을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선은 목선으로서 동서고금의 어느 선박보다도 구조가 독특하고 성능이 우수하다. 또한 문화적으로도 한선의 건조 및 운항과 관련한 각종 민속은 보족, 계승할 가치가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
신라때부터 전국의 강과 바다를 누비며 겨레의 숨결을 실어 나르던 한선이 다시금 한강에 그 모습을 나타낼 날이 멀지 않았다. 황포돛에 실려 흥겨운 뱃노래가 울려퍼지는 날을 기대해 본다.
어겨디야어겨(어겨이여어) 허여여저처(여어차아) 달-은 밝고- 명랑-한데(어이야자차) 고향-생각--뿐이-로다(에이야) 허거이디야(에이야) 허-헤(에이야) 허여이드르라-허어-어-야(어이야자차) 저기저기-등불은 뵌다(에이야차) 저기-저기는-어기이-술집-인데(어이야자차) 보구두-못가는-뱃놈의 신세(어이야자차) 빨리-저-서어-에술먹으로 들어가자(어이야자차) 어겨-디여 에-이놈-들아(어기여차) 어허-(어이져) 어기-어허야(어이야자차)
(한강 시선 뱃노래. 1977년 경기도 강화군 외포리 앞바다에서 김순제채록, 괄호 속은 받는 소리.)